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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저스 21

아픈 이웃 찾아다니는 의사 [건강의집 홍종원]

방문진료 전문 의료기관 ‘건강의집’ 대표원장 홍종원

제1355호
등록 : 2021-03-22 21:37 수정 : 2021-03-2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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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주제로만 제작하는 특별한 잡지를 네 번째 만듭니다. 2020년 코로나 뉴노멀(제1315·1316호), <한겨레21>이 사랑한 작가 21명(제1326·1327호),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제1340호)에 이어 2021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조금씩 바꾸고 있는 ‘체인저스 21명’을 펴냅니다. 지속가능한 세계, 평등한 세계, 자유로운 세계, 더불어 사는 세계를 꿈꾸며 체인저스들은 오늘도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때론 변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서 분노하지만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고 그 작은 변화의 흐름에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한 이들은, 작지만 값진 승리를 향해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도 동행해볼까요? _편집자주

“저예요~.”

‘남의 집’ 앞에서 대뜸 ‘저’라니. 영구임대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며, 굳게 닫힌 다세대주택 철문을 열어달라고 전화를 걸며 그가 한 첫마디는 ‘저예요’. 홍종원이라는 이름, 의사라는 직업도 밝히지 않았다. 목소리만으로도 환자가 누군지 알아챌 정도로 친밀한 사람.

‘남의 집 드나드는 의사’라고 스스로 소개하는 홍종원(34)은 우리나라 최초의 방문진료 전문 의료기관인 ‘건강의집’ 의원 대표원장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닥터홍’, 줄여서 ‘닥홍’이라고 부른다. 풀뿌리 지역활동을 하며 만난 아이들에게 그의 별명은 ‘다콩’이다.

그를 설명하려면 좀더 다양한 수식어를 보태야 한다. 우선 서울 강북구 지역사회에서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하는 로컬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의 협동조합 감사이자 조합원. 여기서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이란, 마을공동체 사업 지원이나 축제 기획부터 동네 사람들 이삿짐 나르기 같은 소소한 일까지 ‘모든 일’이다. 시민들이 출자해 청년 전세금을 지원해주는 사회투자지원재단 부설 ‘터무늬제작소’ 운영위원도 맡고 있다. 로컬엔터테인먼트는 강북구의 청년주택 ‘터무늬있는집’을 운영한다. 강북구 번동 오패산 자락에 위치한 그의 집이자 마을사랑방 ‘건강의집’(방문진료 의료기관인 ‘건강의집’ 의원과는 다른 곳이다)이 청년주택의 뿌리다. 해외주민운동연대 코코(KOCO) 실행위원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빈민운동으로 지역 공동체를 지키는 싸움에도 연대한다. “크게 다를 것 없는 의사”라며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그를 한사코 만나러 간 이유다.

홍종원 원장이 3월6일 서울 강북구 번동의 한 환자를 방문해 진료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의료용품으로 배 불룩해진 가방을 들고
3월6일 오전 9시 강북구 번동에 있는 건강의집 의원에서 그를 만났다. 토요일이지만 환자 두 명과 방문진료 약속이 잡힌 날이다. 홍 원장은 커다란 갈색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카메라용 가방을 왕진 가방으로 사용한다. 청진기, 주사기, 혈압계 등 별별 의료용품으로 배 불룩해진 가방을 들고 그는 번동 골목골목을 누볐다. 건강의집 의원은 일반 병원과는 전혀 다르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오는 대신, 의사가 가방을 들고 환자를 찾아간다. 의사는 하얀 가운도 입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다닌다. 동네 지리는 해부학 책만큼이나 빠삭하다.

