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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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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7일] 휠체어가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

11월27일 휠체어 바퀴에 공사장 바닥 천 휘감겨
등록 2020-12-22 13:32 수정 2020-12-24 01:21
11월27일 공사장을 임시로 덮은 천에 휠체어 바퀴가 감겨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임태욱 제공

11월27일 공사장을 임시로 덮은 천에 휠체어 바퀴가 감겨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임태욱 제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쥐고 흔든 2020년이 지나간다. 코로나19로 누구는 생명을 잃고 누구는 직장을 잃었다. ‘비대면’이 시대정신이 돼버린 세상을 거리두기, 모임 금지, 폐쇄와 봉쇄 같은 흉흉한 언어가 지배한다. 끝은커녕 진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전 지구적 유행’(팬데믹)이 사그라지더라도 우리는 코로나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11월27일 금요일

내가 사는 집과 직장인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중간에 있는 서울 지하철 삼각지역은 청년 아파트 건축으로 몇 년째 분주하다. 뇌병변장애인으로 전동휠체어를 이용해야만 이동할 수 있는 나는 공사가 시작된다고 하면 짜증부터 치밀어 오른다. 이번 공사는 인도를 다 뒤집어 들어내 보행을 방해한다. 공사차량들로 보행로를 막는 바람에 전동휠체어가 찻길로 다녀야 하는 아찔한 상황이 수없이 연출됐다. 휠체어 편의시설이나 보행로를 확보하지 못해 넘어질 뻔한 일도 여러 번이다. 인도와 차도의 단차를 없앤다며 무늬로 만들어놓은 경사로까지…. 이런 이유로 공사 업자랑 며칠 실랑이가 잦았다.

11월27일 저녁, 마침내 사건이 터졌다. 퇴근 뒤 늘 다니던 공사장 앞을 직장 동료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작업자들이 아파트 입구 인도 공사로 블록을 다 들어낸 뒤 공사를 끝내지 못한 채 천을 덮어놓고 퇴근해버렸다. 돌아서 차도로 가려 했으나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덮어놓은 천 위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천을 휠체어 바퀴로 밟는 순간 바퀴가 돌아가면서 천이 바퀴에 감겼다. 아차 하는 순간, 바퀴와 천은 하나가 되었고 나는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 그 자체로 수습 불가였다. 퇴근길이라 휠체어를 분리할 수 있는 장비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직장 동료와 몇 분 동안 고민하다 떠오른 해답은, 주위 식당에서 가위를 빌려 천을 자르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가던 시민들이 그 상황을 보고 하나둘 모여 도움의 손길을 보내줬다. 무거운 휠체어를 들고 바퀴를 돌리면서 감긴 천을 서서히 풀었다. 함께 도와주던 시민 한 분은 근처에서 가위를 사왔다.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마음들을 보면서 아직 우리 사회가 삭막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다음날 아침, 나와 직장 동료는 정의감에 불타올랐다. 그 앞을 다니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이 또 어떤 불편을 겪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직장에 출근하자마자 줄자랑 각도계를 챙겨 공사장으로 향했다. 문제가 일어난 곳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러자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공사 담당자들이 오히려 시비를 걸었다. 누구보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나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등 장애인 관련 법 규정에 빠삭한 나는 그들을 상대로 조곤조곤 법적 근거를 따져나갔다. 공사 담당자들이 당황했다. 처음의 그 거만함은 점차 사라졌다. 곧 “바로 수정 조치를 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법적 조치까지 하겠다”는 말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저녁 퇴근길에 그 공사장을 지나가다 깜짝 놀랐다. 인도와 차도의 단차는 시멘트 포장으로 완만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천으로 덮였던 곳엔 나무판자를 깔아놓았다. 진작 이렇게 해놓을 것이지….

한 번의 목소리가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 작은 목소리가 지역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목소리의 힘을 믿는다. 이게 우리 장애인들의 삶이다.

임태욱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활동가

*뇌병변장애인 임태욱씨는 제1336호 표지이야기 ‘어느 멋진 하루’에 등장해 장애인의 옷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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