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 아버지, 사장님이세요!” “윤 이사 너 미쳤냐? 성모마리아야? 나 네 말만 믿을 수 없으니까 유전자 검사로 확인해야겠어.” 국내 굴지의 위너스그룹 강기범 사장은 업둥이 막내아들이 실은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부하 직원의 주장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유전자 검사 결과를 통보받고서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현실을 받아들인다. 승마레저타운 건설부터 커피사업까지 문어발 경영을 하는 백학그룹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주다해 팀장은 오너 아들인 백도훈과의 결혼이 순조롭지 않아 심기가 불편하다. 특히 시누이 자리인 백도경 전무의 반대가 완강하다. 그러나 남다른 ‘촉’을 지닌 주 팀장은 백도경·도훈 남매가 사실은 모자 관계임을 알아낸다. “주다해, 너 다 헛소리야. 누가 네 말을 믿을 거 같아?” “(유전자 검사 기관이 명시된 봉투를 보이며) 유전자 검사 결과예요.” 봉투 속 서류는 백지였지만 백 전무는 ‘유전자 검사’라는 말 한마디에 꼬리를 내린다.
오늘 맡기면 내일 확인 가능한
KBS , SBS , TV 드라마 속 이야기다. 이젠 물릴 법도 하건만 여전히 많은 드라마에서 다채로운 ‘출생의 비밀’이 등장한다. 과거 드라마에선 ‘내가 네 애비(에미)다’류의 당사자 증언이나 제3자 목격담이 출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 속 인물들은 어디서 보고 배운 것처럼 일제히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다. 요지경 현실이 부풀려져 드라마에 녹아들고, 이런 드라마가 다시 잠자고 있는 ‘핏줄 확인 욕구’를 자극하는 것일까. TV 밖 세상에서도 친자 등 가족관계 확인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서울가정법원 맞은편 건물에는 한 업체가 내건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 간판이 여럿 걸려 있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대여섯 명의 직원이 전화로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 업체는 친자·가족관계 확인 검사 건수가 지난해 대비 10~15%가량 늘어났다고 밝혔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도 친자 검사를 해준다는 업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에 신고된 유전자 검사 기관은 대학병원 등 의료기관과 비의료기관을 합쳐 약 180개다. 주로 대학병원이나 민간 연구기관에서 친자확인 검사를 시행한다. 다른 유전자 검사에 비해 친자확인은 정확도가 높은데다, 검사를 쉽게 할 수 있는 시약이 보급돼 있어 시장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다. 특히 6~7군데의 민간 연구기관이 가격 경쟁을 벌여 2000년대 중반 80만원 안팎이던 검사 비용이 최근 20만~30만원대로 떨어졌다.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한 민간 검사기관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족관계 확인 검사가 한 달에 수천 건 정도 이뤄지고 있으리라 추정했다. 최근엔 별다른 검사 설비를 갖춰놓지 않고도 ‘연구소’로 오인할 만한 간판을 내걸고 고객을 유치해, 민간 연구기관에 물량을 넘기고 수익을 남기는 중개업체도 생겨났다. 민간 업체들 간에 고객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자 정부 ‘인증’ 기관이라는 과대광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사건·사고나 유명인 친자 감별에만 특별히 사용되던 친자확인 검사에 대한 일반 대중의 접근성이 높아진 것이다.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는 처음 수정란이 가지고 있던 유전물질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모 양쪽에서 물려받은 23쌍의 DNA다.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는 혈액이나 모근이 있는 머리카락, 침 등 검체(샘플)에서 부모 및 자녀의 여러 DNA를 추출한 다음 유형 비교를 통해 친생 관계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여러 업체에 문의한 결과, 검사 의뢰 절차는 간단했다. 부모와 자녀가 유전자 검사 신청서 및 검사 동의서를 작성한다. 검사 대상자가 미성년자·심신미약자이면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신청이 접수되면 직원이 검체를 채취해간다. 검사 결과는 하루 정도면 나온다.
