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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애를 그렇게 키워?”라는 질책을 사양한다

등록 2021-01-30 15:09 수정 2021-02-01 01:37
쌍둥이인 비장애인 딸에게 여섯 살부터 사교육을 시켰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은 생후 13개월부터 사교육을 했다. 일찍부터 치료에 매달렸어도 나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쌍둥이인 비장애인 딸에게 여섯 살부터 사교육을 시켰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은 생후 13개월부터 사교육을 했다. 일찍부터 치료에 매달렸어도 나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너는 왜 애를 그렇게 키워?”라는 말은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방임과 유기, 신체적·정신적 학대가 발생한 극단적 상황이 아니라면 자식을 키우는 모든 부모의 양육관과 교육관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사교육 영역에선 더 그렇다. 네 살에 영어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등학생이 됐는데 논술 학원을 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는 왜 애를 그렇게 키워?”라는 말을 듣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사실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는 이런 일이,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에겐 일상다반사로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불쌍한’ 장애아를 키우니까 돕고 싶어 그랬을 거라고 좋게 생각하려 애쓰지만 더는 사양한다. 장애가 있는 건 불쌍한 일이 아니며 오지랖도 선을 넘으면 폭력이 된다.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돈’ 때문이라면 정말 최악이다.

‘엄마 선생님’에 대한 끝없는 요구

나는 비장애인 딸에게 여섯 살부터 사교육을 시켰다. 피아노 학원을 보냈다. 공부도 시켜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가정방문 학습지도 했다. 국어와 수학을 했는데 오래지 않아 그만뒀다. 숙제가 버거운 딸이 눈물을 뚝뚝 흘렸기 때문이다. 당시 딸은 숫자를 100까지 세지도 못했는데 학습지 진도는 ‘더하기 1’을 넘어 ‘더하기 2’로 나가니 너무 힘들어했다. 그래. 공부는 나중에 하자. 나와 딸의 의사는 존중받았고 아무도 우리가 보습학원을 일찍부터 다니지 않은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딸과 이란성 쌍둥이인,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은 생후 13개월에 사교육을 시작했다. 작업치료를 시작으로 물리치료, 언어치료, 놀이치료, 음악치료, 감각통합치료, 심리치료, 특수체육, 심리운동 등 온갖 치료실을 다녔다.

그렇게 일찍부터 치료에 매달렸어도 나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들의 발달이 늦은 원인이 내 잘못인 양 치부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치료 횟수를 더 늘려야 한다, 왜 이런 치료는 받지 않느냐, 그 치료는 저기 저 선생님이 잘한다는데 이동 시간이 길어도 치료실을 옮기는 게 낫지 않으냐. 그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딸의 엄마일 땐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평범한 일상도 아들의 엄마일 땐 교육의 연속이 돼야 했다. 밥 먹을 땐 어떤 순서로 어떻게 먹이느냐, 세수할 때 왜 그림카드와 타이머를 활용하지 않느냐, 아이가 목마르단 신호를 보내도 ‘물’이라는 말을 비슷하게 발음하지 않는 한 물을 주지 말아라. ‘엄마 선생님’에 대한 주변의 요구는 끝이 없었고 삶 자체가 버거워진 나는 잔뜩 곪을 대로 곪아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종기처럼 늘 성나 있었다.

친분은 없지만 이름은 서로 알고 지내는 장애아의 아빠가 있다. 최근 그가 쓴 글을 읽었는데 아내가 힘들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변에서 왜 애를 그렇게 키우냐며 더 좋은 엄마가 될 것을 압박하는 모양이다. “요새도, 아니 아직도 그러는구나. 그래, 그러겠지.”

자폐나 지적장애. TV나 영화에서만 접하던 단어가 내 자식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부모들은 처음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죄책감도 느낀다. 아이의 장애가 내 잘못 같다. 이런 죄책감은 무의식에 내재한 ‘장애 혐오’와 만나 어떻게든 장애를 극복하려 애쓰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매달 수십, 수백만원은 기본. 천만원이 훌쩍 넘어도 좋다. 어떻게든 치료받고 ‘사람’(비장애인)이 되거라~.

비장애인의 사교육 같은 장애인 치료

일부 치료실이 앞장서 이런 분위기를 부추긴다. “어머니, 아이의 발달은 다 때가 있어요. 지금처럼 키우면 안 됩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예후가 안 좋아져요.” “조기 집중 치료를 받으면 자폐도 완치될 수 있어요!” 얼핏 조언 같아 보이지만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치료실의 십중팔구는 그냥 빨리 지갑을 열고 접수를 완료하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기를 놓치면 애가 큰일 난다는데 어느 부모가 두고만 볼까. 부모들조차 발달장애를 모르는 비장애인이기에 전문가인 치료사의 말은 절대적이다. 남들은 ‘빚투’(빚내서 투자)를 한다는데 발달장애아의 부모는 ‘빚치’(빚내서 치료)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치료받으면 완치라도 될 줄 알았던 아이는 여전히 발달장애인이고 가정경제가 휘청한데다 무리한 치료로 부모도 아이도 지쳐만 가니 가정에 웃음이 사라져간다.

장애인 차별이 당사자에게만 가해지는 건 아니다. 장애아의 부모도 차별받는다. 비장애아 부모에겐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발달장애아 부모에겐 스스럼없이 하는 현실이 그것을 방증한다. 아이의 미래를 볼모로 잡아 한 가정의 현재를 압박하는 일, 그 또한 폭력임을 알아야 한다.

발달장애인에게 치료는 비장애인에게 사교육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발달장애의 경우 여러 재활치료가 삶의 직접적인 활동과도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그 절실함은 비장애인의 그것보다 깊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치료든 사교육이든 개인의 삶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 수단과 목적, 우선순위가 뒤바뀌면 안 된다는 것. 그건 잊으면 안 된다.

그만의 방식대로 성장하고 발달할 것

얼마 전 TV를 틀었더니 김혜수 주연의 드라마 <직장의 신>이 방영 중이었다. 몇 년 전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다시 보니 등장인물의 모습이 꼭 발달장애인의 성장처럼 느껴진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에 입사한 새내기 정유미는 이제 갓 장애 진단을 받은 어린 발달장애인이다. 본인도 열심히 해보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직장의 신’인 베테랑 김혜수를 부러워하지만 정유미는 김혜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정유미는 그만의 방식대로 성장하고 발달할 것이다. 정유미라는 틀 안에서 최선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김혜수와는 또 다른 모습의 ‘직장의 신’이 될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인간의 삶이란 다만 각자의 속도대로 성장하면 되는 것이다.

글·사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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