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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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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죽음을 덮으려는 삼성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씨 유족 등에 산업재해 인정 포기 대가로 수억원 제안
치료비 빚에 쪼들린 가족들 유혹
등록 2010-07-13 13:55 수정 2020-05-03 04:26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장과 액정표시장치(LCD) 공장 등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의 질환을 얻어 산업재해 인정 절차를 밟던 노동자들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조건으로 산재 포기를 설득하고 있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병으로 숨진 노동자의 유족이나 투병 중인 노동자와 가족들은 “삼성이 수억원의 돈을 제시하며 산재 신청을 포기하고 시민단체와 접촉하지 말라고 회유했다”고 증언했다.

고 박지연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의혹을 세상에 알린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삼성전자 명의로 4억원이 입금된 통장(작은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고 박지연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의혹을 세상에 알린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삼성전자 명의로 4억원이 입금된 통장(작은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박지연씨 숨지기 직전 합의 제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백혈병을 얻어 지난 3월31일 숨진 박지연씨의 어머니 황아무개씨는 7월5일 기자와 만나 “4월 초 삼성에서 4억여원의 합의금을 받고 지난 5월 중순께 산재 인정 소송을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황씨는 “삼성이 민주노총 등과 접촉하지 말고 시민단체 관계자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이사를 하라고 했다”고 덧붙였다(“유골 뿌리기 직전 돈이 입금됐다” 기사 참조).

박씨 가족의 말을 종합하면, 삼성전자는 박지연씨가 숨을 거두기 직전 박씨 가족에게 비밀리에 합의 제안을 해왔다. 박씨는 2009년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린 뒤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삼성전자가 제시한 합의금은 4억여원 수준이었다. 순수 합의금 3억8천만원(보험금 5천만원 포함)과 장례 비용 2천만여원을 합한 액수다. 삼성은 합의 조건으로 ‘산재 소송을 포기하고 시민단체와 접촉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박씨 가족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박씨의 2년9개월 치료비만 1억원이 넘었고, 5천만원이나 빚을 진 형편이었다. 박씨 가족은 결국 삼성전자의 돈을 받고 산재 소송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돈은 4월2일 박씨의 유골이 속초 앞바다에 뿌려지기 1시간 전 어머니 황씨의 농협 계좌로 들어왔다. 통장 발신인란에는 ‘삼성전자’라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박지연씨의 죽음은 꺼져가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백혈병 논란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다. 박씨 사망 소식에 여론은 들끓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위험한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화학물질 노출 사고도 빈번했다는 삼성전자 전 직원들의 폭로도 잇따랐다. 삼성전자는 4월15일 이례적으로 공장 내부를 공개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유럽과 미국 기관투자가들의 집단 진상 규명 요구였다( 812호 이슈추적 ‘외국 투자자들 삼성반도체 백혈병 진상 규명 요구’ 참조).

황씨는 삼성전자에서 돈을 받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경황 중에 합의를 한 뒤 소송을 취하하고 언론과 접촉도 끊었지만 “(치료비로 생긴) 빚을 다 갚고 나니 허망하고, 지연이에게 미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씨는 “우리 아이의 죽음을 땅에 묻어버리려고 돈을 준 겁니다. 삼성전자가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면 위로금을 주는 건 당연한데, 왜 산재 소송을 취하하게 하고 시민단체와 접촉을 못하게 합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돈으로 매수해 진실을 숨기려는 겁니다. 삼성에 이용당했어요.”

삼성전자가 박씨 가족뿐 아니라 투병 중인 노동자와 유가족을 대상으로 산재 신청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한혜경(31·삼성전자 LCD 공장 근무)씨와 2009년 종격동암으로 숨진 연제욱(삼성전자 LCD 공장 근무)씨 가족은 취재진에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백혈병을 앓고 있는 김옥이(35)씨도 삼성전자로부터 비슷한 회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돈으로 산업재해 덮는 삼성?

살아서 방치, 죽어서 회유

고 연제욱씨 가족에게 삼성전자 관계자가 찾아온 것은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 불승인 결정이 난 지난 3월 중순께였다. 연씨 가족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다시 심사청구를 해 산재 인정 싸움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삼성전자 환경안전그룹 관계자가 찾아와 산재 인정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1억2천만원이라는 합의금도 제시했다. 그러나 연씨 가족은 “반올림과 함께 심사청구를 하겠다”며 거절했다. 찾아온 삼성전자 관계자도 “반올림과 함께하면 돈을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연씨의 동생 연미정(27)씨는 당시 삼성전자 관계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고 혀를 찼다. “삼성전자 관계자에게 ‘왜 갑자기 돈을 주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삼성은 초일류 기업이라 성의 표시를 하려 한다’고 하더군요. 기가 막혀서 그때부터 삼성전자 관계자 전화는 아예 받지를 않았어요.”

