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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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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꿈은 ‘바파나 바파나’



축구 생각만 하는 가난한 남아공 흑인 소년들…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축구 무역항’이 된 나라 남아공
등록 2010-06-11 13:07 수정 2020-05-02 19:26
지난 5월15일 남아공 프리토리아 인근 축구장에서 프리토리아 시장배 유소년 축구대회가 열렸다. 페널티킥을 준비하는 소년의 등에는 도시의 공식 이름인 ‘프리토리아’ 대신, 원주민 언어인 ‘츠와니’라고 적혀 있다.

지난 5월15일 남아공 프리토리아 인근 축구장에서 프리토리아 시장배 유소년 축구대회가 열렸다. 페널티킥을 준비하는 소년의 등에는 도시의 공식 이름인 ‘프리토리아’ 대신, 원주민 언어인 ‘츠와니’라고 적혀 있다.

“축구가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 매우 실망한다. 축구는 삶과 죽음보다 훨씬 심각하다.” -영국 리버풀 축구클럽 전 감독 빌 섕클리

경기 종료 1분 전, 미드필드에서 왼쪽 구석으로 공이 넘어왔다. 빠르고 낮은 센터링은 지체 없이 골문 쪽으로 연결됐다. 공격수는 순식간에, 그러나 신중하게 골 구석을 노렸다. 문지기는 반뼘만큼 늦었다. 1 대 0. 승부의 균형추가 기울었다. 아이들은 자기네 코너까지 뛰어가 춤을 췄다. 배꼽에 손을 올리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깡통집의 자존심 강한 소년

12살 태피소 마테는 패배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팀 코트렐랑초등학교는 2년 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때도 태피소는 팀의 스트라이커였다. 그런데 올해는 3·4위전에서도 졌다. “화가 나요. 아주 많이.” 태피소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씩씩거렸다. “나는 오늘 네 경기에서 3골을 넣었어요. 기회만 온다면 또 골을 넣을 수 있어요. 미드필더 잘못이에요. 나한테 공을 공급하지 못했죠. 수비수도 제 역할을 못했어요.”

자부심 강한 태피소는 ‘프리토리아 시장배 유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한 3600여 명 선수 가운데 하나다. 지난 2월부터 200개 이상의 12살 이하 유소년 팀이 매주 예선전을 펼쳤다. 대회 마지막 날인 지난 5월15일, 최종 라운드에 오른 12개 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맞붙었다. 태피소의 키는 120cm가 되지 않았다. 스트라이커 치고는 작은 게 아닐까. “축구에서 키는 상관없어요. 기술이 중요하죠. 리오넬 메시라고 알아요?”

저녁 무렵 찾아간 태피소의 집에는 169cm의 메시보다 키가 더 작은 마라도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것 말고는 장식이랄 게 없었다. 고집 센 태피소도 집에 들어서자 말이 없어졌다. 가로 8m, 세로 6m의 집에는 커튼으로 대충 구분해놓은 부엌과 응접실, 침실이 있다. 이 집에는 식구 5명이 산다. 침실은 50대 부모가 사용하고, 태피소의 형은 응접실 소파에서 잔다. “그럼, 너는?” 태피소는 응접실 바닥을 가리켰다. 동생도 함께 그 바닥에서 잔다. 12년 전, 남아공 만델라 정부가 땅을 제공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 종식 이후 생긴 변화다. “그전에는 불법 빈민촌에 살았어요. 그때보단 상황이 좋아졌죠.” 태피소의 아버지가 말했다. 땅은 정부가 빌려줬지만, 집은 직접 지어야 했다. 태피소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양철과 나무를 모아 바람을 막았다. 남아공에선 이를 ‘깡통집’(Tin House)이라 부른다. 2천여 명이 모여 사는 프리토리아 인근 소샹구베 마을에는 공동 수도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는 깡통집들이 즐비하다.

