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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의 갈림길-박원순 전후, 그리고 사후

시민운동가 출신 시장의 탄생으로 시민사회 의제가 주류로,
386 네트워크를 넘어 달라진 시민운동 방식을
등록 2020-07-18 05:14 수정 2020-07-20 00:51
1998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재판 승소 축하연. 맨 왼쪽이 당시 피해자를 변호했던 박원순 변호사. 한겨레 자료

1998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재판 승소 축하연. 맨 왼쪽이 당시 피해자를 변호했던 박원순 변호사. 한겨레 자료

인권변호사 6년, 시민운동가 16년, 서울시장 9년. 그의 역사는 한국 사회에서 인권이란 말이 제 이름값을 찾아가는 역사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시민운동의 길이기도 했다. 변호사 박원순은 고통받는 이들을 변호했고, 시민운동가 박원순은 고통받는 이들의 호소를 사회 의제로 다듬었다. 행정가이자 정치가인 박원순은 의제를 정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산으로 올라간 7월9일, 모든 것은 ‘과거형’이 돼버렸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슬픔은 ‘성추행 의혹’이라는 길목에서 분노와 좌절, 무기력을 마주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을 변론하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불법으로 가장 먼저 제기하고, 서울시 성평등 정책을 공들여 만들었던 그가 성추행 혐의로 피소당하는 역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공소권 없음’이라는 다섯 글자만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초현실적 시간 속에 ‘자살생존자’로 남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애도와 진실규명, 성찰 사이에서 갈등하고, 반목한다.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 박원순의 역사는 빛이 바랬지만, 그가 실천해온 가치와 철학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간이다.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를 변호하는 것. 고통의 호소를 의제로, 정책으로 만들어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 남겨진 우리가 그와 온전히 작별하기 위해 직시해야 할 과제다. “그는 갔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슬픔을 딛고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살아남아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하지 않는가.”(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박 시장의 글, 책 <박원순이 걷는 길>, 임대식 지음, 2015)_ 편집자 주

그때도 산으로 갔다. 그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를 묻기 위해 백두대간을 올랐다.1 지리산에서 설악산으로 한 걸음씩 내딛기를 41일째, 결국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이명박 정권과 오세훈 서울 시정의 반민주적이고 반민생적인 정책으로 뒷걸음치던 시대를 “그대로 보고 두지 말라는 내면의 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2고 했다.

종주 49일 만인 2011년 9월5일, 산을 내려온 박원순은 거침없이 정치의 길로 나아갔다. 당장 51일 뒤 무상급식 도입을 거부한 오세훈 시장의 사퇴로 치러지는 재보궐선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원순은 즉각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만나 양보(9월6일)를 받은 뒤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 박영선 민주당 의원(10월3일), 본선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10월26일)을 차례로 이기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훗날 “어쩌면 내 인생은 백두대간 종주 이전과 이후로 삶을 나눠야 할지도 모르겠다”3고 스스로 말했듯이, 이때 시민운동가 박원순은 단번에 정치인 박원순으로 변신했다.

‘2000년 총선 시민연대’가 서울 중구 태평로 언론회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2000년 총선 시민연대’가 서울 중구 태평로 언론회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꿈이 과로사” “시민단체는 내 맘”

인권변호사 6년, 시민운동가 16년, 서울시장 9년. 2020년 7월9일, 또다시 산에 올라 스스로 삶을 끝내는 선택을 하기까지 박원순은 시민운동가로 가장 오래 살았다. 처음엔 ‘법’으로 독재정권으로부터 자유, 인권, 정의를 쟁취하려 했다. 1982년 검사 임용 1년 만에 사직서를 낸 뒤 1985~1991년 대표적 인권변호사인 조영래 변호사 등과 함께 구로동맹파업 사건(1985년), 부산 미문화원 점거 사건(1985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1986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등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로도 새 시대가 열리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1991~1993년 영국·미국 유학을 떠났다.