이날 첫 번째로 방문한 환자는 뇌졸중을 앓은 뒤 왼쪽 몸이 불편해진 60대 장애인 환자 ㄱ씨다. “날씨가 따듯해졌으니까 운동 좀 하셔야 해요.” 홍 원장은 다정하게 안부 인사를 건네며, 혈당 검사를 진행했다. ‘장애인 건강 주치의제도’ 시범사업이 시행된 이듬해인 2019년 3월 문을 연 건강의집 의원은 많은 장애인 환자를 돌본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장애인 상당수는 고립됐다. ㄱ씨는 만성질환 관리를 홍 원장에게 의지한다.

다음 환자는 반지하에 홀로 사는 70대 노인 ㄴ씨. 그는 오래전에 폐결핵을 앓아 한쪽 폐가 제 기능을 못한다. “지난번에 드린 소변약은 이제 안 드세요? 약 떨어질 것 같으면 연락주세요.” 홍 원장은 조심스럽게 ㄴ씨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혈압을 재고, 살뜰하게 약을 챙겼다. 입 밖으로 내어 묻진 않았지만, ㄴ씨의 ‘마음 건강’도 슬몃 살폈다. 그가 만나는 사람 중에는 외롭거나 우울한 환자가 많다. 어떤 환자는 그에게 자주 전화를 건다. 어쩌면 아파서, 어쩌면 외로워서.

‘닥터홍’이 이렇게 방문진료하며 돌보는 환자는 50~60명가량. 함께 일하는 김창오 원장은 100명 이상의 환자를 방문진료한다. 강북구만이 아니라 인근 노원구, 성북구까지 출장을 나간다. 중증장애인, 누워만 있어야 하는 와상환자, 요양원의 고령환자 등을 주로 만난다. 환자 상당수는 생활이 어려워 국가에서 의료비를 지원받는 의료급여 수급권자다. 그러다보니 병원 수익은 크게 나지 않는다.

2014년 서울 강북구 번동에 마을사랑방인 ‘건강의집’을 열고 동네 한량이 됐다. 홍종원 제공

하다보니 그만두지 못하겠더라고요
뜻밖에도 홍종원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꿔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어릴 때 그의 꿈은 운동선수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하는 게 마냥 즐거웠다. 지금도 농구, 축구, 수영 등등 못하는 운동이 없다. 의사가 된 이유는 그저 “성적에 맞춰 지원한 대학 중 의대만 붙어서”였다. 2005년 가톨릭관동대 의대에 입학했다.

마을사랑방 구실을 하는 ‘건강의집’이자 홍종원씨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초기 모습. 홍종원 제공

평범한 의대생이 지금처럼 변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에 입학해서 다시 생각해봤죠.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직업인지. 의사가 나오는 영화, 책, 드라마 등을 일부러 봤어요. 의료봉사도 많이 했죠. 대학교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홀몸노인, 장애인 등 아픈 이들의 집을 찾아다녔어요. 그분들 말벗도 하고, 휠체어 태워서 산책도 해드리고, 정신과 폐쇄병동에 가서 환자들과 대화도 나누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누룽지’라는 동아리 활동이었는데, 지도교수님이 예방의학교실 박웅섭 교수님이셨어요. 처음에는 예방의학이 뭔지도 몰랐죠. 진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지역에서 뭔가 활동하시더라고요. 선생님을 많이 따라다녔어요. 그러다보니 장애인 환자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알게 된 거죠. 의료·건강에 대한 고민도 많아지고. 하다보니까 그만두지 못하겠더라고요.”

홍종원은 그렇게 조금씩 생각의 변화를 겪은 뒤 ‘병원 밖 환자들’과 점점 더 넓게, 깊게 만났다. 방학 때면 네팔 등 국외로 의료봉사활동도 다녔다. 2008년 충남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 때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지역주민을 조사하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의사들을 만나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모순에 눈뜨게 됐다. 비슷한 무렵에 김창오 원장을 교회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김 원장은 강북구에서 홀몸노인 방문진료를 하는 엔지오(NGO·비정부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1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 옹진군 백령도와 경기도 남양주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는 동안 홍종원의 공간과 관계는 더 확장됐다. 강북구 수유동에 집을 얻어 낮에는 남양주로 출퇴근하고, 저녁에는 사람을 만났다. 강북구 동네모임, ‘수유너머’ 같은 공부모임, 구로 민중의집 같은 지역운동단체, 심지어 타이 빈민운동 현장까지 직접 찾아갔다.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지역사회의학을 연구하는 박사과정도 거쳤다.

