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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불안 속에 여성들의 1년이 흘렀다

낙태죄 헌법 불합치 1년, 올해 말까지 법 개정해야 하지만 ‘미적’

제1309호
등록 : 2020-04-17 14:53 수정 : 2020-05-0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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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회원들이 2019년 4월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약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사흘 동안 드세요. 처음 약을 먹으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할 거고, 마지막 약을 먹으면 진짜 아플 거예요. 하혈이 시작되면서 소변을 볼 때 덩어리 형태의 아기집이 떨어져나올 겁니다.”

30대 여성 이은주(가명)씨는 지난해 10월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게 됐다. 출산도 결혼도 계획에 없던 이씨는, 임신중지를 결심했다.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해외 출장을 앞둔 상황.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간단히’ 끝내고 싶었다. 카카오톡에서 유산 유도약 ‘미프진’을 판다는 판매업자를 접촉했다.

그는 65만원에 미프진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복용 방법은 간단했다. “인터넷에서 거래되는 미프진이 정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건 알아요. 부작용이 걱정됐지만, 어차피 다른 나라에선 미프진이 합법이라고 하니까 ‘설마 가짜겠어’라는 마음이 컸어요.” 이씨 앞에 놓인 선택지는 판매업자 말을 믿는 것뿐이었다.

SNS에서 구한 정체 모를 유산 유도약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심한 복통만 느껴질 뿐 ‘낙태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소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색 덩어리만 배출됐다. 임신중지에 성공한 건지 불안한 마음에 다시 판매업자에게 말을 걸었다. 판매업자는 시큰둥하게 답변했다. “아마 낙태됐을 거예요. 정 불안하면 산부인과에 가보세요.” 병원과 수술을 피하고 싶어 미프진을 찾았던 이씨는 결국 산부인과를 수소문해 임신중절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난해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조항(제269조 1항, 제270조 1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며 관련 법을 2020년 12월31일까지 개정하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건만, 변한 건 없다. 법을 재정비해야 할 국회는 뒷짐만 지고, 정부 부처는 이런 국회에 책임을 돌린다. 불법에 기대어 법 공백 상태를 견뎌내야 하는 건 여전히 여성 몫이다.

낙태죄는 형법의 처벌 조항이며, 모자보건법에 이 처벌을 피하는 사유가 들어가 있다. 태생 자체가 ‘처벌’을 위한 법 규정이다.

지난해 4월15일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형법·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의원 등은 형법상 ‘낙태죄’를 ‘부동의 인공임신중절죄’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했다. 낙태죄는 폐지하되, 임신 주수에 따라 임신중지 사유에 차등을 뒀다. 임신 14주 이내는 사유를 제한하지 않았고, 22주 이내는 태아의 건강상 우려에 더해 ‘사회·경제적 사유’를 추가했다. 22주 이상은 임신으로 여성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모체를 떠난 태아가 독자 생존할 수 있는 임신 22주 이내인 경우, 기간과 사유를 국회가 정해야 한다는 헌재의 헌법 불합치 의견과 14주 이내는 사유에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단순 위헌 의견을 고려했다는 게 이정미 의원실 쪽 설명이다.

그러나 헌재 결정보다 후퇴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성의 기본권을 지원하기보다 임신중지를 제약·제한하는 데 중점을 뒀다는 지적이다. 시민단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성명을 내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토·논의해야 할 문제인데, 단지 빠르게 ‘최초 발의’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또다시 제약하는 법안을 발의했다”고 비난했다.

4월16일 기자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통해 “정품 미프진을 판다”는 유산 유도약 판매 업체와 접촉해, 정품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대체 법안 1건뿐, 의원 10명 모으기도 ‘쩔쩔’

그마저도 1건이 전부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지만 추가 발의된 법안이 없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지난해 10월 임신중지 가능 사유에 ‘우생학적’ 사유를 삭제하는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제안했지만, 이는 ‘낙태죄 폐지’와 관련 없이 발의된 법안이라고 의원실은 설명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회의원 보좌진은 “이정미 의원실에 종교계의 항의 전화가 여러 건 걸려왔다고 한다. 낙태죄 폐지 찬성이든 반대든 시민단체 의견도 각양각색이라 나서기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의식해 찬반이 선명히 엇갈리는 법안을 발의하는 데 부담을 느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이정미 의원실은 법안을 발의하는 데 필요한 최소 인원(10명)을 모으는 일조차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낙태죄가 폐지된 뒤 관련 법과 건강보험, 의료진 재교육 등 관련 제도를 재정비하는 데 6개월이 걸린 아일랜드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박아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렇게 지적한다. “연말이 됐을 때 법안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때쯤엔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는 시스템과 매뉴얼, 의료인 교육·훈련이 다 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내년 1월1일부터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가 보장된다. 지금은 법제도 정비를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시기인데, 아직 논의의 장조차 열리지 않았다. 굉장히 큰 문제다.”