연구와 고민의 결론은 시민운동이었다. “결국 그 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 것인가는 구성원의 노력과 결단과 참여와 실천에 있다는 생각”4으로 1994년 주도적으로 참여연대를 만들고 ‘종합적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여성단체연합(1987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1989년) 등 기존 민중운동, 학생운동과는 다른 대중적 시민운동단체들이 생겨났으나 다양한 시민 의제를 포괄하는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는 없었다고 박원순을 포함한 창립멤버들은 판단했다.5

“서른아홉 살부터 마흔여섯 살까지. (중략)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기”6인 참여연대 사무처장 시절, 박원순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운동(1994년), 소액주주운동(1996년), 정보공개운동(1998년), 낙천·낙선운동(2000년) 등을 이끌었다. 이후 ‘1% 나눔운동’을 편 아름다운재단(2000년)과 독립 민간연구소를 표방한 희망제작소(2006년)도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의 물적 토대와 상상력의 원천을 고민하던 박원순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물론 “꿈이 과로사”7일 정도로 일 욕심이 많고 “시민단체는 내 맘”8이라며 다소 독단적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박원순 곁에는 함께 고생한 많은 활동가가 있었다.

시민운동가 출신 시장의 탄생으로 비주류였던 시민사회 의제는 주류가 됐다. “시민운동가로 인생을 마치겠다”9는 오랜 집념처럼 박원순은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 도시재생, 비정규직 정규직화, 마을 만들기, 사회적기업 육성, 복지기준선 마련, 원전 하나 줄이기, 공유도시 등 진보적 의제, 생활 의제를 정책으로 현실화시켰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약력

박원순 전 서울시장 약력


개방형 공무원, 민관 협치 거버넌스

권력을 감시·견제하던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대안을 제시·집행하는 행정가로 변신했다. 비서진 같은 별정직 공무원, 다양한 직위의 개방형 공무원들이 활동가 출신으로 채워졌다. 또 활동가나 일반 시민이 공무원이 되지 않더라도, 시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민관 협치 거버넌스(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다스림)의 대표적 통로는 각종 위원회다. 서울시 산하 위원회는 2011년 103개에서 2019년 217개로 두 배 늘었다. 이뿐만 아니라 위원회의 숙의와 협의를 통해 도출된 결론을 구체화하는 중간 지원 조직과 민간 네트워크 조직은 물론 시청의 공식 부서도 많아졌다.

예컨대 일반 청년이나 청년 활동가는 청년위원회에 전문가로 또는 민간 청년정책네트워크에 당사자로 참여해 청년 정책 의제 발굴과 예산 집행에 협력할 수 있었다. 아예 청년청으로 들어가 개방형 공무원으로 청년 정책을 집행할 수도 있다. 또 시민단체에 우회적 재정 지원도 많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행정에서 집행해야 할 단순 업무, 즉 조사나 검사 등을 시민단체를 포함한 민간에 위탁하는 일이 (박원순 시정에서) 많이 확장됐다”고 했다.

그 결과 박원순 시정이 관심을 두던 청년, 주거, 환경, 동물권 등의 분야 시민운동가들은 ‘박원순 시장의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다르게 느낀다. 서울시의 한 위원회에 참여했던 30대 활동가 ㄱ씨는 “‘안 된다’고 말하는 공무원에게 박원순 시장은 ‘당신이 ○○○보다 이 일에 대해서 더 많이 아냐’며 활동가를 전문가로 승격시켜주고 권위를 부여해주는 언어를 썼다”며 “불균형한 (공무원과 활동가의) 권력을 뒤집어주었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30대 활동가는 “지금 서울시정은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가 안 되면 안 굴러갈 정도로 시민단체들이 위원회 등에 다 들어가 함께 정책 결정을 하고 있다”며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다 있지만 (민간위탁 방식으로) NGO(비정부기구)들이 서울시의 각종 활동에 참여해 시민사회 역량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선거 다음날인 10월27일 시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선거 다음날인 10월27일 시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시민활동가들의 두려움, 좌절감, 낭패감