태피소의 깡통집 식구 가운데 직업을 가진 이는 없다. “직업이 없는데 생활비는 어떻게 구해요?” 태피소의 아버지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한참 생각했다. “가끔 옥수수 가루가 남으면 빵을 구워 집 앞에서 팔아요.” “도시로 나가 장사하면 손님이 더 많지 않을까요?” 그는 다시 머뭇거렸다. “음…, 도시에 나갈 차비가 없어요.” 한국인 기자와 남아공 흑인은 서로의 ‘상식’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고요? 나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공을 하나 던져줍니다.”-독일 신학자 도로테 실레

태피소의 꿈은 유럽 명문팀의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다. “오직 축구만 생각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태피소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학교 수업에 충실했다면, 그는 이 나라의 11개 공식언어 가운데 하나인 영어를 곧잘 했을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가는 팔로 가는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태피소가 말했다. 이것은 축구에 재능 있는 아이들의 특별한 꿈이 아니다. 남아공 흑인 소년 대부분이 그런 꿈을 꾼다. “축구 선수가 될 거예요!” ‘사커’(soccer)를 ‘수카’로 발음하며, 거리의 검은 소년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다른 대안이 없다.

12살의 태피소 마테(오른쪽 두 번째)가 아버지, 어머니, 형과 함께 ‘깡통집’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12살의 태피소 마테(오른쪽 두 번째)가 아버지, 어머니, 형과 함께 ‘깡통집’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흑인의 절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2006년 현재, 남아공 상위 10% 인구가 전체 인구가 벌어들이는 소득의 50% 이상을 번다. 하위 20% 계층은 전체 소득의 1.5%만 차지한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 달리 농업 인구는 적고, 도시 빈민은 많다. 국토의 70% 이상을 백인이 소유하고 있다. 남아공은 커피나 바나나가 아니라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수출한다. 백인은 이 땅에서 광산만 개발했다. 흑인은 그 광산에서 그저 저임 노동자다. 일부 농장도 대부분 백인 소유다. 그 농장에서 흑인은 반년짜리 잡부다.

남아공의 흑인 실업률은 통계 기준에 따라 27~40%에 이른다. “흑인의 절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남아공에서 만난 한인 교민들은 종종 말했다. 전체 4500만 인구 가운데 흑인은 80%, 백인은 10%를 차지하는데, 백인의 평균소득은 흑인 평균소득의 8배가 넘는다. 남아공 흑인은 절대 빈곤에 가공할 빈부 격차까지 겪고 있다. 일하는 흑인의 다수는 일용직이다. 대형마트 점원으로 일하면 월 150란드(약 2만2천원)를 번다. “그런데 아주 작은 프로 축구팀에만 들어가도 월 1만란드(약 150만원)를 벌 수 있지요.” 코트렐랑초등학교의 축구 코치가 말했다. 전혀 벌이가 없거나, 2만원을 벌거나, 150만원을 버는 일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는가.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킨 뒤, 남아공은 민주·평화·발전의 상징이 됐다. 다만 가난한 흑인의 삶은 크게 변함이 없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흑인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통행증이 없으면 바로 잡혀갔고, 백인 거주 지역엔 아예 출입이 금지됐다. 이제 남아공의 도심에선 ‘자유롭게’ 활보하며 구걸하는 흑인을 쉽게 볼 수 있다.

1997년 한 해 동안 남아공에선 31만6559명이 죽었다. 자연사·병사·사고사 등을 모두 포함한 수다. 그 수치가 2006년에는 60만5480명으로 늘었다. 평균수명이 짧아지고, 환자가 늘어나고, 범죄 등으로 인한 불의의 죽음까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피해의 대부분은 가난한 흑인에게 돌아간다. 축구는 유일한 탈출구다.

정말이지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퀘질레템바초등학교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전기가 안 들어와요.” 카빈데 엘리자 교장은 처음 보는 한국인 기자에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네?” “벌써 2주째에요.” 교장은 손가락으로 천장의 백열등을 가리켰다. 남아공 학교는 전기와 수도 요금을 학부모가 내는 돈으로 충당한다. 학생 1명당 1년에 120란드(약 1만8천원)를 내야 한다. 교장은 장부를 꺼내 보여줬다. 학부모 315명 가운데 30여 명이 ‘완전’ 실업자다. 그들은 학비를 못 낸다. 그런데 나머지 부모 가운데 120여 명도 학비를 내지 않는다. 돈이 없는 것이다.