“저는 뭔가 알고 싶으면 움직이는 편이에요. ‘그냥 궁금하다’고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직접 찾아가보고 몸으로 부딪히는 편이죠.” 운동을 좋아하는 홍종원과, 변화를 모색하는 활동가로서 홍종원이 이렇게 맞닿아 있다. “낯선 곳에 여행 가면 몸으로 생각하는 게 더 빨라요. 길을 찾을 때 지도를 보긴 하지만, 틀린 길을 끝까지 가보고 다시 돌아와서 원래 가야 하는 길을 가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빨리 움직이면 되니까.”

네팔 지진 피해 지역으로 의료활동을 갔던 2017년 모습. 그즈음 타이, 인도네시아 등에도 빈민운동을 배우러 자주 갔다. 홍종원 제공

사람이 건강하게 산다는 건 뭘까
‘다른 의사’로서 ‘다른 삶’을 찾는 길도 그랬다. ‘사람이 건강하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그의 고민은 보건의료 영역을 넘어, 공동체로 사회로 향했다. 한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려면, 건강한 사회적 관계와 건강한 지역사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변화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강북구를 선택했다. 그곳엔 공중보건의 시절 즐겁게 어울렸던 풀뿌리 지역활동가와 김창오 원장이 있었다. “기억이 아주 선명하지는 않지만 대여섯 살 때 살았던 미아삼거리”가 있는 강북구에서 쌓아온 인연은 그를 자석처럼 그곳으로 이끌었다.

그가 쓴 엔지오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건강마을 만들기 사례연구’다. 서울시는 2012년 건강마을 사업을 추진했다. 홍종원이 지금도 살고 있는 강북구 번동 148번지가 시범사업 대상이다. 김창오 원장이 당시 그 사업을 기획·진행했고, 홍종원도 힘을 보탰다.

‘강북구는 서울시 자치구 중 전체 사망률, 만성질환 유병률, 중증질환에 대한 의료접근성이 가장 취약한 지역으로, 강북구의 건강형평성 지표는 서울시 내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강북구 내에서 번2동은 대표적인 저소득층 밀집지역이며, 그중에서도 148번지는 오패산 산기슭에 위치한 산동네로 폐쇄적인 지형적 특성으로 생활기반 면에서 상당히 소외된 곳이다.’(홍종원, ‘건강마을 만들기 사례연구’, 2015년)

“이 동네에 앉아 있어보면 알아요. 지역에 사는 장애인이 많다는 걸. 전동휠체어가 지나가는 모습을 이렇게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이 없거든요. 장애인이 전체 인구의 5%가량 되는데, 번동은 장애인이 10%, 중증장애인이 5%예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건너편 작은 건물 1층에 자리잡은 건강의집 의원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홍종원은 말했다.

그는 서울의 의료취약지 한복판에 직접 뛰어들었다. 2014년 번동 148번지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공간을 하나 얻었다. ‘명동홈패션’이라는 레트로(복고풍) 감성의 샛노란 간판이 붙은, 그야말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소파를 하나 놓고 문을 열어두자, 오가는 주민들이 빼꼼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오패산마을 축제 기획도 하고, 지역아동·청소년센터 아이들이랑 놀기도 하고, 우쿨렐레 연주도 했다. ‘건강의집’이라고 그가 이름 붙인, 이를테면 마을사랑방이다. 상가 건물 안쪽에는 방도 하나 딸려 있다. 그곳에서 “모래알처럼 모인 청년들과 함께 살았다”. 지금의 건강의집 의원과 달리 그곳은 병원이 아니다.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공간’에 가까웠다.