지난 9년간 시민사회가 시정의 행정·정치 파트너로 영역을 넓혀온 만큼, 박원순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도 크다. “시민운동가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중략) 이슬만 먹어야 된다면 기꺼이 먹어야 한다”10며 높은 도덕성을 강조해온 박원순이 동료를 성추행한 혐의로 피소된데다 진실을 묻은 채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원순이 시장이 된 뒤인 2010년대 이후 시민운동을 본격화한 젊은 활동가들은 ‘박원순 죽음’보다 ‘성추행 의혹’에 대해 분노와 좌절을 넘어 무기력함을 느낀다. 40대 남성 활동가 ㄷ씨는 “박원순이 롤모델인 적은 없으나 상징적 시민활동가로서 (자기 관리에) 철두철미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훨씬 충격적”이라며 “박원순 같은 사람도 권력이 생기면 자기가 살아온 가치를 배반하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고 생각하니 두려움, 좌절감, 낭패감이 든다”고 했다.

젊은 활동가들의 배신감은 박원순이 죽음에 이른 과정의 진실을 외면하는 듯한 ‘박원순 동지’ ‘386세대’로도 향한다. 20대 여성 활동가 ㄹ씨는 “내 또래들은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변론으로) ‘누구보다 권력이 개입한 성폭력의 문제를 먼저 인지한 사람마저도 이러는구나’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다. 반면 선배 (시민운동) 그룹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가 굉장히 소수인 것만 같다. 피해자와 연대한 장혜영·류호정 정의당 의원 때문에 당원들이 탈당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무기력하고 외롭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분노와 비판의 에너지를 ‘박원순 세대 퇴장 후’를 고민하는 데 쏟으려는 활동가도 많다. 서울시 위원회에도 참여했던 30대 활동가 ㅁ씨는 “우리도 지금까지 386 네트워크에 숟가락을 얹어 일해왔고 그런 통로를 통해 권력에 쉽게 접근해 어젠다를 주장해왔다”며 “이제 (시민사회에서) 우리 지분을 우리가 늘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조급함이 생겼다”고 했다.

박원순 죽음 전에도, 이미 행정·정치 권력이 된 ‘시민운동 1세대’를 넘어서려는 고민과 시도는 있었다. “강력한 의지를 가진 한 사람”(20대 활동가 ㅂ씨) 혹은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가 전면에 나서”(ㄱ씨) “강력한 운동권의 리더십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권력을 향해) 사회정치적 각을 세우는 주창형 운동”(ㅁ씨)으로는 시민들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를 채워나가는 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는 데 활동가들의 공감대가 컸다.

20대 활동가 ㄹ씨는 “시민사회운동 조직과 서울시가 대등한 위치가 되긴 했지만, 점점 사회운동이 하나의 서울시 사업이 되고, 시민 개인의 시정 참여를 운동조직이 지원하는 형태가 돼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았다”며 “시장 임기가 정해져 있으니 언젠가는 결별해야 하는데 그 시기가 (죽음으로) 조금 앞당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시장이 2018년 8월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 한달살이’를 하던 당시의 모습. 정용일 기자

박원순 시장이 2018년 8월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 한달살이’를 하던 당시의 모습. 정용일 기자


죽음이 없었더라도 사회 변화에 맞춰

이미 변화는 움텄다. 4~5년 전부터 젠더, 기후위기, 동물권 등 새로운 어젠다를 내건 시민단체와 활동가가 생겨나고 있다. 일부는 회원 지원을 받는 소수 활동가가 여러 사업을 주도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소규모 활동가 그룹이 직접 행동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인다.

이들 중에는 시민단체나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직업 활동가도 많지만, 학교나 직장에 다니면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른 시민들과 연대하는 비상근 활동가도 있다. “자연스러운 흐름 같다. 박원순의 비극적 죽음이 없었더라도, (운동은) 사회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으니까. 사회 변화에 따라 어떤 방식, 주제, 영역, 단체는 저물어가고 어느 곳에선 새로 시작한다.”(ㄷ씨) 지금 확실한 것은 ‘박원순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다는 사실이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1, 2, 3. <희망을 걷다>, 박원순, 2013
4, 6, 7, 10. <희망을 심다> 박원순·지승호, 2009
5. <사건으로 보는 시민운동사>, 차병직, 2014
8. <시민은 현명하다> 지승호·하승창·송호창, 2012
9. <나·들> 인터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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