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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 성폭력 피해자 보호, 재판부 ‘입맛대로’

피해자 변호사 조력 늘었지만, 재판 과정서 여전히 2차 피해 발생
등록 2020-08-10 12:03 수정 2020-08-14 01:12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여성들이 모인 단체인 ‘리셋’에서 활동하는 임우정 작가가 앞으로 ‘끝장 프로젝트 너머n’의 일러스트를 그립니다.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여성들이 모인 단체인 ‘리셋’에서 활동하는 임우정 작가가 앞으로 ‘끝장 프로젝트 너머n’의 일러스트를 그립니다.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피해자 변호사, 나오셨습니까? 불출석하셨군요. 다음 기일 영상 재생 등과 관련된 증거조사를 할 예정인데, 민감한 문제이다보니 재판부에서 그 방법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싶은데요. 현재는 ‘비공개+법정재생’의 형태 정도만 떠오르거든요. 이 부분 검사님이나 재판부에서 확인해 다음 기일 증거조사 과정에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6월22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진행된 피고인 신아무개(승려 ‘흑통령’), 전아무개(‘와치맨’)의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성폭력 사건의 1심 재판 때 재판부가 피해자 변호사를 찾으며 이렇게 말했다. 영상 재생 등 디지털성폭력 재판의 증거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쪽 의견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예전에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

증인 지원 절차도 재판부 따라 달리 적용

피해자 쪽 법률 대리를 맡는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피해자가 증인신문을 할 때 동석하는 정도로만 활동해왔다. 변호사가 재판 중 개입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데다 재판부도 피해자 변호사의 의견을 재판 과정에서 확인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증인신문을 할 때는 성폭력 피해자를 특별증인지원 대상자로 규정해 다양한 지원을 하지만, 그 밖의 증거조사 과정에서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피해자가 참여하는 설문조사에서도 피해자 변호사의 역할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이 많은데, 한정적인 역할에서 비롯됐다.

최근에는 변화 조짐이 보인다. 디지털성폭력 재판에서 재판부가 피해자 변호사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형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변호사의 실질적 조력이 가능하도록 해달라는 오래된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재판부 내부의 자성에 기인한다기보다 디지털성폭력 재판에 외부 관심이 높아지고, 증거조사 방법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 재판 감시가 강화된 영향이다. 여전히 한국 형사재판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2010년 성폭력 재판에서 피해자 증인신문을 끝낸 한 피해자가 재판부의 신문 내용이 모멸적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했다. 해당 재판부는 증인신문 과정에서 확인해야 할 지점이었다고 변명하면서 가해자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뒤늦게 한국 법원은 여러 증인 지원 절차를 마련해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이마저 재판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탓에 피해자의 의사와 어긋나거나 2차 피해 사례가 생겨난다.

차폐막 두고 피고인 헛기침 속 피해자 진술

현재 마련된 지원 절차로는 △증인지원관 동행 △비공개 심리 △피고인과의 접촉 차단 △신뢰관계인 동석 △재판 결과 통지 등이 있다. 그러나 증인지원관 동행은 증인지원관실에 피해자가 도착했을 때나 가능하다. 증인지원관실에 도착하기 전이나 후에는 별다른 보호장치가 없다. 피해자의 사생활 보호 등을 내세워 검사나 피해자 쪽이 비공개 심리를 원하기도 하지만, 피해자의 상황이나 연대 지지 기반 유무에 따라 공개 심리를 피해자가 요구하기도 한다. 이 경우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예컨대 7월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성폭력 사건을 재판 모니터링 활동가들이 다 함께 재판 방청을 했을 때 발생한 일이다. 당시 증인신문이 예정된 피해자는 다수의 여성 방청객을 보고는 재판을 공개심리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사생활 보호’를 내세워 피해자의 요구를 묵살했다. 실제 외부 감시가 없는 비공개 심리 과정에서 피해자가 추가 피해에 노출되는 일이 너무 많다. 피해자 보호에 무관심한 검사, 재판 과정에서 직접 개입이 허용되지 않는 피해자 변호사, 피고인 방어권을 내세워 소송 지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재판부 사이에서 피해자가 방치되는 일은 흔하다.

피고인과의 접촉 차단도 재판부마다 완전히 다르게 운영한다. 피해자들은 피고인 퇴정 등 공간 분리를 대부분 요구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재판 참여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같은 공간에 차폐막만을 쳐놓고 피해자 증인신문을 강행한다.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이윤택 전 연출가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에서 차폐막 너머에서 피고인이 헛기침하거나 차폐막을 발로 차며 피해자에게 위압감을 주는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신뢰관계인 동석의 경우 피해자 변호사 외에 한 명 정도 더 허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재판부에 따라 불허하기도 한다. 게다가 동석하더라도 피해자의 대각선 뒤쪽 혹은 방청석에 앉아야 해서 피해자는 증인석에서 홀로 신문 과정을 견뎌야 한다. 피해자 변호사만이라도 피해자 바로 옆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이를 허가하는 재판부는 찾기 어렵다.

대형 화면에서 피해 영상·사진 재생

디지털성폭력 재판에선 영상·사진 등을 법정에서 확인하는 증거조사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진다. 증인신문 때 큰 스크린에서 영상·사진 등을 재생하는데, 비공개 심리라고 하더라도 법정에는 피고인은 물론 교정기관 관계자 등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다수의 남성이 둘러싼 그곳에서 큰 화면으로 피해 영상·사진을 보며 증인신문을 해야 하는 상황에 피해자가 내몰린다. 일반적인 증거조사에선 방청객이 있는 법정에서도 영상·사진이 큰 스크린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재생된다. 증거의 재생 방법과 확인 범위 등에 대한 규정이 없다보니 재판부 재량에 맡겨진 탓이다.

4월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 일당들의 재판이 시작될 무렵,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 아동·청소년 대상의 성착취 사건 재판에서 법정 내 방청객이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영상·사진이 재생됐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해당 재판부와 공판검사를 찾아봤다. 알고 보니 그 재판부와 공판검사는 현재 조주빈을 비롯한 디지털성범죄 재판을 맡으며, 증거조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고뇌하는 재판부로 언론에 소개되고 있었다. 외부 감시 유무에 따라 달라지는 게 한국 재판부의 현주소다.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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