병원도 아니고 마을사랑방인 ‘건강의집’을 만든 이유가 뭔가요.

“건강을 다르게 바라보고 싶었어요. 막연히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일단 뭔가를 하려면 살 곳이 필요해서 적당한 공간을 찾은 거죠. 월세도 25만원으로 저렴했어요. 청년 여럿이 나눠 내서 큰 부담도 아니었고요. 무엇보다 집 바로 앞으로 마을버스가 지나가고 사람들의 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건강의집 문이 항상 열려 있으니, 지나가던 주민들이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저는 그냥 같이 사는 사람이 된 거죠.”

2018년 파인텍 고공농성 의료지원을 위해 75m 굴뚝에 다섯 번 올라갔다. 홍종원 제공

저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 하는 방문진료도 “사람들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냥 아픈 이웃의 집에 가는 것”이라고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홍종원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저는 지역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이런 생각 전혀 안 해요. 저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그가 강북구에서 해낸, 손에 꼽을 수조차 없는 많은 변화는 뭐란 말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뭘 많이 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고민하면서 그냥 재밌게 놀았죠. 하하.”

홍종원이 2014년부터 살고 있는 건강의집 뒷방이 청년주택 ‘터무늬있는집’으로까지 이어진 과정도 소박했다. 어느 날 놀러 온 박진우가 물었다. “형,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어, 그래. 자고 가.” 진우는 강북구에서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는 청년이다. “진우랑 석 달쯤 같이 사는데, 비슷한 처지에 놓인, 집을 구하기 어려운 친구 몇 명이 눈에 띄더라고요. 각자 문화예술, 협동조합 활동 등을 하는 친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모여 살게 된 거죠.”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뤘다. 가난한 청년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셰어하우스인 셈이다.

‘자고 가’라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변화가 지금의 청년주택 사업으로 뿌리내렸어요.

“처음엔 어중이떠중이 모여 사는 거였어요.(웃음) 사람이 늘어나니까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근처에 반지하방 2개를 더 얻었어요. 방 3곳에 열댓 명이 된 거죠. 그럴싸한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대출을 받을까 고민하다가, 자활운동을 오래 하신 김홍일 신부님을 만났어요. 신부님이 이사장으로 계신 사회투자지원재단에서 시민들이 직접 출자해 청년들의 주거를 돕겠다고 해주신 게 지금껏 이어졌죠.”

2018년 사회투자지원재단은 강북구 번동에 시민출자 청년주택 터무늬있는집 1호를 지정했다. 그해 12월에는 근처 다세대주택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매입해서 청년들에게 빌려주는 터무늬있는집 3호가 시작됐다. 이곳에 거주하는 청년은 월 10만원 안팎만 내면 된다. 터무늬있는집은 로컬엔터테인먼트 협동조합이 맡아 운영한다. 작지만 매출이 생기고, 수익도 나온다. 같이 살던 청년들은 이사했지만, 홍종원은 “좁고 불편해도 익숙한 그 집”에 남았다. 여전히 그의 곁에는 148번지 주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2019년 ‘건강의집’ 의원 개소식. 고마운 분들이 많이 찾아와줬다. 홍종원 제공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다보면
이들이 지역에서 하는 일은 카페 운영, 문화예술 기획처럼 멋들어진 일은 아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다보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도 언젠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얼마 전 동네 지역아동센터 공사와 이사를 도왔어요. 동네 어르신 이삿짐도 날랐어요. 동네 청소를 하고 장애인이 투표장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지역의 변화는, 정치나 정책의 개선보다는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찾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쪽에 가까워요. 저는 이런 순간에 함께하고 있을 때가 좋아요.”

