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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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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명령이다, ‘영끌’하라

이 시대 능력주의는 사회적 운을 탁월함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등록 2021-01-12 12:13 수정 2021-01-14 05:45
한국에선 투자가 특권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투자의 벽을 높이 만드는 것이 첫째고, 투자의 가짓수를 많이 만드는 게 둘째다. 첫째의 예가 아파트이고, 둘째의 예가 교육이다. 연합뉴스

한국에선 투자가 특권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투자의 벽을 높이 만드는 것이 첫째고, 투자의 가짓수를 많이 만드는 게 둘째다. 첫째의 예가 아파트이고, 둘째의 예가 교육이다. 연합뉴스

2020년 한국 사회를 지배한 말 중 하나는 ‘공정’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공정은 청년들의 문화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개념이었다. ‘공정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고 이들의 공정 요구가 차별과 불평등을 구조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이라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공정’ 요구는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부터 의대생들의 국가시험 거부까지 현안마다 가치의 대립전선을 그었다.

‘능력’ 중심 사회는 괜찮지 않니

공정이 왜 문제적인지를 진보 지식인들이 설명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말이 ‘능력주의’(Meritocracy)다. 개인의 자질이나 재능을 의미하는 능력보다 개인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이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적 운’인데, 능력주의가 그 점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운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가리는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 세계, 즉 상식의 세계에서 기각당하기 쉽다. 사람들은 개인들 간 능력에도 차이가 있고, 개인의 능력 차이를 사소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승인하는 것은 사회적 운인 그 사람이 속한 가족과 같은 집단의 능력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점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능력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 사람에게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가 넘쳐서 문제가 아니라 안 돼서 문제인 사회다. 가뜩이나 특권 때문에 문제가 되는 사회라면, 특권이 아니라 능력을 중심에 두었다면 좋은 사회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주의가 무엇보다 능력을 중심에 두고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하는 것이라면, 그에 따라 불평등이 더 심화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강하다. 그래서 공정이 왜 문제인지 물었는데 능력주의 때문이라고 하면 그 비판을 더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히려 그래서 공정을 실현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사회적 운과 능력을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했다. 집이 잘살거나 이른바 ‘연줄’이 좋은 것은 능력이기보다 사회적 운에 가까웠다. 이런 사회적 운이 직접적으로 삶의 성공과 실패에 관여할 때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신분제 사회는 아예 그것을 합법으로 여겼지만 신분제를 철폐한 이후에도 특권은 지속됐다. 사회적 관행이거나 아예 초법적 특권이 횡행함에 따라, 공정은 특권이 작동하는 것을 정지시키고 능력에 사회적 운 자체가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표 사례가 1980년대에 한국에서 학원수업과 과외를 완전히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이 시대는 사회적 운과 ‘개인 역량’을 특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절묘하게 결합했다. ‘투자’로 만든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기 위해 사회적 운은 특권으로 활용되는 게 아니라 투자로 실현돼야 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투자는 주어진 것을 최적화하는 데 과감하게 활용하기 위해 면밀히 계산하고 연구하고 이후에 잘 산정하는 노력과 역량을 필요로 한다. 특권에는 소속과 신분만이 필요하지 노력은 필요하지 않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한겨레 박종식 기자

아무런 탁월함이 없는 ‘특권’

그렇기에 사회적 운이 투자 대상이 되면 그것은 특권이 아니다. 사회적 운도 노력을 통해 발현돼야 한다.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면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칭찬받을 훌륭한 일로 여겨진다. 심지어 그 사회적 운이 돈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돈이 성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특권이지만 성과를 내기 위해 재능에 투자하는 것이 되면 문제가 없어져버린다. 투자는 특권과 달리 ‘노력과 재능’을 그 실천 과정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어떤 재능과 노력이 필요할까? 특권의 특징은 ‘남용’이다. 특권은 남용되더라도 소모되지 않는다. 신분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무한대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투자는 ‘주어진 것’을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투자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최적화’다. 얼마나 사회적 운을 최적화해 사용할 수 있는가.

남용과 최적화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낭비 없이 무엇인가를 깔끔하게 하려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연구, 분석하는 성실함이 기본으로 전제된다. 그를 통해 최적화는 완벽함이라는 이상을 추구한다. 완벽한 것은 아름답다. 이런 점에서 최적화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추한 특권과 완전히 대비된다. 최적화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계발하며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그는 ‘탁월한 존재’가 된다. 특권에는 탁월함이 없지만 투자에는 탁월함이 있다.

