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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투자자들 ‘삼성반도체 백혈병’ 진상 규명 요구

투자기관 8곳이 보낸 공동질의서 단독 입수…
삼성에 역학조사·노동자 지원 대책 묻고 12개월 모니터링 계획
등록 2010-05-28 15:09 수정 2020-05-03 04:26
4월2일 인권단체 ‘반올림’ 회원들이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씨를 추모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4월2일 인권단체 ‘반올림’ 회원들이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씨를 추모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재 논란과 관련해 유럽과 미국의 기관투자가들이 집단적으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은 세계 3대 기금운용사로 꼽히는 네덜란드 ‘APG자산운용’을 포함한 8곳의 기관투자가가(총 운용자산 470조원) 지난 5월21일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에게 보낸 ‘투자자 공동질의서’를 단독 입수했다.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이 한국 기업의 노동환경을 문제 삼으며 공동으로 질의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이날 ‘삼성전자의 노동환경 안전정책과 실행에 관한 리뷰’라는 제목의 질의서를 우편과 전자우편으로 삼성전자에 전달했다. 투자자들은 질의서를 통해 “우리는 투자를 대행하는 기관으로서 우리가 투자하는 회사의 환경친화, 사회책임, 지배구조 건전성에 관해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삼성전자 출신 노동자들이 제기한 노동자의 건강과 작업환경의 안전성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혹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모두 ‘유엔 책임투자원칙(PRI·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에 서명한 투자기관들이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주도로 만들어져 2006년 4월 발표된 유엔 책임투자원칙은 환경친화, 사회책임, 지배구조 건전성 문제를 투자 의사 결정 때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현재 전세계 투자 자본의 15% 이상을 운용하는 700여 개 투자기관이 동참하고 있다.

‘유엔 책임투자원칙’ 서명 기관들

삼성전자에 대한 공동질의에 참여한 기관투자가들은 총 6가지 질문을 던졌다.

우선 지난 4월15일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메모리담당 조수인 사장이 백혈병 산재에 대해 “제3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역학조사를 하겠다”고 말한 것과 관련해 △언제부터 계획을 이행할 것인지 △조사 결과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조사 결과를 투자자들과 언론에 어느 수준까지 공개할 것인지를 물었다.

또한 투자자들은 △현재 투병 중인 사실이 알려진 전직 노동자들을 위한 의료적 지원 등 대책이 있는지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전체적인 작업장 안전 관리가 효과적으로 이뤄지는지 등에 대한 답변도 요구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재 논란은 지난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23)씨가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지난 3월 온양공장에서 일하던 박지연(23)씨가 숨지면서 여론이 들끓었고 이에 삼성전자는 지난 4월15일 기흥공장 2개 라인을 언론에 공개하며 “반도체 공장은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도체 공장 엔지니어들에게 지급된 ‘환경수첩’이 최근 보도를 통해 공개되면서 6종의 발암성 물질이 각종 공정에 사용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지금까지 이런 논란을 지켜보던 외국 투자기관들이 본격적으로 삼성에 ‘진실’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8개 외국 투자기관이 삼성에 보낸 질의서.

8개 외국 투자기관이 삼성에 보낸 질의서.

공동질의서는 지난 4월30일 APG자산운용의 제안으로 작성됐다. 당시 APG자산운용은 “4월22일 현재 삼성전자 출신 노동자 23명이 백혈병 등 질병에 걸렸고, 이들은 벤젠·납 등 독성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척박한 작업환경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책임 있는 투자자로서 삼성에 대한 진상 규명 촉구에 나서야 할 때”라고 제안했다. 이에 8개 투자기관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APG자산운용 관계자는 “공동질의 이전에 이미 개별적으로 삼성전자 쪽에 관련 내용을 문의하고 진상 규명을 촉구한 투자회사도 많다”고 밝혔다.

공동질의에 참여한 투자기관들은 5월 말 다자간 전화 회의(Conference Call)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삼성전자는 공식 답변을 내놓게 된다. 제3의 컨소시엄 구성과 피해자 대책 마련 등에 관해 삼성이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삼성의 답변을 확인한 뒤 투자기관들은 앞으로 12개월 동안 삼성전자의 약속 이행 상황을 모니터링할 계획이다.

5월 말 다자간 전화 회의에서 답변 들어

외국의 기관투자가들이 집단으로 한 기업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주철기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사무총장은 “유엔 책임투자원칙에 서명한 투자사들이 모여 개별 기업을 상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따져묻는 활동은 불과 한 달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문제제기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만일 해당 기업이 유엔 책임투자원칙에 서명한 기금운용사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국제적 신뢰를 잃음과 동시에 안정적인 연기금 투자를 받을 수 없게 돼 결국 주식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마켓’에 진출한 이상, 기업에 책임투자원칙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은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많은 기업이 파산한 가운데 환경친화, 사회책임, 지배구조 건전성 등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기업만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투자자들도 깊이 인식하게 됐다”며 “투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투자자들은 더욱 열심히 투자 대상이 되는 기업이 사회책임경영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투자자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이, ‘세계시민’들의 연대 활동도 활발하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정문 앞에서는 5월24일 집회가 열린다. ‘전미통신노동자회’(CWA), ‘책임 있는 기술을 위한 국제 캠페인’(ICRT) 등 미국 내 시민·사회·노동 단체들이 모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죽음을 알리고 회사 쪽의 책임 있는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 4월28일 ‘세계 산업재해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에는 전세계 62개 단체가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해 공동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아시아노동감시센터(AMRC), 대만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TAVOI), 도쿄 직업안전과 건강센터(TOSHC), 브라질 건강환경협회(TOXISPHERA),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유독물질네트워크, 필리핀 유독물질금지운동(Ban Toxics), 유럽연합 건강과 환경연대(Health & Environment Alliance), 캐나다 마킬라연대네트워크(MSN), 미국 국민건강운동(People’s Health Movement) 등이 참여했다.

‘세계시민’들 연대 활동도

이들은 “삼성전자가 지난해 1205억달러의 판매실적을 올렸고 평면TV 생산 세계 1위, 휴대전화 판매 세계 2위를 기록했다”며 “우리 모두는 이 비극적인 죽음,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을 애도하며 전자산업의 직업성 암이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음에 분노한다”고 밝혔다. 또한 공동성명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임태희 노동부 장관 등은 이 악몽과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고 요구했다.

영국의 보건안전 전문지 (Hazards)도 ‘삼성의 수치’라는 제목으로 박지연씨의 죽음을 상세히 보도했다. 의 기사는 미국에서 전자산업 노동자의 암 발병 등과 관련해 획기적인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 변호사 맨디 허즈의 말을 인용해 끝을 맺었다. “지난 30년간 삼성이 자신의 브랜드를 알린 만큼 작업환경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도 보장했다면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세계 곳곳에서 삼성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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