법적 진공상태에서 여성은 여전히 불법에 기대어 있다. 불법 유통되는 유산 유도약을 찾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헤매거나 수술이 가능한 산부인과를 수소문해 남몰래 수술받는다.

미프진 찾아 삼만리, 코로나에 배송길 막혀

“법이 바뀐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병원을 가도 ‘수술은 불법’이라며 안 해준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떤 사이트에서 미프진을 판다는데 이 사이트는 믿을 만할까요. 약물만으로도 정말 낙태가 가능할까요.”

시민단체 한국여성민우회에는 한 달에 많게는 서너 건의 임신중지 상담 전화가 걸려온다. 수화기 너머 여성의 질문은 헌재 결정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한국여성민우회 노새 활동가는 “질문 내용은 같은데, 내담자가 이전보다 더 당황스러워한다. ‘법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수술 가능한 병원은 없다. 어떻게 하냐’는 식이다. 낙태죄는 폐지됐다는데 믿을 만한 정보는 없고 병원에서 거절당하기 일쑤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받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고 말했다.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는 “법 공백 상황이다보니 의료진은 ‘걸면 걸릴 수 있다’는 생각에 보수적으로 진료하게 된다. 임신중지를 처벌하던 과거 법은 남아 있고 대체 법안은 없다면 진료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헌재 결정 이후 미프진 합법화 여론이 급물살을 탔지만, 미프진은 여전히 ‘무허가 의약품’이다. 미프진은 임신중지에 쓰이는 경구용 의약품인 미페프리스톤의 상품명으로,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해 67개국에서 팔고 있다. 여성들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정품 여부를 알 수 없는 알약에 건강을 내맡긴다.

대법원 도서관에서 ‘미프진’ ‘유산 유도약’으로 검색되는 판결문 21건을 살펴보니, “먹는 낙태약 미프진을 판다”며 카카오톡 아이디를 남기고, 이를 보고 연락한 여성에게 중국산 유산 유도약을 미국산인 양 판매·배송해 약사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가 여럿 나왔다. 종합비타민약을 유산 유도약이라 속여 18만원에 팔아넘긴 사례도 있었다.

이동근 약사(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정책팀장)는 “해당(유산 유도약) 약품이 미페프리스톤 성분은 맞는지, 지엠피(GMP·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 보증을 받은 생산시설에서 생산된 약품인지 알 방법이 없다. 자가복용이다보니 건강상태에 맞는 사용법이나 부작용시 대처법을 조언받을 수도 없다”고 우려했다. 임신중지를 지원하는 국외 단체 위민헬프위민(Women Help Women)을 통하거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불법 사이트라며 차단한 위민온웹(Women on Web)에 우회 접속해 유산 유도약을 사는 방법이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항공편이 결항돼 이마저도 배송이 중단되거나 지연되고 있다.

미소프로스톨 사용 확대라도 먼저

여성계는 정부에 ‘의료정책적 노력’이라도 다해달라고 호소한다. ‘미소프로스톨 사용 범위 확대’가 한 예다. 미소프로스톨은 미페프리스톤과 함께 임신중지에 쓰이는 약물로, 자궁 수축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미페프리스톤보다는 덜해도, 미소프로스톨만으로도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게 의료계 의견이다. 미소프로스톨은 미페프리스톤과 달리 위궤양 치료용으로 사용 허가가 나 있다. 가용한 약물이 있으나, 그조차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지 않는 데 여성계는 분노한다. 하지만 주무 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임신중지 방법을 수술로 국한한 모자보건법이 개정되지 않는 이상, 약물 도입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다. 나영정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기획운영위원은 “임신중지로 미소프로스톨의 사용 범위를 임신중지까지 확대하면 의료진도 합법적으로 임신중지에 약물을 처방할 수 있다. 일정 부분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데 합의했다면 더 안전한 방식으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 하는 건 복지이자,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의지의 문제다”라고 강조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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