11살의 오라틸리 줄루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벽돌집에 산다.

11살의 오라틸리 줄루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벽돌집에 산다.

13~14살 소년에게만 주어지는 기회

이 학교 축구팀의 윙백을 맡은 11살의 오라틸리 줄루는 그래서 운이 좋은 편이다. 지퍼가 고장난 그의 가방에는 한국에서 받은 ‘파워레인저’ 필통이 있다. 오라틸리는 지난 4월 수원 삼성 축구클럽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왔다. 남아공에 돌아오자 8살짜리 동생이 축구를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나도 한국에 가고 싶어.” 오라틸리는 매일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학교에서 축구를 하고, 4시부터 5시까지 집에서 동생과 함께 축구를 한다.

“그리고 밤에 잠들면 ‘바파나 바파나’(‘소년들’이라는 뜻의 남아공 축구대표팀 별칭)가 되어 축구하는 꿈을 꿔요.” 오라틸리의 집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녹슨 냉장고가 있다. 안에는 그릇 하나만 있었다. 우유에 빵을 말아두었다. “며칠 전에 먹다 남은 건데 또 먹어야 한다”고 오라틸리가 말했다. 냉장고 위에는 썩은 감자도 있었다. 상한 우유와 썩은 감자 가운데 무언가를 오라틸리는 저녁으로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파나 바파나’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과 의무에 대해 내가 배운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

태피소와 오라틸리가 꿈을 이루려면, 음자키 들라들라를 만나야 한다. 그는 남아공 프로축구리그(PSL)의 명문팀 ‘슈퍼스포츠 유나이티드’의 유소년 아카데미 책임자다. 이 나라 위성방송채널 가 소유한 슈퍼스포츠는 PSL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슈퍼스포츠는 2001년 유소년 축구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로지나 스쿨’이라는 사립학교와 계약을 맺어, 자신들은 축구를 가르치고, 학교는 정규 교과를 교육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과정을 포괄하는 로지나 스쿨의 전교생 200명 가운데 40명이 축구 선수다.
축구 선수는 보통 학생과 다르다. 그들은 아침에 눈뜨자마자 축구를 한다. 오전에는 학교 수업을 듣고, 오후에 다시 축구를 한다. 40명 가운데 2명만 백인이다. 나머지는 모두 흑인 또는 혼혈이다. 유소년 아카데미는 부정기적으로 선수를 선발한다. 를 통해 선발 테스트가 있음을 알린다. 북부의 더반부터 남부의 케이프타운까지 전국을 누빈다. “학교를 찾아다니는 건가요?” “오, 아니에요. ‘타운십’(Township·남아공의 흑인 거주 지역)에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가 많아요. 그런 아이들한테도 기회를 주기 위해 지역 단위로 선발해요.”
그러나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13~14살 선수만 뽑는다. “그보다 나이가 많으면 가르쳐봐야 소용이 없어요. 타운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거든요.” 테스트를 열면 13살 무렵의 소년 2500여 명이 모여든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미니 게임’을 한다.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기 실력을 보여줄 시간은 보통 2~3분 정도다. 이를 통과한 수백 명은 좀더 긴 시간을 보장받는다. 며칠 뒤, 2차 테스트를 거쳐 수십 명을 뽑고, 3·4차까지 통과하면 2~3명이 남는다.

남아공 흑인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시설은 열악하다. 프리토리아 외곽에 위치한 이퀘질레템바초등학교 아이들이 ‘야외 매점’ 앞에 모여 있다.

남아공 흑인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시설은 열악하다. 프리토리아 외곽에 위치한 이퀘질레템바초등학교 아이들이 ‘야외 매점’ 앞에 모여 있다.


