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얼굴 몰라도 역할 정해진 ‘박사방’은 범죄조직

1심 재판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유포 조직으로 판단… “1심일 뿐” 앞으로도 관심과 연대 이어져야
등록 2020-11-28 03:08 수정 2020-11-28 08:12
2020년 7월25일 ‘n번방 성착취에 관여한 가해자들을 강력 처벌해달라’고 촉구하는 집회가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렸다. 집회 참석자들은 디지털성범죄자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사법부를 비판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0년 7월25일 ‘n번방 성착취에 관여한 가해자들을 강력 처벌해달라’고 촉구하는 집회가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렸다. 집회 참석자들은 디지털성범죄자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사법부를 비판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 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피고인 조주빈을 징역 40년에 처한다.”

2020년 11월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이현우 재판장(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이 다섯 명의 피고인에 이어 마지막으로 피고인 조주빈(25)에 대한 주문을 읽어 내려갔다.

“‘너는 행동대장 해라’ 지시한 적 없다”

하얀 마스크를 쓰고 미동 없이 정면만 바라보던 조주빈은, 그 순간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어 판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징역 40년에 이어 판사가 줄줄이 처분을 읊었다. 신상정보 공개·고지 명령 10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제한 10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 30년, 유치원과 초등학교 출입 금지, 피해자에게 접근 금지, 압수물 몰수, 1억604만원 추징…. 1심 선고가 확정되면, 20대 조주빈은 교도소에서 40년을 살고 나와도 30년 동안 전자발찌를 부착한 채 살아야 한다.

재판은 38분 만에 마무리됐다. 마지막까지 크게 동요하지 않던 조주빈은 재판이 끝나자 구치소 교도관을 따라 법정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이날 재판부는 텔레그램 성착취물을 조직적으로 제작하고 배포한 조주빈 일당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피해자에 대한 협박죄가 공소기각 판결된 것을 제외하면 조주빈의 모든 혐의는 유죄로 인정됐다. 주범인 조주빈(징역 40년) 외에 공범 5명에게도 징역 7~15년(미성년자인 1명은 단기 5년, 장기 10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조직화한 디지털성범죄를 ‘범죄집단’으로 인정하느냐였다. 검찰은 조주빈 일당이 조직폭력배처럼 일종의 범죄집단을 이뤄 범행했다고 판단했다. 조주빈을 포함한 피고인 8명에게 적용한 범죄단체 조직죄(형법 제114조)는 사형, 무기 또는 장기 4년 이상의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할 경우, 구성한 모두를 그 목적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유료회원 등 공범까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배포죄의 최고형인 무기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다.

조주빈 일당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 또는 유포했다는 혐의 자체는 일찌감치 인정했다. 그러나 범죄집단을 구성했다는 혐의는 줄곧 부인했다. 1심 선고를 이틀 앞둔 11월24일, 조주빈은 공범인 ‘부따’ 강훈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범죄집단 구성과 관련한 검찰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검사 텔레그램 박사방 활동 과정에서 피고인(강훈)을 포함한 이기야, 태평양 등 다수에게 (박사방) 관리자 권한을 부여했나.

조주빈 관리자 권한을 줬지만 관리를 시킨 적은 없다. 태평양과 이기야에게는 관리자 권한을 일시적으로 준 것에 불과하다. 방은 내가 다 소유하고 운영했다. 강훈(부따)을 제외한 사람은 그저 돈을 낸 구매자였다.

검사 혼자서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분담시켜 범행에 참여하게 한 것 아닌가.

조주빈 내가 법적으로 무지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는 행동대장 해라’ ‘너는 자금책 해라’ 이렇게 지시한 적이 없다. 형사분들이 쓰라고 했던 조직도처럼 나눠서 생각하고 분류하고 관리한 적이 없다.

검사 공범이 범행에 조직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더 늘어난 것 아닌가.

조주빈 피해자가 늘어난 것은 내가 다른 업무-마약이나 총기 사기-에 정신을 쏟지 않고, 오로지 이것에만 매달려서 (피해자) 인원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기에 답변하기 애매하다.

이름 바꿔가며 생성된 텔레그램방

그러나 재판부는 조주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사방’이 아동·청소년 등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 유포하기 위해 구성된 ‘하나의 조직’이라고 판단했다. 주범 조주빈이 악랄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유인해 착취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닉네임’을 단 익명의 피고인들이 그 범행을 목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 것이다.