한혜경씨 어머니 김시녀(54)씨도 6월 초 비슷한 제안을 받았다. 이름도 모르는 삼성전자 인사과 직원이 전화를 걸어와 합의를 제안했다. 김씨는 생활 형편이 무척 어렵다. 뇌종양 투병 중인 딸 한씨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 전 1700만원 전세방에서 500만원 월세방으로 옮겼다. 조그맣게 운영하던 식당도 처분했다. 이제는 수입이 없다. 삼성의 합의 제안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김씨는 “위험한 작업환경에 내 딸을 방치해놓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이를 돈으로 덮으려는 삼성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황유미씨의 1주기 추모 사진 등이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 걸려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08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황유미씨의 1주기 추모 사진 등이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 걸려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삼성전자는 최근 쏟아지는 이런 주장들을 부인한다. 고 박지연씨 어머니 황씨와 접촉한 인사팀 관계자는 의 인터뷰 요청에 “곤란하다”며 거부했다. 대신 삼성전자 홍보실은 에 보낸 전자우편 답변에서 “투병 중이거나 숨진 환자의 가족을 만난 것은 맞지만 생계비 지원을 논의했을 뿐 산재 신청을 포기하라고 말하지는 않았고, 최근 중증 질환자 지원 기준을 수립해 추가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삼성 쪽 “생계비 지원만 논의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관계자를 만난 유가족의 생각은 다르다. 황씨는 “내가 소송 취하를 망설이자 삼성은 한 달여 동안 끈질기게 전화를 해왔다”며 “삼성이 거짓말을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연제욱씨의 동생 미정씨는 이렇게 말한다. “삼성이 산재 신청을 하면 안 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시민단체를 통해 산재 신청을 하면 위로금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기자는 삼성 관계자가 피해자들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한 사례를 직접 살펴보았다. 삼성전자에서 10여 년간 엔지니어로 일하다 희귀병인 베게너육아종에 걸려 5월 초 퇴직한 김기영 전 삼성전자 과장은 4월1일 회사 인사과 이아무개 과장 등을 만났다. 김씨는 경기 용인시 자택으로 찾아온 이 과장에게 산재 신청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날 김씨와 삼성 관계자가 나눈 대화가 녹음된 자료를 들어보면, 삼성 관계자는 김씨에게 희망퇴직을 권한 뒤 “위로금을 받는 조건으로 민형사·행정 소송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에 대해 “산재 인정을 받아도 질병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것은 부당한 요구”라고 비판했다.

승소 확률에 달린 목숨값?

유가족의 증언과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삼성전자가 피해자와 가족을 돈으로 매수해 산재 신청이나 소송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하려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삼성전자가 노동자의 산재 인정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올림은 삼성이 산업재해를 감추기 위해 ‘꼼수’를 부린다고 판단한다.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이 겉으로는 공장의 안정성을 확신한다고 말하면서도 뒤에서 합의를 종용하는 것은 산업재해를 은폐하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김은기 민주노총 노동안전국장도 고 박지연씨의 행정소송을 취하시킨 것은 삼성전자의 치밀한 전략이라고 지적한다. 2009년 5월 산재 불인정 판정을 받은 6명 중 박지연씨는 3 대 2의 의견으로 불인정 판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박씨가 행정소송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았고, 삼성전자가 박씨의 소송을 취하하는 데 더 공을 들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 국장은 “박씨가 산재 인정을 받게 되면 다른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삼성이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 암을 얻은 뒤 반올림과 함께 산재 인정 절차를 밟고 있는 노동자는 모두 12명이다. 이 가운데 4명과 박지연씨 가족이 삼성의 회유를 받은 것으로 반올림은 파악하고 있다. 반올림은 7월12일 서울 대림동 공공운수노조 사무실에서 삼성으로부터 산재 포기 제안을 받은 피해자 가족들과 기자회견을 열어 백혈병 논란과 관련한 공개토론회를 삼성전자에 제안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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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현 기자 한겨레 보도영상팀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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