밥값·옷값이 오는 곳

경쟁을 통과한 이들에겐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린다. 우선 연간 1만란드(약 150만원)에 해당하는 사립학교 학비가 면제된다. 학교에 딸린 기숙사에서 먹고 잔다. 하루 네 끼를 먹는다. 아침·점심·저녁에다 훈련 직후 간식도 먹는다. 유니폼을 비롯한 옷도 지급된다. 방학 때 고향을 오가는 교통비도 받는다. “18살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무료입니다.” 음자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비용은 유럽에서 온다. 지난해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팀 토트넘 홋스퍼가 슈퍼스포츠 유소년 아카데미와 협력 계약을 맺었다. 그에 앞서 네덜란드 명문팀 페예노르트가 2006년부터 4년동안 같은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이들 유럽 팀은 아카데미 운영 비용을 댄다. 대신 ‘유망주’를 선점할 기회를 갖는다. 유럽에서 넘어오는 비용이 얼마인지, 선수를 이적시킬 때 받는 돈은 얼마인지, 음자키는 말해주지 않았다.
“토트넘의 코치와 스카우터가 1년에 한 번 와요. 2주 동안 머물면서 실력을 점검하죠.” 눈에 띄는 선수가 있으면 유럽으로 초청한다. 5월에도 2명이 스위스에 갔다. 남아공 슈퍼스포츠 유소년 아카데미 선수들이 영국 토트넘 홋스퍼 유소년 대표 자격으로 스위스에서 열리는 국제 경기에 참가한 것이다. 토트넘 처지에서 보자면, 유망주를 세계 무대에서 뛰게 하는 ‘실전 테스트’가 될 것이다.
협력 계약을 맺은 게 지난해이므로 아직 토트넘에 진출한 선수는 없다. 대신 지난 4년 동안 이곳 출신 선수 3명이 페예노르트를 거쳐 네덜란드 프로리그에 스카우트됐다. 태피소와 오라틸리가 유럽 명문 클럽에 스카우트된다면, 적어도 연봉 300만란드(약 4억5천만원)를 받을 것이다. 그들의 꿈속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 숫자다.

“축구는 우리가 아무 비용도 치르지 않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였다. 우리에겐 단지 테니스 공만 있으면 됐다. 거기서 우리의 재능이 자랐다.” -1960년대 미국 프로축구리그에서 활약한 남아공 축구 선수 다리우스 들로모

이들 꿈속에 유럽이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60년대까지 국제축구연맹(FIFA)은 아프리카 국가에 월드컵 출전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이르러 아프리카는 대륙을 통틀어 한 장의 출전 티켓을 확보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아프리카 축구의 전환점이 됐다. 카메룬이 8강에 진출하면서, 유럽은 아프리카를 다시 보았다. 이듬해인 1991년 급기야 가나는 17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 대회 직후, 유럽의 어느 축구 에이전트가 13~15살의 가나 선수 3명을 이탈리아 토리노 클럽에 입단시켰다.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국 이 일은 ‘아프리카 축구 무역’의 물꼬를 트는 구실을 했다.
유소년 아카데미에 다니는 아이들의 사정은 다르다. 아약스 케이프타운은 체계적이고 경쟁적인 유소년 아카데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5개 축구장을 포함해 시설도 최고 수준이다.

유소년 아카데미에 다니는 아이들의 사정은 다르다. 아약스 케이프타운은 체계적이고 경쟁적인 유소년 아카데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5개 축구장을 포함해 시설도 최고 수준이다.


