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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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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감독의 12월13일] 다름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등록 2020-12-23 07:38 수정 2020-12-25 01:20
2020년 2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카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M, R, 이길보라 감독 파트너, 이길보라 감독(왼쪽부터). 이길보라 제공

2020년 2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카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M, R, 이길보라 감독 파트너, 이길보라 감독(왼쪽부터). 이길보라 제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쥐고 흔든 2020년이 지나간다. 코로나19로 누구는 생명을 잃고 누구는 직장을 잃었다. ‘비대면’이 시대정신이 돼버린 세상을 거리두기, 모임 금지, 폐쇄와 봉쇄 같은 흉흉한 언어가 지배한다. 끝은커녕 진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전 지구적 유행’(팬데믹)이 사그라지더라도 우리는 코로나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12월13 일요일

오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 때 만났던 이웃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제정 관련 뉴스를 보다 내 생각이 났다며 한국에 꼭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함께 보낸 기사의 메인 사진에는 서로 다른 피부색을 지닌 이들이 소파에 앉아 웃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응원

메시지를 보낸 R는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이다. 그의 파트너 M은 한국계 네덜란드인으로 어릴 때 네덜란드로 국제입양 됐다. 2018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하자마자 이웃의 동양인 커플을 발견했고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하던 차에 둘을 만났다. 우리는 종종 타이요리 전문점에서 만나 아시아의 맛을 그리워하며 함께 밥을 먹었다.

한국에서 농인(청각장애인) 부모 아래 태어나 수화언어를 모어로 배운 코다인 나와 일본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서 공부하며 생활한 나의 파트너, 네덜란드에서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으로 살아온 R, 한국 입양인 출신인 네덜란드인 M, 다른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서로의 시각을 통해 바라보는 삶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너무나 다채로웠다.

1년 뒤, M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찾아왔다. 오래돼 누렇게 변색한 종이에는 국한문혼용 문장이 적혀 있었다. M은 자신이 가진 출생과 관련한 유일한 기록이라며 가족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입양기관에 찾아가 받은 것인데 혹시 글자를 읽을 수 있는지 물었다. 한자는 잘 몰라 일본인 파트너를 불렀다. 내가 한국인이지만 왜 한자를 모르는지, 일본인인 파트너는 어떻게 한자를 아는지, 무엇이 한글이고 한자인지 M에게 설명했다.

언어의 퍼즐을 맞추니 당시 ○○동에서 아이를 발견했다는 내용인데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M은 살짝 실망한 눈치였다. 이걸 단서로 주민센터나 경찰서에서 뭔가 찾아볼 수 있지 않겠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는 M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한국인인 나를 만나 이걸 묻기까지 그에게는 얼마큼의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을까.

M과 R는 길게 휴가를 내어 한국에 갔다. 여러 계기가 있지만 나를 만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관련 영화를 본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가서 M의 친부모도 찾아볼 계획이라며 둘은 설레는 표정으로 말했다. 게다가 둘이 함께하는 첫 아시아 여행이었다. 얼마 뒤, 그들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참다못해 한국 떠나 홍콩으로

여행이 어땠느냐고 묻자, 순식간에 R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거의 화가 난 표정이었다. M은 좀 난감해했는데 평소 온화한 표정과 긍정적 자세로 사는 둘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R는 한국에서의 경험이 그 어떤 여행지의 그것보다 무례하고 기분 나빴다며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참다못해 일정을 바꿔 홍콩에 다녀왔을 정도라고 했다. 조금 더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무시했다고, M에게도 역시 그랬다고 말이다. M은 자신은 한국어를 못하는 교포로, R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로 인식한 것 같다며 백인 네덜란드 가족과 여행할 때와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일본인 파트너는 무슨 말이냐고 한국에서 그런 경험은 해본 적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너는 ‘한국인’과 비슷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

R가 말하는 그 시선이 무얼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와 다른 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이를 만났을 때 보이는 그 표정과 시선.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와 다닐 때마다 마주하던 것이었다. 청인 입장에선 신기해 관심 갖고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나는 동물원의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동물도 그런 처지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고개를 돌리면서까지 빤히 쳐다보는 무례함에 질릴 대로 질려 나는 부모와 밖에 나가면 수어를 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말을 거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모른 척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조금 더 자라서는 나도 똑같이 무례함을 장착하고 ‘미러링’을 했다. 두 눈 크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똑같이 쳐다봤다. 그럼 그게 차별임을 알아채고 시선을 거두는 이도 있었지만, 알아채지 못하는 이가 훨씬 많았다. R가 마주한 건 한국 사회의 차별이었고, M은 친부모를 만날 희망을 박탈당했다. 입양기관에서 친부모의 정보 보호를 위해 어떤 정보도 줄 수 없다고 했다며 M은 실망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정말 유감이라는 말밖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경계도 구분도 필요 없이

그런 R가 진심을 담아 한국 사회에 차별이 없어지길 바란다고, 다양성이 주는 그 풍성함을 누리길 바란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몰라 일기를 쓴다. 언젠가 R와 M이 또 한국에 왔으면 좋겠다. M과 함께 친부모를 찾을 권리를 찾고, R와 다른 이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고 싶다.

차별금지법이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인 엄마와 아빠, 그 아래서 자란 코다인 나와 동생을 포함한 한국 거주민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한인 입양인 M과 그의 파트너로서 한국을 여행할 R를 위한 우산이 되기를 바란다. 다름이 주는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지금 이곳에서 함께 나누고 싶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흔들고 ‘소수’와 ‘다수’의 구분을 허무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구분할 필요가 없는,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꾼다.

이길보라 영화감독·작가

*농인의 비장애인 자녀인 이길보라 영화감독은 제1332호 표지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수어로 ‘차별금지’를 말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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