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조주빈은 다수의 피해자에게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줬음에도 협박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해 피해자들을 이 법정 증인으로 불러냈다.”
11월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이현우)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주범 조주빈 선고공판에서 이렇게 밝혔다. 물증이 확실한 사건에서 굳이 피해자를 증인으로 불러내 추가적인 고통을 안긴 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양형 이유임을 재판부가 판결할 때 밝힌 것이다. 그간 절차상 필요하다며, 어쩔 수 없다며 피해자에게만 법정 증언을 요구하고 정작 실제 판결에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던 한국 법원의 변화가 엿보인다. 2020년 9월 법원 내 연구모임 젠더법연구회 주최로 열린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포럼에 참석한 판사들이 피해자들에게 ‘법정에 나와 더 많이 말해달라’는 바람을 전한 것도 이런 변화를 반영하겠다는 의지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 법원은 피해자의 말을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1년 전 판사가 인터뷰를 요청하며 전자우편을 보냈다. 그 보수적인 집단에서 자격증도 없고 내세울 직함도 없는 개인 활동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고 했다. 당사자이자 연대자로서 최초로 판사들과 만날 기회는 소중했다. 그래서 더 많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제안했다.
판사들이 원한 것은 ‘재판을 겪은 피해자들’ 이야기였으나, 나는 ‘신고·고소하지 않은 피해자(총 5문항), 수사기관 경험만 있는 피해자(총 30여 문항), 재판 경험 있는 피해자(총 60여 문항)’로 나눠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법정에 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실제 판사들은 피해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법정에 서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예민하고 억울해하며 (판사가 보기에) 사소한 말에도 상처를 받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단 8일 동안 진행됐지만 트위터와 구글 문서를 통한 설문조사에 성폭력 피해자 30명이 응답했다.
2019년 12월 말, 설문조사 결과를 가지고 서울서부지법에서 전국에서 모인 판사 20명 정도를 만나 4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법대(재판장석)에서 증인석에 앉은 성폭력 피해자만 만났을 판사들에게 더 많은 피해자의 말을 전하려 했다. 나는 ‘성인-비장애-대졸-여성’인 피해자로 내 이야기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피해자들 상황은 다양하다. 자칫 내가 다양한 피해자 모습을 편협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이 고민하고 공부했다.
젠더법연구회와 만난 뒤 2014년부터 연대해온 성폭력 피해자 30명을 직접 만나 앞선 설문조사를 좀더 보완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10대부터 50대까지 성폭력 피해자 64명의 이야기를 담은 분석 보고서를 젠더법연구회에 전달했다. 분석 내용은 판사들이 이용하는 법원 내부 게시판에 3회 게시됐다. 판사가 증인신문 말고 다른 통로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최초의 경험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언어 체계가 무너져 있을 수 있다는 것 △판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폭력 재판의 절차적 측면에서 피해자 보호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것 △법정에서 증인신문 과정이 피해자에게 고통만을 안길 뿐 절차나 결과에서 보상이 없다는 것, 그런데도 △법원은 피해자의 말이 필요하다고만 할 뿐 정작 피해자 말을 들을 준비는 안 돼 있다는 것 등을 전했다.
법정, 여전한 가해의 장법원 내부에서 변화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때, 외부에서 도울 필요가 있었다.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활동가들과 연계해 기획을 이어나갔다. 기관 중심으로 진행하던 ‘방청 연대’를 전문 교육을 해서 일반인 재판 모니터링으로 확대하고 성범죄 재판을 계속 감시했다. 디지털성범죄 재판에서 증거조사와 피해자 증인신문 방식에 대한 세부적인 고민이 실제 재판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평균’적인 재판 수준은 처참하다. 외부에서 관심 갖거나, 피해자 변호사나 공판 검사가 적극적이거나, 재판부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몇몇 경우를 빼면 여전히 재판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가해의 장’이 되고 만다.
피해자의 말을 듣고 싶어도 피해자들이 응하지 않는다고 항변하는 판사들이 있다. 물증이 확보되지 않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일은 당연하지 않냐고 한다. 정규교육을 받은 ‘성인-비장애-피해자’라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수 있지 않냐고 한다. 앞으로 공판 과정이 더 중요해지고 피해자를 더 적극적으로 불러내야 할 상황이 생기는데, 피해자들은 왜 그렇게 소극적이냐고 한다. 그리고 법정에 나온 피해자들은 왜 그렇게 예민한지 묻는다. ‘필요’에 따라 질문하고 그에 성실히 답변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태도다. 법정에선 피고인 방어권도 생각하며 소송 지휘를 하더라도, 나중에 판결에만 피해자 진술을 잘 반영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하는 판사도 있다.
아니다. 판사들은 피해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를 불러내 확인하는 작업이 필수라고 주장만 하지, 어떻게 그들을 법원에 오게 할지, 그들의 말을 어떻게 끌어낼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말하고도 안전한지, 이후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한 보상은 무엇인지 아무도 피해자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법원이 무섭다. 증인신문을 앞둔 피해자나, 증인신문을 거친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가 왜 나오겠는가.
나는 일반인과 피해자에게 피해자 권리와 보호 조처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관련 교육을 계속할 생각이다. 피해자에게 법원에 가도록 권할 것이다. 그러니 법원도 이런 요구에 응답하고 관련 조처를 보장해야 한다. 원래 있는 피해자의 절차상 권리와 여러 보호 조처를 실질적으로 재판에 반영하도록 판사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이를 반영하지 않으면 판사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외부 비판을 경청하고 내부에서 재발 방지 노력을 해야 한다. ‘필요’와 ‘방어권’을 내세운 피고인 쪽의 공격적 행위를 예방하고, 그것이 안 되면 현장에서 적절히 소송을 지휘해야 한다. 피해자가 현장에서 받은 고통을 양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일은 당연하다.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입발림 위로보다 절차와 결과로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돕는 일이 중요하다. 그게 법대 위에 앉은 이들의 의무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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