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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세월호를 관제하지 않았다

세월호 사고 늑장·부실 대응한 진도 VTS 해경 관제사 13명 전원 무죄 확정… 교신일지 조작만 인정해 벌금 200~300만원
등록 2015-12-10 12:46 수정 2020-05-02 19:28
세월호 탐사보도 3부는 이 단독 입수한 기록을 재구성해 2014년 4월16일 사고 당일을 재현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청와대에서 생긴 일을 다뤘다(1089호 특집 ‘구조 실패한 해경과 꼭 닮은 청와대’ 참조). 두 번째 이야기는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세월호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 이유를 추적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오전 8시48분, 진도 VTS 관제실에는 관제사 8명이 합동근무를 했지만 세월호가 항해하던 수역은 아무도 충실히 관제하지 않았음을 이 확인했다. 사고 이전인 2014년 2월 관제사가 관제실에서 골프 연습을 하는 모습도 최초 공개한다. _편집자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결론 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5월19일 대국민 담화에서 ‘해양경찰 해체’를 선언했다. 세월호 침몰 당시 늑장·부실 대응으로 해경이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지만 사망 선고는 예상치 못한 초강수였다. 박 대통령은 “사고 직후 (해경이) 즉각적으로 적극적인 인명 구조 활동을 펼쳤다면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늑장·부실 대응의 시초는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였다. VTS는 선박의 좌초·충돌 위험이 있는지 관찰·예방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신속히 초동조치하는 곳이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8분 세월호가 100도 이상 급선회하며 멈췄을 때 사고 수역을 관할하는 진도 VTS는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고 발생 18분이 지난 9시6분, 해경 상황실에서 전화를 받고서야 세월호의 이상 항적을 알았다. 그사이 단원고 2학년 고 최덕하군은 “살려달라”고 119에 신고했고(8시52분), 세월호 1등 항해사 강원식은 제주 VTS에 “해경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8시55분).

진도 VTS의 부실 관제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야간에는 관제사 1명에게 업무를 떠넘기고 나머지 3명은 쉬거나 잤다. 4인1조로 24시간 풀 근무하고 48시간 쉬는 ‘3부제 교대 근무’가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래는 관제 수역을 1·2섹터로 나눠 2명이 한 섹터씩 관찰하고, 다른 2명은 전체 수역을 보거나 대기해야 한다.

혼자 1·2섹터를 관제할 때도 관제사는 모니터를 보지 않고 잠을 자거나 골프 연습을 했다. 그런 모습이 관제실에 설치된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변칙 근무, 부실 관제를 감추려고 진도 VTS 관제사들은 교신일지를 조작하고 관제실 CCTV를 돌려놓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는 이마저도 떼어 숨겼다. 야근수당은 평균 월 100만원씩 꼬박꼬박 챙겼다. 진도 VTS 센터장을 포함한 관제사 13명은 △직무유기(변칙 근무) △공용물건 손상(CCTV 제거) △허위 공문서 작성(교신일지 조작)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은 11월27일 직무유기, 공용물건 손상에 대해 무죄로 판결했다. 허위 공문서 작성죄만 인정해 200만~300만원 벌금형을 확정했다. “직무를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했을 뿐 직무를 의식적으로 포기했다고 보기 어려워 직무유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로 사망 선고를 받았던 해경이 1년6개월 만에 기사회생한 셈이다.

그런데 이 입수한 검찰 수사자료와 감사원 결과보고서를 종합해보면,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8분 세월호가 급회전하며 좌현으로 기울어질 때 진도 VTS 관제실에서 근무한 관제사 8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2섹터를 충실하게 관찰·추적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IMAGE6%%]“직무에 게을렀을 뿐 포기하지 않았다”

세월호 사고 당시 관제실에는 센터장과 8명의 관제사가 근무했다. 전일·당일 근무팀은 △1섹터 관제사 △2섹터 관제사 △전체 관제사 △상황대기자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오전 8시35분 당일 근무자 4명이 출근할 때 전날 관제사 A씨가 1섹터 관제석에서 1·2섹터를 모두 관제하고 있었다. A씨는 원래 2섹터 관제사였는데 1섹터 관제사 B씨(팀장)의 부탁을 받고 8시15분부터 1섹터 관제석에 앉아 있었다. 당일 근무자들은 인수인계를 받고 8시45분부터 관제업무를 시작했다. 1섹터 관제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하지만 2섹터 관제는 삐걱거렸다. 2섹터 당일 관제사인 C씨는 관제석에 앉지 않고 1·2섹터 관제석 사이 상황근무자석에서 근무일지를 썼다. 2섹터 관제석에는 전날 상황대기자 D씨가 앉아 있었지만 그는 관제 화면을 바라보지 않았다. 통계자료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당일 상황대기자 E씨가 다가오자 D씨가 2섹터 관제석을 비켜줬다. E씨를 2섹터 당일 관제사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E씨는 2섹터 관제사가 아니라서 잠시 앉았다가 디브리핑(관제 녹음기)으로 옮겼다. 세월호가 항해하던 2섹터를 충실히 관찰·추적하는 관제사가 없어졌다. 그 순간 세월호가 급회전하다가 멈춰섰다. 오전 8시48~50분의 일이다. 그 모습은 관제 화면에 뚜렷이 나타난다. 하지만 진도 VTS 관제사, 그 누구도 세월호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8시48~50분 이상 항적, 8명 관제사 “몰랐다”

