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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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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이지 않은 인도적 체류 지위

국제 기준 한참 못 미치는 1년 체류 허가에도 “고맙다”는 예멘 난민들
등록 2018-09-22 09:14 수정 2020-05-02 19:29
난민신청자들이 9월14일 오전 제주시 용담동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1년간의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난민신청자들이 9월14일 오전 제주시 용담동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1년간의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너무 감사하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인간으로 머물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기가 최소 1년은 안전한 곳에서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한국과 제주도민 모두에게 감사하다.”

인도적 체류를 허락받은 모하메드(가명)는 9월20일 인터뷰에서 거듭 고맙다고 했다.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하 출입국청)은 9월14일 “난민심사 대상자인 481명 중 영·유아를 동반한 가족, 임신부, 미성년자, 부상자 등 23명에 대해 보호의 필요성이 높다고 보고 1차적으로 ‘인도적 체류 지위’를 부여한다”고 발표했다. 이들 23명은 앞으로 1년 동안 한국에 머물 수 있고,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다. 출도제한 조치도 해제돼 체류 기간에 제주도를 떠나 국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제주도는 나갈 수 있지만

예멘 내전을 피해 두 형이 있는 한국으로 왔지만 형제와 함께할 수 없었던 헤탄(제1218호 ‘전쟁 피해 왔더니… 더 전쟁 같은 제주살이’ 참조)은 드디어 형과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그는 경북의 한 도시에서 작은형 압둘라와 함께 살면서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사실을 전하는 형 압둘라의 목소리엔 기쁨이 녹아 있었다.

모하메드와 헤탄 형제는 이처럼 출입국청의 인도적 체류 지위 인정에 감사하고 기뻐했지만, 난민인권센터와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지부, 인권법 단체 등으로 구성된 난민네트워크는 ‘전혀 인도적이지 않은 인도적 체류 허가’라며 반발했다. 이들은 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한국 정부가 최소한의 조처만 했다고 지적했다.

출입국청은 “이들은 본국의 내전이나 후티 반군의 강제 징집을 피해 한국에 입국한 뒤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로, 난민협약과 난민법의 5대 박해 사유(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정치적 견해)에 해당되지 않아 난민 지위를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난민 불인정 이유를 밝혔다. 인도적 체류 허락 이유로는 “예멘의 심각한 내전 상황과 경유한 3국에서의 불안정한 체류, 체포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추방할 경우 생명과 신체의 자유를 침해당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난민네트워크는 “‘내전이나 강제 징집 피신’은 가장 전통적인 난민 보호 사유로 난민 지위 인정을 피할 근거가 될 수 없다. 출입국청의 심사 결과가 국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인도적 체류 허가는 이름처럼 인도적 결정이 아니다. 취업 허가만 줄 뿐 교육권, 건강권 등 모든 사회적 권리가 배제돼 있다”고 비판했다. 난민으로 보호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혜택이 없는 인도적 체류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난민네트워크가 지적하듯, 23명은 인도적 체류 지위를 얻었지만 그들의 삶은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1년간 한국에서 숨 쉴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것과 제주도를 나갈 수 있다는 것 두 가지만 달라졌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난민법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고(제31조),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른 기초생활을 보장받으며(제32조),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보장(제33조)받는다. 하지만 인도적 체류 지위는 일할 권리만 보장받는다.

부모의 동의 없이 일할 수 없는 미성년 예멘인은 인도적 체류를 허락받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은 23명 중 만 19살이 안 된 미성년자는 총 10명이다. 이 중 3명은 보호자 없이 입국했다.

여전한 내전, 불안한 체류

하산(가명)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출입국청이 지난 6월 두 차례 열었던 취업박람회에 갔지만 미성년자라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출도제한 조치가 풀린 뒤 그는 서울의 한 예멘인 친구 집으로 무작정 왔지만 여전히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하산은 “한글과 영어를 공부해서 나중에는 취업하고 싶다. 돈을 벌어서 예멘에 있는 가족도 돕고 싶지만 나는 여전히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나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한다. 예멘의 상황이 좋아지면 돌아가겠다.” 하산은 난민심사 탈락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들 23명은 1년의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지만 예멘의 내전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1년이 지나도 고국으로 돌아가기 힘들다.

국제사회는 예멘인들의 보호기간을 늘려가고 있다. 미국은 지난 7월 미국에 입국해 임시보호지위(TPS)에 있는 예멘인 1250명의 체류 허가를 2020년 3월까지 연장할 것을 결정했다. 예멘의 내전 상황을 고려한 조처다.

보건의료 서비스와 주거 지원 등 어떠한 사회보장도 받지 못하는 한국의 인도적 체류 지위로는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이, 하루하루 불안할 수밖에 없다.

모하메드는 “인도적 체류 허락을 받아 기쁘면서도 이 부분 때문에 걱정이 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와 아내는 일할 수 없는데, 내가 혼자 일해서 집세, 식비, 의료비, 교육비를 다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료비는 정말 무섭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인도적 체류 지위도 건강 보장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주에 있는 예멘인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예멘에서 총상을 입어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30명에 이른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외국에 있는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를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지만, 인도적 체류자는 불가능하다. 인도적 체류자는 혼인해도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 법적 가족을 이룰 수 없게 차단돼 있다. 정부가 ‘인도적’ 체류 허가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인도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난민 인정은 안 되더라도

“현재 한국에는 난민보다 못한 처우를 받는 1400명의 인도적 체류자가 있다. 한국이 인도적 체류자의 지위와 사회보장 수준을 난민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국제적으로 예멘 출신 난민은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보충적 보호 지위를 부여해 100%에 가까운 보호율을 보인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은 예멘인들이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인도적 체류 지위라도 받아 한국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세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의 말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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