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성폭력 피해를 입고 즉시 신고하지 못한 채 경찰서 앞에서 되돌아선 한 여성이 있었다.
피해자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신고를 포기하고 물증을 확보하지 않은 채 망각하려 애쓰던 그때. 이어지는 추가 가해 때문에 뒤늦게 가해자를 경찰에 고소했지만 경제적 여유도, 지지나 연대 기반도 없었던 그 여성. 가해자가 인터넷 커뮤니티 구성원과 함께 “끈질기다, 예민하다, 미쳤다, 꽃뱀이다, 마녀다” 추가 가해해도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수차례 조사 끝에 가해자를 ‘불구속 기소’했다.
그는 매 공판 방청석 맨 앞줄에서 재판을 지켜봤다. 공판 내용을 기록하고, 가해자 주장에 반박하는 자료와 엄벌을 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피고인 쪽 변호인 신문에 맞섰다. “어떻게 피해자가 그렇게 명확하게 기억하냐”는 얘기를 들었다. 그저 또 버텼다. 그의 곁에는 그밖에 없었다.
‘그때 내 곁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연대를 결심했다. 트위터에 그때의 얘기를 시작하자, 피해자들이 연락해왔다. 아는 정보를 전달하다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하고, 수사·재판에 필요한 문서를 작성해 함께 전략을 짰다. 사법시스템과 언론에 대한 비판을 트위터에 적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마녀’라는 이름의 개인 활동가가 됐다. 2019년 12월엔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이 그를 초대해 이야기를 청했다. 판사가 법정 밖에서 피해 당사자이자 익명의 활동가를 만나는 건 이례적이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한다. <한겨레21>은 마녀의 방청기를 포함해 전국의 디지털성폭력 재판을 기록해 부정기로 싣는다. _편집자
*2019년 12월31일 마녀 트위트 일부 인용
“피고인 배○○을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에 처한다. 피고인 류○○를 징역 7년에 처한다.”
6월5일 오후 2시께 춘천지법 제101호 법정에서 열린 활동명 ‘로리대장태범’ 배아무개(19)씨와 그 공범 ‘슬픈고양이’ 류아무개(20)씨의 선고 공판. 재판장이 주문을 읊자 피고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진 공범 ‘서머스비’ 김아무개(20)씨의 선고 공판에서도 징역 8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방청석에서는 짧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성폭력 사건’의 실질적인 첫 번째 판결에서 검찰의 구형과 동일하거나 근접한 중형이 선고된 것이다. 그간 온정적 판결로 디지털성범죄를 양산해왔다는 비판을 받던 한국 사법부가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
공소사실 모두 인정하고 ‘읍소’ 전략 택했지만…
‘제2의 엔(n)번방’ 혹은 ‘프로젝트엔(n)’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배씨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진행된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성폭력 사건’이다. ‘피해자 개인정보를 캐내기 위한 피싱 사이트 제작·운영→ 범행 표적인 피해자에게 해당 사이트 링크 전송→ 개인정보 탈취→ 협박 및 추가 성폭력→ 성착취물 제작·공유·유포’ 등이 주범과 공범의 역할 분담과 상호 협조로 이뤄졌다. 집단 디지털성범죄의 정형이지만 이들이 기소된 것은 2019년 12월. 아직 ‘n번방 사건’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전이라 수사 단계에서 신상 공개를 피해갔고, 형사재판 진행 여부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혐의를 일부 부인하던 배씨는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자 공소사실 모두를 인정하며 읍소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혐의 모두를 인정하고 ‘어린 나이’와 ‘전과 없음’을 내세우는 방식은 그간 무수히 봐온 가해자들의 전략이다. 물증 확보가 쉬운 디지털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는 반성문을 제출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고 특정 가능한 피해자와 협의하려 애쓴다. 이에 성공하면 대부분의 피고인이 선처를 받게 된다. 입증 부담에서 벗어난 검찰은 피고인신문 등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재판부 역시 재판을 편하게 마무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로리대장태범 배씨에 대한 판결은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성폭력 사건’이 공론화한 뒤 내려진, 실질적인 첫 번째 판결이기에 그 과정과 결과가 모두 중요했다. ‘n번방은 (솜방망이) 판결을 먹고 자랐다’는 비판에 직면한 사법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관심이 집중됐다. 춘천지법의 1심 판결은 이어질 다른 재판에 의미 있는 비교 기준이 될 터였다.
검찰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검찰은 재판 도중 배씨의 공소장을 변경해 적용 법조를 추가했고, 공소사실 모두를 피고인들이 인정했음에도 피고인신문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재판부가 “피고인신문은 보충적 절차다. 검찰 측이 특별히 추가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는데도 검찰은 “양형과 관련해 중요하다”고 신문 강행 의사를 밝혔다. 이어 검찰은 피고인 배씨를 비롯한 해당 사건의 피고인 모두에게 재범의 위험성이 높다며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명령 청구’까지 했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다. 형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으므로.