진도 VTS 관제실에는 관제 수역의 해도를 보여주는 모니터가 7대 있다. 4대는 1섹터 관제석에, 3대는 2섹터 관제석에 놓여 있다. 모니터 1대는 1섹터 전체를 보여주고 나머지 6개는 1, 2섹터를 나눠 띄운다. 이 모니터에 선박자동식별장치(AIS) 신호와 레이더로 확인한 선박의 위치가 아이콘으로 표시된다.

세월호 같은 여객선의 아이콘은 남녀가 손을 잡은 듯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다. 사람이 많이 타는 다중 이용 선박이라는 뜻이다. 아이콘 앞에는 가느다란 선이 뻗어나와 있는데 항해 방향을 뜻한다. 배의 속도가 빨라지면 이 선이 길어지고 느려지면 선이 짧아진다. 배가 멈추면 아예 없어진다.

세월호는 오전 7시8분 진도 VTS 관할 수역인 전남 신안군 흑산도 근처 해상에 진입했다. 2섹터 관제 수역이었다. 진입 보고는 없었고 진도 VTS도 묵인했다. ‘무교신 깜깜이’ 운항이라는 비판이 일자 진도 VTS는 진입 보고가 의무 사항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입·출항을 관리하는 항만VTS(14곳)와 달리 해상 흐름만 살피는 연안VTS(3곳)에는 AIS 가동 선박에 진입 보고를 면제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 문아무개(64) 선장의 진술은 달랐다.

검사  진도 VTS 해역을 진입할 때마다 진입 보고를 했나?
선장  VTS 관할 해역에 들어가면 반드시 진입 보고를 하고 해역을 벗어나면 이탈 보고를 했다.
검사  진입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나?
선장  진입 보고를 하지 않으면 진도 VTS에서 호출한다. 늦게 하는 경우는 있어도 아예 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2010년 진도 VTS가 개국할 때 관할 수역을 알려주며 “앞으로 진입 보고를 하라”고 안내했다.
검사  진입 보고를 의무사항으로 알았나?
선장  그렇다.
(2014년 6월13일 검찰 진술조서)
변칙 야간근무, 더 교묘하게 더 은밀하게

사고 당시, 진도 VTS 관제사 A씨는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지만 ‘도메인 워치’를 설정했다. 세월호의 아이콘에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이제 다른 배가 세월호의 반경 500m 안에 들어오면 경보가 울린다.

당시 A씨는 혼자 1, 2섹터를 모두 관찰하고 있었다. 원래 2명이 1섹터와 2섹터 수역을 각각 책임 관제해야 하지만 변칙 야간근무 형태는 진도 VTS의 오랜 관행이었다. 변칙 근무하면 관찰 대상과 교신이 2배 늘어나 관제 소홀은 불 보듯 뻔했다.

이 때문에 세월호 직전에도 사고가 발생한 바 있다. 3월28일 새벽 2시35분 밀매도 인근 해상에서 화물선과 예인선이 충돌했다. 당직 관제사가 예인선과 피예인선을 어선 2척이 나란히 가는 것으로 착각해 예방하지 못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서해해경)은 진도 VTS를 감찰해 책임 관제를 불이행한 관제사 3명을 찾아냈다. 경고 조치하고 재발 방지 교육을 했다.

그러나 진도 VTS 관제사들는 야간근무 변칙 행태를 고치지 않고 더욱 조직적으로, 은밀하게 이어갔다. 변칙 근무가 들통난 이유는 1섹터 관제사가 2섹터 관제 수역의 선박과 교신한 뒤 그 내용을 교신일지에 직접 적었기 때문이었다. 서해해경 경고 이후 진도 VTS의 1섹터 관제사는 2섹터 선박과 교신하더라도 그 내용을 교신일지에 적지 않고 메모로 남겼다. 그 메모를 보고 나중에 2섹터 관제사가 자신의 명의로 교신일지를 작성했다. 변칙 근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공문서를 허위 작성한 것이다.

이날 세월호는 8시20분 맹골수도에 들어서면서 앞서가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를 추월했다. 항해 속도는 20노트(시속 37km). 맹골수도 해역은 전남 진도군 서거차도와 맹골군도 사이를 지나는 좁은 바닷길이다. 전남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 울돌목 다음으로 조류가 세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해양사고가 28건이나 났다. 하지만 이날 바다는 잔잔했고 날씨도 좋았다.

진도 VTS 2섹터 관제 화면에 맹골수도를 지나는 세월호가 잡혔다. 남녀 아이콘은 가느다란 선을 길게 뻗은 채 제주로 향하고 있었다. 8시25분 센터장이 진도 VTS의 1층 현관 출입문 벨을 눌렀다. 상황대기자 D씨가 관제실 뒤쪽에 있는 인터폰으로 출입문을 열었다.