친생 확인, 친생 부인 소송 모두 늘어
해마다 10만 쌍 이상이 이혼을 한다. 혼인 외 자녀를 낳는 경우는 많아졌고, 유전자 검사 등 핏줄 확인은 간편해졌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부모와 자녀 관계가 잘못됐다며 이를 바로잡겠다는 소송도 늘고 있다. 가정법률 전문 김삼화 변호사는 “예전에는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고 증인 진술이나 정황 증거를 가지고 가족관계를 판단했지만 기술이 발달해 본인들이 부자 관계라고 인정해도 법원에서 유전자 검사를 요구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 결과가 증거로 자주 활용되는 소송은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이나 친생부인의 소 등이다. 소송 당사자들이 직접 검사를 의뢰해 그 결과를 법정에 제출하기도 하고, 재판부가 특정 기관을 지정해 감정을 의뢰하기도 한다.
민법 제844조에는 “처가 혼인 중에 포태한 자는 부(父)의 자(子)로 추정한다. 혼인 성립의 날로부터 200일 후 또는 혼인 관계 종료의 날로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는 혼인 중에 포태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돼 있다. 법률상 혼인 관계에 있는 부부가 아이를 출산하면 남편의 아이로 추정되지만, 친자 관계가 아닌 경우 일정한 기한 내에 남편이나 아내가 친생 추정을 번복하는 소송을 제기해 법률상 부자 관계를 부정할 수 있다. 친생자 추정을 받지 않았거나, 허위 출생신고로 친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엔 친생자관계존부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대법원이 발행하는 사법연감을 보면, 2002년 친생부인 소송(1심 기준)은 36건이었으나 2011년에는 320건으로 증가했다. 친생자관계존부확인 소송은 같은 기간 2588건에서 4730건으로 늘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속내를 털어놓은 서울에 사는 30대 남성은 친생부인 소송을 낸 상태다. 이 남자는 교제하던 여자친구에게서 아이를 가졌다는 통보를 듣고 서둘러 결혼을 했다. 그러나 결혼 뒤 이 아이가 다른 남자의 아이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는 아이를 더는 키울 수 없다며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고, 아내와는 협의이혼을 하기로 했다. 여성 쪽에서 친생부인을 원하는 경우도 있다. 10년 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한 여성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집을 나오게 된다. 법적으로는 이혼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새로운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법에 따라 전남편의 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 친생부인 판결을 받아 혼인 외의 자로 만든 다음 생부를 인지하는 절차를 거쳐야 생물학적·사회적 부자 관계에 부합하는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 수 있다.
“검사 결과 조작해 처벌받은 사례 있다”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가슴으로 낳은 자식과 법률적 관계를 정리하는 사연도 있다. 실제 부양 여부와 상관없이 자녀 등 부양의무자가 어느 정도 수익이 있으면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 어려운 사회 현실이 투영된 사례다. 생활이 어려운 어르신들의 경우, 친자가 아닌 자녀와의 가족관계를 정리하는 소송을 진행해 수급자가 되기도 한다. 서울시복지재단은 2011년부터 한 민간 검사기관과 협약을 맺고 무료 친자확인 검사를 진행해왔다. 서울 강서구 등촌3동 주민센터 강경원 주무관은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는 가족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의뢰가 등촌동에서만 매년 10건 정도 들어오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수급권 문제로 친자식과의 법률적 관계를 끊으려고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가정법원 임종효 공보판사는 “한 어르신이 40~50대가 된 자녀 세 명에 대해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를 제기한 적이 있다. 친자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들 세 명은 할아버지의 친자였다. 알고 보니 수급권을 받으려고 이러한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혼 소송 과정에서 재산 분할 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자녀에 대한 친자확인 검사를 하기도 한다. 김삼화 변호사는 “이혼 관련 상담을 하다보면 가끔 자기 아내의 행실이 의심스럽다며 아이 모발을 가지고 몰래 검사를 해보는 사람도 있더라”라고 말했다.