10만유로에 사서 575만유로에 넘기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유럽 프로축구리그에서 뛰는 아프리카 선수들은 350명에 육박했다. 그 수는 계속 늘어, 2007년 말 현재 유럽에서 뛰는 아프리카 축구 선수는 적어도 730명 이상이다. 2007년 오스트리아 그라즈대학의 한 보고서는 “오늘날 전세계 무역의 3%를 축구 시장 내부의 인적 무역이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아프리카가 새로운 무역시장에 자원을 공급하는 동안, 유엔은 1999년 특별보고서를 냈다. “젊은 아프리카 축구 선수의 (유럽) 이주는 현대의 ‘노예무역’이 돼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1990년대 초·중반 유럽 명문 클럽은 가나·나이지리아·카메룬 등 서부 아프리카에 눈독을 들였다. 이 지역 선수들은 신체 조건이 좋았고, 거친 유럽 리그에 쉽게 적응할 것으로 기대됐다. 공교롭게도 서부 아프리카 해안은 16~18세기에 노예무역이 가장 성행한 곳이다.
유럽의 축구 에이전트는 어린 나이의 소년을 선호했다. 나이가 들어 능력이 출중해지면 그만큼 초기 계약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벨기에의 레이싱 젠크 축구클럽이 기니아의 10대 소년 솔레이마네 올레르를 10만유로(약 1억5천만원)에 데려와 2000년 터키 페네바체 클럽에 575만유로(약 86억2500만원)를 받고 넘긴 것이 대표적 사례다. 아프리카 식민통치의 경험을 가졌으나 상대적으로 재정이 취약한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1차 수입상 역할을 하고, 이들이 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 ‘부자’ 리그에 선수를 내다파는 것이 축구 무역의 일반적 경로다.
비난 여론을 의식한 FIFA는 2001년 18살 이하 미성년자의 클럽 이적 계약을 금지했지만, 다양한 ‘편법’이 뒤이어 등장했다. 나이를 속이거나, 유학 또는 취업 비자로 유럽에 들어간 뒤 축구 선수로 변신하는 것이다. 미성년이라도 부모와 함께 유럽으로 이주해 ‘합법적으로’ 계약을 맺는 방법도 있다. 2007년 아프리카 말리에서는 16~18살 흑인 소년 34명이 집단 감금된 채 발견됐다. 모두 코트디부아르의 아마추어 축구팀 소속이었다. 유럽의 스카우터가 유럽 팀에 입단시키겠다며 꼬드겨놓고 방치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과연 월드컵이 벌어지는 일요일에 무장투쟁이 가능한가? 축구 경기가 있는 일요일에 혁명이 가능한가?”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축구무역이 성행하면서 아프리카 축구는 모든 문제를 푸는 출구인 동시에 다른 문제를 덮는 봉인이 됐다. 남아공 흑인 소년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때문에 남아공은 1961년 이후 세계 축구 무대에서 축출됐다. 여러 면에서 ‘후발 주자’였던 남아공은 1992년 FIFA에 재가입한 이후 새로운 경로를 개척했다. 1996년, 남아공 프로축구리그(PSL)가 탄생했다. 1980년대 흑인 축구팀 중심의 남아공리그(NSL)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남아공의 주요 기업은 광고 효과에 주목했다. PSL에 돈이 들어왔다.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상업적인 프로리그로 진화했다.