‘켈리’ 항소 포기했던 검찰, 이번엔 최고형 구형
춘천지검은 앞서 ‘켈리’(신아무개씨·32)를 선처한 전적이 있다. 켈리는 ‘갓갓’ 문형욱(24)에게 ‘n번방’을 물려받아 각종 성착취·성폭력 영상물을 공유·유포한 성범죄자다. 그런데 검찰은 1심에서 신씨에게 ‘수사에 협조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징역 2년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하지 않고, 신씨만 항소했다가 포기해 형이 그대로 확정됐다. 검찰의 항소가 없으면 피고인이 항소심에서 1심보다 중한 형으로 처벌받지 않는 ‘불이익변경 금지의 원칙’을 검찰이 몰랐을 리 없다.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가벼운 처벌에는 검찰의 무책임, 무능함도 한몫한다. 형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지만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건 그 입증 과정이 아니라 결과인 판결뿐이다. 검찰은 항상 판사 뒤에 숨어 있다.
5월28일 오후 2시 결심공판 현장. 검찰은 피고인들에게 법정 최고형 등을 구형하며 이렇게 밝혔다.
“이 사건이 일반적인 성범죄와는 달리 치밀하게 조직된 계획범죄이고, 아직 아동·청소년에 불과한 어린 피해자들이 수사기관 출석조차 거부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므로 일벌백계의 차원에서라도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합니다.”
피고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며 선처를 요구했다. 피고인 배씨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피고인 류씨는 성착취물의 직접 제작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장래가 촉망되는 대학생으로 자신의 기술을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피고인들 모두 재판부를 향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 했다. 이제껏 유사 사건의 판결문에 적시된, 선처받았던 내용을 그대로 법정에서 구현하는 형태의 최후변론이자 최후진술이었다. 그에 비해 피해자 목소리는 제대로 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심공판 전날에야 피해자 일부와 연결된 n번방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소속 변호사가 위임장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판결문에 빠진 단어 ‘반성’ ‘어린 나이’
검찰 구형의 절반만 나와도 성공한 것이라던 세간의 판단을 뒤집는 1심 선고 결과. 재판부는 검찰의 구형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경우 ‘범죄단체조직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범죄단체조직죄(형법 제114조)는 사형이나 무기징역, 4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목적으로 한 단체를 조직할 때 성립하는데, 이 죄가 인정되면 피고인들을 더 중한 형에 처할 수 있다. 다만 재판부는 이들이 공모해 범행에 이른 것으로 판단했다. 범행에 대한 고의, 공모 관계와 기능적 행위 지배 모두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성착취물 제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범행 특성상 치밀하게 조직된 계획범죄라고 판단했다.
피고인 세 명에 대한 양형 이유 중 ‘유리한 사정’을 보면 재판부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피고인들 나이는 ‘소년법’의 적용을 받는 주범 배씨 외에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울러 피고인과 그 가족들의 반성문과 탄원서도 반영되지 않았다. ‘진지한 반성’ ‘사회적 유대관계’ 등은 성범죄 피고인을 전문 변호하는 법무법인이 선처를 받아내기 위한 요건으로 광고하는 내용이자 최근까지 여러 판결에서 반영되던 부분인데, 이번 판결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신상 공개 대상이 아닌 미성년자 피고인 배씨에게는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10년을 명했고, 성인인 피고인 류씨와 김씨의 경우 재범 가능성이 낮다며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명령 청구’는 기각했지만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신상정보의 공개 및 고지 5년을 명했다. 또한 모든 피고인에게 각 기관 취업 제한 10년을 명하는 등 성범죄자들이 출소 뒤에도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한 점은, 이제껏 전자발찌 부착, 신상 공개, 취업 제한 등을 기각하면서 성범죄자의 사회 복귀를 용이하게 해주었던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피해자에게 어떤 방법으로도 접근하거나 연락하지 않도록 준수 사항을 덧붙였다는 점에서 재판부가 고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아쉬운 지점은 몰수 이후 추가 피해를 막으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해 재판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조처 등이 이어지지 않고 단순히 접근 금지가 명해졌다는 것이다.
대구고법에선 ‘갓갓’ 공범에게 집행유예
춘천지법의 판결은 1심, 즉 하급심 판결이다.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성폭력 사건’에 가담한 가해자들을 단죄할 재판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한국 사법부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6월10일 ‘대구고법’에서 문형욱(‘갓갓’)의 공범들에 대한 2심 선고가 있었다. 해당 재판을 직접 방청한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eNd)팀의 방청기에 따르면, 20대 남성인 피고인 신아무개씨에게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피고인의 부모가 피해자 부모에게 오랜 기간 용서를 구하고자 노력했으며, 피고인의 나이가 젊고, 피고인의 가족과 지인들이 선처를 구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고 한다. 1심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와도 2심, 3심에서 대구고법처럼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한다면 ‘단죄’는 요원해질 수 있다. 그러니 재판을 모니터링해 더 감시하고 기록하며 알려야 한다.
올 한 해 전국을 돌며 ‘텔레그램 성착취·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여러 성범죄 재판을 모니터링하고, 일반인 대상의 교육을 이어나갈 것이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자를 위한 매뉴얼과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려 한다. 그래야 사법시스템에 대한 ‘감시·기록·목격’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고, 공개재판주의가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 이렇게 전국 각 법원의 방청석에서 ‘우리’가 재판을 지켜볼 것이다.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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