그는 그럴 때 “변화의 순간에 서 있다”고 느낀다. 강북구 밖에서 역시 그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2017년 파인텍(옛 스타케미칼)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던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을 사다리 밟고 다섯 차례나 올라가 농성자들의 건강을 챙겼고, 몇 년간 매달 쪽방촌 진료를 나가고 있다.

“지역을 멋지게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은 금세 깨졌어요. 내가 바꾸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깨달았어요. 그리고 제가 변했죠. 뒤를 돌아보며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뒤처진 사람은 없는지를 생각하려고 해요.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어떻게 존재할지를 생각해요. 내가 누구와 함께 변화를 만들고 있는지를 생각해요.”

언제까지 지금의 일을 이어갈 건가요.

“알 수 없죠. 방문진료를 허락해주는 분들이 고맙고, 그분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긴 해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욕심내서 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느 순간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 사라질 것 같아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다음 일을 찾아가겠죠. 저는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남들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뭔가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다음도 그런 일이지 않을까 싶지만, 그게 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꿈도 계획도 없다”면서도, 그는 여전히 꿈꾼다. “아픈 이들 곁에서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고. 그러면서 그들과 “건강을 이야기하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고 또 찾을 것”(<혼자서는 무섭지만-코로나 시대 일상의 작가들>, 홍종원 외, 2020)이라고.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355호 - 체인저스 21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582/

홍종원을 바꾼 것

관계

“우리는 모두 OO한 관계로 연결돼 있다. 좋은/나쁜 관계, 자유로운/협력하는 관계….” 그는 ‘관계’가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했다. “우리가 관계 속에 있는 존재임을 떠올리고 어느 상황에서건 관계에 집중하고, 그 관계 속에서 의미와 방향을 찾으려는 것 같아요.”

2014년 마을사랑방 ‘건강의집’이라는 공간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했다. 그곳에서 그는 의사가 아니다. 동네 청년, 젊은이, 때론 아저씨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주는 의사라는 권위가 없는 상황에서, 보통 ‘의사’ 하면 떠오르는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지역주민, 환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그냥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건강한 삶’이라는 텃밭을 가꾸는 데는 질병을 치료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곁에 있는 이웃’이라는 영양분도 중요하 기에.

실제로 그가 ‘다른 길’로 접어드는 순간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과의 관계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웅섭 가톨릭관동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와 김창오 건강의집 원장은 그가 ‘다른 의사’로 살도록 이끌었다. 로컬엔터테인먼트 협동조합 청년들은 강북구에서 여러 가지 작당 모의를 함께했다. 그동안 만난 선후배나 친구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홍종원은 끊임없이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저한테는 모두 스승인 그들에게 많이 배웠다”고 했다.
에필로그

그런 의사는 처음 봤다. ‘남의 집’, 그러니까 환자의 집을 찾아가서 홍종원 원장은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환자에게 건네는 말, 내미는 손길 하나하나도 조심스러웠다. “혈당 수치 체크 한번 해볼까요?” 증상을 물을 때만이 아니라, 일상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다. 행여나 모를 환자의 아픔을 건드릴세라 저어하는 듯했다. 환자에게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냐고 화내거나, 건강 관리를 이렇게 해서 되겠냐고 나무라거나, 귀찮은 표정으로 쌀쌀맞게 대하는 의사만 세상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겸손은 처음 느껴봤다. 최초의 방문진료 전문 의원, 지역 청년활동, 시민 출자 청년주택 건립 등 여러모로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으면서도, 그는 멋쩍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손사래를 쳤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랑 어울리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보다 ‘너’와 ‘우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의사는 환자를 돕는 사람”이므로 “자신이 빛이 나야 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곁’에서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아픈 이를 돕고, 응원하고, 때로 함께 비를 맞고 있다. 그런 그의 삶을, 나도 응원하고 싶어졌다. (그가 의대생 시절에 사회가 궁금해서 <한겨레21>을 진짜 열심히, 재밌게 봤다고 말해줬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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