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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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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10대 동성애자의 자살

등록 2003-05-08 15:00 수정 2020-05-02 19:23

‘어려서부터 경험하는 남들의 혐오, 끝끝내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때문에…

아홉수 고비를 넘기가 쉽지만은 않다. 19, 29, 39, 49살…. 아홉수를 넘어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된다. 생로병사의 자연스러운 과정에 따라 19살보다 29살, 29살보다 39살을 넘기가 힘들 게다. 그러나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에게 가장 넘기 힘든 아홉수는 ‘19살’이다. 남들과 ‘다른’ 성적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사춘기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동성애 죄악시’ 기독교 교리에도 절망

대다수 동성애자들은 질긴 목숨을 밑천으로 질풍노도를 헤쳐 살아남은 자가 된다. 그러나 상당수는 해맑은 얼굴의 ‘영정사진’으로 남는다. 지난 4월26일 19살의 한 청소년 동성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성 동성애자였던 윤아무개(19)군은 다음날인 27일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사무실 문고리에 목을 매달고 앉은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옆에는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세상을 원망하는 6장의 유서와 자신의 전 재산인 34만원을 동성애자인권운동에 기부한다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술, 담배, 녹차, 파운데이션, 수면제, 묵주.’

윤군이 좋아했던 여섯 가지 물건들이다. 시조시인이 되고 싶어했던 청년은 이 물건들의 이름을 따 아호를 ‘육우당’(六友堂)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가 벗삼았던 여섯 가지 물건들 속에서는 한 청소년 동성애자의 쓸쓸한 스무해가 녹아 있다.

그의 가족과 지인들에 따르면, 윤군은 사춘기 때부터 우울증에 시달려왔다. 부모가 따로 사는 가정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윤군의 우울과 허무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무관하지 않았다. 동성애자 청소년이 의지할 대상은 수면제와 술, 담배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윤군은 용기 있게 커밍아웃을 했지만 따돌림을 받은 끝에 지난해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해야 했다. 정욜 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는 “학교에서 커밍아웃을 한 뒤 힘들어 고등학교를 그만뒀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고 돌이켰다. 윤군의 유서에는 “죽은 뒤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은 동성애자다’라구요”라는 구절이 남아 있다.

묵주를 항상 가방에 넣어다닐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윤군은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교리에도 절망했다. 특히 지난 4월 국가인권위가 동성애를 유해매체물로 규정한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 대해 삭제를 권고한 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가 동성애혐오적인 기사를 쏟아내자 누구보다 절망하고 분노했다. 이들을 비판한 윤군의 독자투고가 등에 실리기도 했다. 윤군은 유서에서도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라며 두 단체에 대한 원망을 토해냈다. 그러나 윤군은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전 기증한 성모 마리아상은 동인련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윤군은 지난해 말 동인련 회원이 된 뒤 지난 3월부터 상근자로 일해왔다. 동인련 회원을 비롯한 지인들은 그를 ‘쾌활한 청년’으로 기억한다. 인터넷 모임을 운영하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다닐 만큼 ‘당당한’ 동성애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또 4월의 반전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죽기 전날까지 ‘노동절 참가단’ 준비를 회원들과 함께했다. 그가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 가서 공부해야 한다”며 아들의 성 정체성을 인정했다. 흔히 동성애자의 자살 이유로 지목되는 실연의 상처도 없었다.

자해 시도, 그리고 정신병원…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가져다준 자긍심으로도 치유하지 못할 그의 우울과 허무는 무엇이었을까. 이성애자의 감수성으로는 뚜렷한 ‘알리바이’가 없는 윤군의 죽음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이해된다”고 입을 모은다.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인 ‘친구사이’의 전명안 대표는 “어려서부터 경험하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끝끝내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라고 표현했다. 숨막히는 이 사회의 ‘공기’가 동성애자들의 목을 조른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윤씨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른다.

지난 4월29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 ‘살아남은’ 30대 남성 동성애자 3명이 모여 앉았다. 이들의 손목에는 한결같이 ‘자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김아무개(34)씨가 먼저 “스물두살 때쯤 막막한 절망감에 혼자 여관에서 손목을 그은 적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당시 김씨는 ‘동성애자인 내가 어떻게 목회를 하나’라는 회의가 들어 신학대학을 그만둔 뒤였다. 옆에 있던 천아무개(33)씨도 손목의 자해흔적을 내보이며 “스무살 때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형에게 ‘나 동성애자다’라고 말했지만 형은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화도 나고 허망하기도 해 뛰쳐나가 손목을 그었다”고 돌이켰다. 그 뒤 가족들을 모아놓고 커밍아웃을 한 천씨를 그의 누나들이 데리고 간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성애자 의사 전아무개(33)씨는 “성매매 여성 다음으로 동성애자들의 자살비율이 높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윤군이 자살한 지 사흘 뒤인 이날 청소년보호위원회 등은 ‘동성애,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의 유해매체물 규정에서 ‘동성애’를 삭제할지 여부가 주된 쟁점이었다. 이날 토론회를 지켜본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모임 ‘끼리끼리’ 박수진 간사는 “청소년에게 동성애 표현물을 보여주느냐 마느냐를 논하는 토론회의 의제설정 자체가 한국 사회의 저열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며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청소년 동성애자들을 자살의 유혹에서 ‘보호’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청소년 자살 중 30%가 동성애 등 성적 정체성 비관으로 인한 것이다. 지난 4월 공성옥 정신과 전문의가 발표한 논문 에서도 동성애자들의 높은 자살시도 비율이 확인된다. 남성 동성애자 129명과 남성 이성애자 114명의 설문조사를 비교분석한 결과, 이성애자의 14.8%가 자살시도 경험을 가진 반면 동성애자의 25.0%가 자살시도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누군가 또 죽음을 고민한다

자살의 원인으로 ‘성 정체성’을 상상하지도 않는 사회 속에서 수십년 동안 성적 소수자들의 ‘드러나지 않는 죽음’의 행렬은 이어져왔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 죽음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윤군의 죽음이 알려지자 동성애자 사이트에는 ‘언제까지 죽음의 행렬이 이어져야 하나’, ‘남의 일 같지 않다’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왔다. 이미 1998년 5월 동인련 사무실 앞에서 오아무개(21)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적도 있다. 고승우 동인련 사무국장은 “청소년 동성애자와 그 부모들을 위한 상담전화,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교육만이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동인련은 오는 6월 미국 성적소수자기금인 ‘아스트리아’ 기금에서 2천만원을 지원 받아 청소년 동성애자 상담전화(핫라인)를 개설할 예정이다.

5월3일 서울 안국동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동인련 정욜 대표는 “동성애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살인자인 이 사회와 전쟁을 벌이겠다”며 울먹였다. 윤군이 유서에 남긴 “형, 누나들의 수고가 다음 세대 동성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다짐이었다. 자살하기 전, 윤군의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은 ‘비명소리’였다고 한다. 그것은 동성애자 청소년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이 사회에 보내는 경고음이 아니었을까.

글 신윤동욱 기자/ 한겨레 ‘왜냐면’담당 syuk@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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