‘남아공의 박지성’ 스티븐 피나르

지난 2007년 남아공 은행 ‘ABSA’는 PSL의 스폰서가 되기 위해 5억란드(약 750억원)를 지급했다. 위성방송사 는 15억란드(약 2250억원)를 주고 PSL 중계권을 따냈다. 그 돈으로 각 팀은 남아공은 물론 주변 나라 선수들까지 스카우트했다. 2008년 말 현재, PSL 16개 팀에는 ‘외국인’ 아프리카 선수 86명이 뛰고 있다. PSL이 아프리카의 유망주가 모여드는 ‘전시장’이 된 것이다. 요하네스버그대학 스포츠학과 크리스 폰테인 교수는 “남아공이 축구 무역의 중간 기착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이를 세계에 확증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10년 현재, 유럽 주요 리그에서 활약 중인 남아공 출신 선수는 10명 정도로 파악된다. 3명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 중이고, 나머지는 독일·벨기에·러시아·이스라엘·터키 등에서 뛰고 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 비교하면 미약하지만, 남아공 축구 시장의 성장을 고려하면 앞으로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남아공 선수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에버턴의 스티븐 피나르다. 그는 ‘남아공의 박지성’이다. 미드필드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그는 메시·호나우두와 함께 남아공 소년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다. 그는 남아공에서 축구를 처음 배워, 네덜란드 프로리그에 진출한 뒤,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성공했다. 그를 키운 것은 ‘아약스 케이프타운’이었다.
아약스 클럽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명문팀이다. 저 유명한 ‘토털 사커’의 창시자이기도 한 이 팀은 1970년대부터 유소년 아카데미를 도입했다. 스카우터에게 선수 선발을 의존하던 당시 유럽 풍토에서는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바로 그 아약스가 남아공 PSL에 전초기지 삼아 세운 것이 ‘아약스 케이프타운’이다.
1999년 아약스는 케이프타운을 연고로 하는 2개 축구팀을 사들여 합병시켰다. 이름도 ‘아약스 케이프타운’으로 바꿨다. 유소년 아카데미부터 설치했다. 아프리카를 통틀어 유럽 클럽이 ‘직접’ 운영하는 구단은 아약스 케이프타운이 유일하다. 이들의 리그 성적은 신통치 않다. 지난 시즌에선 16개 팀 가운데 7위에 머물렀다. 여러 면에서 이 구단은 ‘선수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은 11살부터 19살까지 나이별로 6개 팀을 나눠 관리한다. 팀별 선수 인원은 18명으로 고정된다. 연말이면 각 팀별로 실력이 좋지 않은 선수를 ‘방출’한다. 한두 명일 수도, 10명일 수도 있다. 빈자리가 생기면 구단과 계약한 스카우터들이 새로운 선수를 데려온다. 유소년 아카데미를 관리하는 케빈 로웰은 손가락으로 구단 정문을 가리켰다. “저 앞에서 빈자리에 들어오려는 100명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죠.”

모든 아이의 꿈, 대부분 실패하는 꿈

네덜란드 아약스 클럽의 코치들도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네덜란드의 아약스가 유망주라고 판단하면, 남아공의 아약스는 그에 대한 정기 보고서를 네덜란드에 계속 보낸다. 18살이 될 때까지 실력을 유지한다면, 네덜란드 아약스 클럽과 정식 계약을 맺는다. 케빈은 “11살 때 처음 들어온 18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은 한두 명 정도”라고 말했다. 밀려난 소년들은 ‘방출’되는 순간 유럽 진출의 꿈과 함께 학비·식비 등에 대한 지원까지 잃어버린다. “그들에겐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친절하게 설명하던 케빈의 얼굴에서 잠시 미소가 가셨다. “그래서 처음부터 매우 조심스럽게 정말 실력 있는 아이들만 선발합니다.”

“그들을 숫자로 취급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몇천유로를 위해 그들의 삶을 내던지도록 몰아붙이는 우리는 누구인가.” -1980년대 프랑스 축구국가대표 미셸 플라티니

요하네스버그대학 스포츠학과 크리스 폰테인 교수는 ‘축구 소년’들을 위한 안전망이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10대 중반의 나이로 오직 축구를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에 왔다면, 고국을 떠나 남아공에 왔다면, 축구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팀에서 쫓겨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거리에서 떠돌 겁니다. 그들에게 축구는 관능적이죠. 모든 아이가 그 꿈을 꿉니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합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그 꿈을 더 부채질할 것이다. 남아공 아이들에게 축구는 위대하다. 꿈을 주는 유일한 힘이다. 그러나 축구가 아니고서는 어떤 삶도 준비하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는 위태롭다. 아약스 케이프타운 유소년 선수들의 샤워장 바닥에는 축구 포메이션을 형상화한 타일이 깔려 있다. 영국식 4-4-2 포메이션 맞은편에 네덜란드 토탈 사커를 대표하는 3-4-3 다이아몬드 대형이 그려져 있다. 아이들은 땀을 씻을 때조차 ‘축구의 영토’를 벗어나지 못한다.


프리토리아·요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공화국)=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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