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너머n] 추적단 불꽃의 n번방 추적기

n번방 최초 보도 그 후를 기록한 ‘추적단 불꽃’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등록 2020-09-26 01:06 수정 2020-09-28 01:53
‘추적단 불꽃’이 성착취 텔레그램 대화방 100개에서 목격한 내용을 담은 책을 냈다. ‘불꽃’은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한다. 박승화 기자

‘추적단 불꽃’이 성착취 텔레그램 대화방 100개에서 목격한 내용을 담은 책을 냈다. ‘불꽃’은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한다. 박승화 기자

한 여성과 다른 한 여성이 만나 ‘우리’를 만들었다. 그 ‘우리’는 또 다른 ‘우리’를 만나 더 큰 ‘우리’가 됐다. 수많은 우리의 연대체는 목소리를 모은다. 엔(n)번방을 본 너희도 공범이라고, 피해자는 죄가 없다고, 그리고 ‘우리’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결국 ‘우리’는 디지털성착취가 일상화한 세상을 바꿔내고 있다. 불법 성적 촬영물을 보기만 해도 처벌할 수 있는 법 개정을 이끌었고, 사법부가 디지털성범죄의 양형기준을 강화하도록 했다.

이 시작점에 20대 여성 두 명이 있다. 텔레그램 내에서 벌어지던 성착취의 최초 신고자이자 최초 기록자, ‘추적단 불꽃’(불꽃)이다. 대학생이던 ‘불꽃’이 2019년 9월 탐사보도 공모전에 낸 기사는 텔레그램 n번방을 세상에 드러낸 첫 보도였다. 그 뒤 1년, 그동안의 일을 320쪽짜리 책으로 엮었다. 책 제목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불’과 ‘단’이라는 활동명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두 사람이기도 하고 연대하는 모든 여성이기도 하다.

조주빈과 문형욱의 실명을 실었을 때의 통쾌함

“n번방을 가장 오래 추적해온 사람으로서, 언론의 단발성 보도로는 (n번방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긴 호흡으로 디지털성범죄의 실태를 알리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불) “일상을 살기 위해 애써 (추적 당시 목격한) 힘든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덮이지 않았다. 책으로 정리하면 마음도 정리될 것 같았다.”(단)

9월18일 오후 서울시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난 불과 단이 밝힌 책을 쓴 계기는 각자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공통의 목적은 있었다. 텔레그램 대화방 100개에서 목격한 것을 기록하는 일.

책은 3부로 구성됐다. 1부에 n번방 추적기, 2부에 불과 단의 이야기를 담았다. 3부에선 ‘박사’(조주빈) 검거 이후 불꽃의 활동과 디지털성착취를 뿌리 뽑기 위해 고쳐야 할 것을 짚었다. 1부에선 텔레그램 성착취 구조가 한눈에 그려져 각 성착취 방들을 연결지을 수 있다. 범행의 치밀함과 끔찍함에 마음이 힘겨워지지만, 이내 ‘불꽃’이 추적하고 많은 사람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며 혼자만의 싸움이 아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온다. 2부에선 불과 단이 만나 불꽃이 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3부에는 “우리가 달려온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와 연대하는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단)

4개월 동안 매주 원고지 15장씩 써서 출판사에 보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언론사와 인터뷰하고, 지역으로 강연을 가고, 정부 부처 관계자를 만나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연대를 호소하는 시간을 쪼개가며 책을 썼다. 그렇게 다시 들여다본 과거 채증 자료를 보고 복기하던 “어떤 날은 괴로워서 노트북을 덮었”(7쪽)지만 “많은 이가 ‘우리’와 함께 동행할 용기를 가지길 바라는 마음”(불, 단)으로 견뎌냈다.

힘든 마음으로 책을 쓰면서 속 시원한 순간도 있었다. “책에 조주빈(박사)과 문형욱(갓갓)의 실명을 그대로 실었을 때 통쾌했다.”(단) 경찰은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과 n번방의 시초 문형욱의 신상정보를 지난 3월과 5월 각각 공개했다.

불과 단이 마지막까지 고심한 것은 2차

피해였다. 책에 실린 ‘채증 사진’을 열 번도 넘게 확인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 얼굴을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모자이크 처리를 했는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또 ‘성착취물’이 아닌 ‘음란물’로 표기되지 않았는지, ‘불법촬영’이 아닌 ‘몰카’로 쓰인 건 아닌지도 교차 확인했다.

피해자도 우리를 돕는다

이날 인터뷰하면서도 단은 “음란물이란 단어가 책에 실리지 않았을지” 걱정했다. “우리가 말을 전할 때 피해자분들에게 상처 되는 부분이 없도록 신경 썼다.”(불) 이런 이유로 책에 언급된 피해자들에게는 피해자 이야기를 책에 실어도 되는지 일일이 허락받았다. “피해자들은 도움이 된다면 다 괜찮다고 말해준다. 최근 우리가 연대한 한 피해자가 무지개 사진을 보내주며 ‘활동하는 게 힘들 텐데 힘내라’고도 했다. 우리만 그들을 돕는 게 아니라 피해자도 우리를 돕는다.”(불)

책의 추천사는 25명이 썼다. 여성학자 권김현영부터 소설가 김초엽, 영화감독 이경미, 경기대 교수 이수정, 디지털성범죄 근절을 목표로 한 단체 ‘리셋’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이름을 올렸다. 불은 나란히 활동하는 리셋이 쓴 추천사가 마음에 남는다. “불과 단이 만나 추적단 불꽃이 되었듯, 다른 배경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위치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이 동일한 의제를 위해 싸우는 서로를 만나게 된다면 그 자리에는 눈부시게 타오르는 불꽃이 피어나리라.” 단은 “본 것을 봤다고 끈기 있게 말하는 일에 변화의 힘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르포르타주”라는 은유 작가의 추천사를 첫손에 꼽았다. “2019년 7월 처음 목격했던 n번방, 그 뒤 와치맨, 로리대장태범, 박사가 잡혔을 때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추적은 연대’라고 생각하는 불꽃은 이제 자신들을 대학생 기자단이 아닌 아웃리처(봉사·지원 활동하는 사람)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디지털성착취 실태를 고발하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일을 불은 단과, 단은 불과 함께해 다행이라고 했다. 불이 말했다. “처음엔 우리만 텔레그램 n번방의 실태를 알고 있어서 이를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압박감이 심했는데, 이제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아져서 안도감이 생겼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읽었으면

어떤 사람이 책을 읽기 바랄까. 불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 단은 “10대”라고 답했다. “특히 10대 남성이 읽었으면 좋겠다. 최근에도 ‘지인능욕’(지인의 사진에 성적인 내용을 합성)을 한 10대 남학생이 온라인에 고발되기도 했다. 제2의 n번방을 만든 로리대장태범도 10대였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디지털성범죄는) 인권침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단)

3부에는 불꽃을 “멘붕”에 빠뜨렸던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성범죄를 다루는 기사 보도가 예고됐다. “포털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디지털성착취에 관련한 기사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 보도 시기를 보고 있다”(불, 단)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고애신(김태리)은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라는 유진(이병헌)의 말에 이렇게 말한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이를 최고 장면으로 꼽는 불꽃은 다짐했다. “불꽃은 불씨가 있다면 사그라지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를 수도 있다. 우리도 그러겠다.”(불)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