재중동포는 민간 업체들의 주요 고객이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동포 1세 및 그 자녀들은 국적 회복이 가능한데, 신청을 하려면 자신이나 부 또는 모가 한국 국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국내 거주 친척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족보나 주고받은 편지, 친척과의 유전자 감식 결과 등이 이런 증거에 포함된다. 한 유전자 검사 기관 관계자는 “여행사나 법무사들이 국적 회복을 원하는 재중동포를 모아 물량을 주다보니 단가를 낮추는 경쟁이 치열하다”며 “간혹 검사기관 직원이 이들과 짜고 유전자 검사 결과를 조작해 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법률을 어겨가며 검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극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장치인 친자확인이 대놓고 이뤄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검사 당사자인 자녀나 배우자 모르게 이들의 머리카락이나 평소 사용하던 칫솔 등을 가져다 검사를 의뢰하는 장면이 많다. 실제로도 가능한 것일까.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를 해준다는 한 업체에 전화를 걸어 배우자 동의 없이도 의뢰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상담원은 “유전자 검사는 대상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게 맞는데 개인적으로 확인만 하는 경우는 그냥 진행한다. 모근이 있는 머리카락이나 손발톱 등을 우리 쪽으로 보내주면 된다”고 설명했다. 다른 민간 연구기관에서도 이런 묻지마 친자확인 의뢰를 받아주고 있다. 대개 법적 효력이 있는 ‘공공기관 제출용’과 구분되는 ‘개인 확인용’이라고 안내했다.
의뢰자가 샘플을 채취해 우편으로 신청하는 등 신분 노출이나 동의서 제출 없이도 검사를 의뢰할 수 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검사를 하기도 하지만 배우자 부정 등을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가운데는 속옷 등을 가지고 와 정액반응 검사를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진짜 내 부모인지 의심된다며 친자확인을 의뢰하는 이도 있다. 업체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개인 확인용’ 검사를 의뢰하는 경우가 전체 고객의 30%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유전자 검사는 유전자를 제공하는 사람의 서면 동의가 있어야 시행될 수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시체 등 누구인지 식별해야 할 긴급한 사유가 있거나, 이산가족 찾기 등 다른 법률에 규정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 대상자 동의 없이 검사를 하는 것은 법 위반”이라고 밝혔다. 친자확인 검사를 해주는 한 법의학연구소는 법적 문제를 우려해 검사 대상자의 동의 없이 임의로 가져오는 검체에 대해선 접수를 받지 않는다. 검체가 뒤바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검사로 친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A업체는 그 비율이 5%가량이라고 전했고, B업체는 25%가량이라고 밝혔다. 과학기술을 통해 자신의 아이가 ‘친자’임을 재확인한 이들은 그동안 품었던 의심을 떨쳐낼까. 2009년 서울가정법원 판례를 들여다보자. 당시 62살 여성은 30여 년을 함께 산 2살 연상 남편을 상대로 이혼 및 재산 분할을 청구했다. 결혼 생활 동안 아내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사하곤 했던 남편은 아들이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며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혼 소송 도중 남편은 유전자 감정을 요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검사 결과, 아들이 친자일 확률은 99.9999999997%.
문제는 의심이지 유전자가 아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런 결과를 불신했다. 법원은 혼인 관계 파탄의 근본적 책임이 남편 쪽에 있다고 판결했다. 판단 근거 중에는 친자 관계 의심으로 유전자 감정까지 실시해 정신적 고통을 준 점도 참작됐다. 정신과 전문의 소기윤 박사는 “친자확인 검사는 의심을 풀 수 있는 수단이 발전한 것 아니겠느냐”며 “불안이나 의심이 친자확인을 의뢰하는 근원일 텐데, 하나의 사안에 대해 의심이 풀린다고 해도 또 다른 사안으로 의심이 옮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과학기술이 그렇듯 유전자 검사도 양면의 칼날이다. 핏줄을 찾고 확인하는 일도 그렇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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