그동안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가해자들은 이렇게 항변했다. ‘조주빈이 범죄로 취득한 가상화폐 대부분을 혼자 취득했다.’ ‘조주빈이 피해 여성은 나한테 마약을 제공받는 사람이고, 마약을 얻고 싶어서 어떤 일이든 한다고 했다. 나는 범행 수법을 몰랐다.’ 조주빈이 주도했고, 자신들은 조주빈에게 속거나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도 무참히 깨졌다. 조주빈 외에 이들이 조직적인 범행에 참여하면서,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늘어나고 범행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날 재판부는 “구성원들이 피해자를 유인하거나 성착취물 제작 과정에서 특정 자세를 요구하는 등 범행에 협력했으며, 조씨에게 가상화폐를 제공하는 등 범행이 반복되고 고도화하게 했다”고 짚었다. 공범인 피고인들이 ‘박사방’ 외에 이름을 바꿔가며 운영된 다른 텔레그램 방에 참여했던 점도 ‘범죄집단’ 구성의 주요 근거가 됐다. 경험치가 쌓여 ‘시민계급’이 돼야만 가입할 수 있는 ‘시민의회’방, ‘노아의 방주’방 등이 대표적이다. 재판부는 “조주빈이 만든 성착취물을 유포한다는 것과 조주빈을 추종하며 지시를 따르고 홍보하는 등 본질적으로 동일한 결합체”라고 판단했다.

앞서 범죄단체조직 혐의가 인정된 사례로는 중고차 매매 사기, 보이스피싱 범죄 등이 있다. 피고인 쪽은 이런 범죄에 가담한 이들은 실제 대면해서 서로의 신원을 알고, 통솔하는 체계가 있는 조직이었다는 점을 들어 ‘박사방’ 등은 범죄조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일면식도 없고 서로 신원도 모르는데 무슨 범죄조직이냐는 항변이다.

‘n번방 사건’ 주요 가해자 재판 현황 *2020년 11월26일 기준

‘n번방 사건’ 주요 가해자 재판 현황 *2020년 11월26일 기준

홀로 불법촬영을 소비하고, 함께 즐기다

그러나 재판부는 사이버 공간에서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집단범죄에 대해서도 ‘범죄단체 조직’이 성립한다고 최초로 인정했다. n번방 피해자를 지원하는 신진희 변호사는 “실명으로 움직일 필요 없이, 닉네임 뒤에서 신분을 숨기고 돈도 가상화폐로 받는 인터넷 범죄집단의 특성을 재판부가 이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사이버 공간에서 불법촬영물을 소비하고, 디지털성폭력에 가담하는 과정은 홀로, 또 같이 이뤄진다. 실제로는 밀폐된 공간에서 불법촬영물을 홀로 소비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만큼은 폐쇄적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안에서 익명의 사용자들이 함께 즐기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법촬영물을 공유하면서, 사용자들은 성착취물을 변형하거나 새롭게 창작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디지털성폭력의 변화 양상과 음란성을 근거로 한 규제의 한계’, 김소라, 2018년)

조주빈 일당에 대한 이날 판결은 ‘놀이와 폭력의 경계가 무너진 개인들의 분별 없는 모임도 조직적인 가해로 규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의 박수진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이용한 범죄행위에 대한 법정형은 징역 10년 이하인데 조주빈의 공범처럼 실제 징역 7년 이상이 선고된 사례는 흔치 않았다”며 “‘범죄단체 조직’ 인정이 중형 선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6월 검찰은 조주빈을 포함한 8명을 우선적으로 기소한 뒤 박사방에 참여한 조직구성원 30명에 대해서는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날 1심 판결에 따라 나머지 조직구성원을 범죄단체 조직 혐의로 추가 기소할 가능성도 높다.

“성실한 학생”이라는 이유로 감형됐던 운영자

“오늘 아침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조주빈’이 뜨기에 ‘아, 오늘 재판이구나’ 생각했어요. 재판부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관심도 갖지 않았어요. (검찰이 구형했던) 무기징역은 안 나올 것 같았거든요. 예상한 정도로 나온 것 같아요.”

이날 재판 결과가 나온 뒤 박사방 피해자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조주빈이 항소하지 않을까요?”

관심과 연대가 이어지지 않으면 ‘문제적 판결’은 또 나온다. 8천여 명이 참여한 텔레그램 성착취방을 운영했던 한 관리자는 1심에서 징역 1년2개월을 선고받았으나, 2020년 7월 판결이 선고된 2심에서는 징역 10개월로 감형됐다. 그는 ‘자신의 영상을 삭제해달라’고 애원하는 피해자에게 조롱하는 메시지를 보낸 인물이다. 2심 재판부는 감형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고등학교 3년간 질병으로 인한 지각 1회와 조퇴 2회 이외에 무단결석 없이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했고, 교내활동에 성실히 참여했으며 비행을 저지른 바 없다. 대학 졸업 후 마트 직원으로 성실하게 노력한 끝에 정식 직원이 됐다.” 대중과 언론의 무관심 속에 2심의 징역 10개월은 최종 확정됐다.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조주빈 재판도 이제 막 1심이 끝났을 뿐이다. 조주빈이 징역 40년을 선고받은 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며 이렇게 밝혔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