탁월함은 인간이 추구하는 미덕이며 교육의 이상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교육으로 탁월한 존재가 되는 것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얻는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탁월함은 절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도야와 연마를 필요로 한다. 갈고 다듬지 않은 탁월함은 없다. 이 때문에 탁월한 자는 뛰어난 사람이기만 한 게 아니라 타의 모범이 되는 자다.

특권이 비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불법이나 불평등을 야기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특권을 써서 성공한 경우 거기에는 아무런 탁월함도 없기 때문이다. 탁월함이 없어, 다른 사람이 배울 게 없고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탁월함이 있을 때만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반면 특권은 사회적 기여 없이 사회로부터 혜택만 누리고 사회를 해치기에 더욱 비난받는다.

원론적으로 능력주의에선 사회적 운이 아무리 중요해도 특권층이건 뭐건 ‘줘도 못 먹는 놈’, 아니 나아가 ‘준 것밖에 못 먹는 놈’은 잔인하게 탈락시킨다.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이 없는 이를 탈락시키는 게 공정한 일이다. 공정에 의해 탈락하는 것은, 특권이 없는 계층만이 아니라 특권이 있는 계층에서도 일어난다. 공정은 적어도 경험세계에선 ‘몰계급적 현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인의 성공을 사회적 운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된다.

능력의 심장부는 투자자 역량

물론 투자라고 특권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투자가 투자가 아니라 특권이 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투자의 벽을 너무 높게 만들거나, 투자의 가짓수를 다른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하게 많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투자할 수 있는 사람과 투자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투자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 차이가 되고 그 자체로 특권이 돼버린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대표적으로 전자의 경우고, 교육은 후자의 경우다. ‘투자’로 전환해봤자 여전히 특권으로 작동한다.

투자는 특권이 아니기에 실패할 수도 있고 그 실패에 책임을 져야 한다. 투자의 원칙은 보상과 손실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투자한 사람이 그 손실을 감당한다. 반면 특권의 핵심은 면책이다. 특권은, 남들은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거나 남들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고도 책임을 면하는 것이다. 게다가 실패해도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 없이 언제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특권의 특징이다. 특권은 소모됨 없이 ‘될 때까지’ 할 수 있고 그래도 손실되는 게 없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능력주의를 그 한도까지 끌어올린 ‘탁월한’ 면모다. 자원의 차이만큼 중요한 것은 그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려는 마음이다. ‘영끌’이라는 말처럼 각자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하는 것이다. 그것도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며 최적화해 투자하는 것이다. 투자자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고, 평가 역시 얼마나 투자자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능력주의가 실험하고 평가하는 능력의 심장부는 투자자 역량이다.

이처럼 이 시대의 능력주의는 사회적 운을 탁월함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능력주의가 야기하는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불평등에 맞서며 동시에 다른 탁월함, 혹은 탁월함에 대한 다른 길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예 사람이 탁월함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며 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탁월함에는 결과로서 탁월함만 있는 게 아니다. 성장은 탁월함을 향해 도야와 연마로 나아가는 것인데,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이 보여주는 탁월함과 숭고함이 있다. 이 경우에도 탁월함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탁월함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 삶의 목표와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주체성도 사라진다. 탁월함을 위해 자신의 성장을 돌보는 만큼 그는 자기 삶을 책임지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탁월함을 향해 도야하고 연마하고 성장을 추구하며 자기 삶을 책임지는 주체가 되는 기쁨을 느낀다. 삶에서 성장의 기쁨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불평등하지 않은 탁월함의 길이란

더구나 탁월함을 거부하는 것이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그 운동에 탁월함이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탁월함을 거부하는 것까지 탁월하게 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에 다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며 가치에 수긍하고 따르게 된다. 이 또한 탁월함이다. 탁월하지 않은 것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할 마음을 먹게 하는 본보기가 될 수는 없다. 홀로 거부하고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건 어떻게 사회를 바꾸는 운동이 될 수 있는가?

불평등에 이르지 않는 다른 탁월함의 길을 제시하는 것, 그를 통해 탁월해지기 위해 자기를 책임지는 주체가 되는 길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를 넘어 평등을 실현하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앞에 놓인 가장 큰 난제가 아닐까 한다. 이 길을 제시하지 못하면 비판은 사회를 바꾸는 운동을 촉발하는 것으로서 힘을 가질 수 없다. 우울하게도 비판이야말로 탁월함의 심판대에 올라서 있다.

엄기호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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