당시 세월호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2섹터 관제석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2섹터 관제사 A씨가 1섹터 관제석에 앉아 진도 VTS 전체 수역을 관제했다. 1섹터 관제사 B씨(팀장)는 우수 관제 사례를 작성한다고 8시15분부터 관제석을 떠나 업무용 컴퓨터를 사용했다.

8시45분 전일·당일 관제사 8명 합동근무

상황대기자 D씨가 빈 2섹터 관제석에 앉았다. 모니터를 슬쩍 봤지만 주로 근무일지에 쓰여 있는 교신 횟수 등을 메모했다. 오전 9시부터 근무할 당일팀(4명)이 8시35분에 도착했다. 관제실이 어수선해졌다. 1·2섹터 당일팀은 1섹터 관제석 주변에서 주목해야 할 해상교통 상황을 A씨에게서 들었다.

A씨는 8시46분 세월호가 맹골수도를 빠져나와 정상적으로 항해하는 모습을 관제 화면에서 봤다. 당시 한 모니터가 병풍도를 포함한 맹골수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세월호 주변에 항해하는 선박이나 조업 중인 어선은 없었다. 충돌이나 좌초 등 사고 발생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 A씨는 더 이상 세월호를 관찰·추적하지 않았다.

8시48분 세월호를 나타내는 아이콘이 오른쪽으로 J자를 그리며 돌았다. 기다랗게 뻗어 있던 선도 점차 줄어들었다. 아이콘은 오던 길과 반대 방향으로 느리게 이동하다가 멈췄다. 8시50분 이었다. 이상한 운항이었지만 합동 관제를 하던 관제사 8명은 이 변화를 아무도 감지하지 못했다. 전일 2섹터 관제사 A씨의 검찰 진술이다.

검사  8시50분 세월호의 이상 징후를 목격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관제사  당일(근무)자와 옆 좌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고 새벽에 시정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괜찮고 해상 특보도 없다. 관제 수역 내 특이 사항은 없다.” 말이 끝난 게 8시54분이었다.
검사  대신 모니터를 관찰한 사람이 있었나?
관제사  없었던 것 같다.
(2014년 7월6일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

당일 2섹터 관제사 C씨는 “어선들이 조업 중인 지역이 오히려 충돌 위험이 있다고 판단돼 다른 5~6군데 지역군을 집중 관찰하느라 맹골수도를 빠져나온 세월호를 관찰·추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선박 80여 척이 있었던 2섹터 관제 수역에서 관제 대상은 세월호를 포함해 18척에 불과했다. 이 중에서도 대형 해상사고를 일으킬 수 있어 주요 관찰·추적 대상인 여객선과 위험 화물 운반선은 4척이었다. 다른 선박을 집중 관찰하느라 ‘주요 관찰·추적 대상’을 놓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직무를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했을 뿐 직무를 의식적으로 포기했다고 보기 어려워 직무유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로 사망 선고를 받았던 해경이 1년6개월 만에 기사회생한 셈이다.

1심은 “8시50분 전날(근무)자가 관제석을 떠나고 9시에 당일(근무)자가 근무할 때까지 10분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2섹터 수역에서는 관제가 충실히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직무유기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근무를 소홀히 한 정도를 넘어 자신의 직무를 의식적으로 포기했다고 보기 어렵다.”

전날 근무자가 퇴근한 직후인 9시6분 해경 상황실이 세월호 소식을 알렸다. 진도 VTS는 사고 발생 18분이 지나 부랴부랴 세월호와 교신했다. 이후 9시37분까지 31분간 진행된 교신 녹취록에는 당시 침몰 중인 세월호의 급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저희가 기울어서 금방 뭐…. 넘어갈 것 같습니다.”( 9시10분) “배가 많이 기울어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9시14분) “현재 방송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9시23분) “승객이 너무 많아서 헬기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습니다.”( 9시27분) “배가 한 60도 정도 좌현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 9시30분)

하지만 세월호 정보는 출동하는 경비정과 헬기에 실시간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진도 VTS는 상황정보 문자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았고 해경 주파수공용통신(TRS)으로도 교신하지 않았다. 오로지 상급기관인 서해청 상황실에만 전화 보고를 했다. 서해청 상황실은 진도 VTS 보고 내용을 어느 곳과도 공유하지 않았다.

9시50분에야 전날 관제사들 복귀

A씨는 다른 관제사 B,D,E씨와 함께 퇴근하다가 목포해경 상황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배 하나가 침수되고 있다. 알고 있나?” 9시12분이었다. 그는 “모른다”고 끊었다. 진도 VTS로 전화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 아무도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A씨는 생각했다. 급히 차를 돌렸다.

9시50분 진도 VTS에 도착해보니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 세월호 선원들은 진도 VTS와 교신을 끊고 해경 경비정 123정으로 탈출한 뒤였다. 배에는 아직 400여 명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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