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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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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엄마의 변심이 시작됐다

수능 절대평가 반대집회 참가자 상당수 문 정부 지지자…

학력고사 세대 ‘흙수저’ 출신 중산층으로 상대평가 긍정 경험
등록 2017-09-05 09:15 수정 2020-05-02 19:28

2017년 8월30일 청와대 정문 앞 분수대. 이날 오전 11시 시작된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공정국민모임)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절대평가 반대 집회에는 20여 명이 참석했다.

반대 여론에 밀려 ‘수능 개편안’ 1년 유예

이날 집회를 연 공정국민모임의 대표는 이종배(40) 사시존치모임 대표다. 이씨는 제19대 대선 기간에 사시 폐지에 반대하며 양화대교 고공농성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현장을 찾은 유일한 대선 주자는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였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이날 집회는 문재인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단체의 집회처럼 보인다.

집회의 ‘진짜 성격’은 기자가 참가자들과 인터뷰를 시도하며 드러났다. “지금 고2 아이들이 23%(대입 정시 모집 비율)잖아요. 고2는 내신에 목숨 걸 수밖에 없어요. 내신이란 게 성적 좋은 아이들 위주로 돌아가는 거예요. 정시만큼 공정한 게 없어요.” 고2 엄마라는 참가자가 말문을 트자 쭈뼛거리던 회원들이 기자에게 모여들어 “수행평가도 내신 1·2등급 아이들한테만 팁을 준다” “학교에 기대할 게 없어서 홈스쿨링을 하는데 대학 가려면 꼭 고등학교를 가라는 거냐”며 목청을 높였다.

이들은 보수단체 회원이 아니었다. 수능 절대평가에 반대하는 진짜 ‘엄마’들이었다. 지난 6월5일 네이버에 개설된 공정국민모임 카페(cafe.naver.com/fair123)에는 현재 회원 4200여 명이 가입돼 있다. 교육부는 8월10일 수능 7과목(국어, 수학, 영어, 한국사, 통합사회·통합과학, 선택과목, 제2외국어·한문) 가운데 국어, 수학을 뺀 5과목을 절대평가하는 1안과 7과목 전부를 절대평가하는 2안을 ‘시안’으로 발표하며 8월31일까지 수능 개편안을 확정한다고 밝혔다. ‘대입 3년 예고제’에 따라 올해 중3이 치르는 2021학년도 수능 개편의 데드라인은 2017년이었다.

이종배 대표는 “초기엔 보수 학부모단체랑 연대하는 바람에 오해를 많이 샀는데,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어 이제 하지 않는다. 회원들은 대부분 학부모다. 회원 정보를 보면 80%가 30∼40대고 60%가 여성이다”라고 말했다.

집회에서 만난 엄마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기자가 “이번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했냐”고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다. 저만치 기자와 거리를 두던 엄마들까지 “저요, 저요”를 외치며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홈스쿨러 엄마가 “저는 뼛속까지 민주당”이라며 “우리 카페(공정국민모임)에서 문재인 지지자라고 댓글 달았다가 두드려 맞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엄마도 “저는 ‘문빠’예요. 문재인 지지 선언해서 신문에도 나왔어요. 창피해서 말을 잘 안하는데”라며 뜻밖의 ‘커밍아웃’을 했다. “저기 민주당 권리당원인 분도 있어요”라는 한 엄마의 말에 한 아빠가 다가와 발신자가 ‘추미애 대표’라고 찍힌 문자를 보여주며 ‘문빠 인증’을 했다. 집회 다음날인 8월31일, 교육부는 결국 수능 절대평가 여부를 결정하는 ‘수능 개편안’ 확정을 2018년 8월로 1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디지털 공론장 ‘절대평가’ 관련 단어 적어

사실 디지털 공론장에서 벌어진 토론을 보면 수능 절대평가의 실패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이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절대평가 관련 최신 게시글 1100개(‘절대평가’ 키워드로 검색하면 최근 1개월 사이 1809건의 게시글이 있지만, 네이버는 1100건만 제공한다)의 섬네일(검색 결과 화면에 보이는 게시글의 일부)을 분석해봤다. 분석 결과 자주 언급된 단어 100개 가운데 수능 절대평가를 실시하는 명분으로 제시되는 ‘소질, 적성, 창의성, 교육 정상화, 내실화, 부담 경감, 제4차 산업혁명, 미래 역량’ 등의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올해 고3 학생들이 치르는 2018학년도부터 이미 도입이 결정된 ‘영어 절대평가’와 관련된 ‘영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단어는 유불리 혹은 변별력과 관련된 ‘등급’이었다. 그 밖에 ‘상대평가, 대학, 점수, 변별, 과외, 난이도’ 등 상대평가 체제에 어울리는 단어들 일색이었다. 이용자 입맛에 맞는 정보만이 소비되는 필터버블, 확증편향 문제가 심각한 디지털 공론장의 특성을 고려하면 절대평가에 대한 부정적 담론은 더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부는 8월10일 수능 절대평가안을 발표하며 “고등학교 교육을 내실화”하고 “학생과 학부모의 수능 준비 부담을 경감”한다는 지극히 교육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왜 여론의 지지를 못 받을까. 8월30일 공정국민모임 집회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은 이날 집회에 참석한 학부모 20여 명 가운데 연락처 제공에 동의한 10명에게 ‘간이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수능 절대평가에 반대하는 이들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문빠 △학력고사 세대 △흙수저 △중산층 등 4가지로 요약된다. 설문에 응답한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속한 ‘단톡방’(단체 카카오톡 대화방)과 ‘밴드모임’(네이버 밴드) 등에 설문조사 주소를 뿌려 40명이 응답한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표 참조). 다시 말해 수능 절대평가에 반대하는 이들은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중산층 이하 가정에서 태어나 고액 과외 등 사교육 없이 교과서로만 공부해 학력고사로 대학에 입학한 세대다. 이들은 비교적 진보 정치인을 지지하며 살아왔다. 교육 전문가들이 아무리 학력고사와 수능 같은 객관식 상대평가에 대한 부정적 담론을 만들어도, 상대평가 체제에서 과실을 획득해온 학부모들은 상대평가의 긍정적 담론을 무한 생산할 준비가 돼 있는 상황이다.

“우리더러 ‘일베’래요”

8월30일 집회에 참석한 엄마들은 자신에게 찍힌 ‘낙인’을 억울해했다. “우리더러 ‘일베’래요.” 공정국민모임이 출범 초기 ‘탄기국’(박근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에 참여한 극우 성향의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과 함께 집회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날 집회 참석자들의 면면은 세간의 인식과 달랐다. ‘문빠’라고 소개한 엄마는 “문재인 반대 세력이 (수능 절대평가를)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문 대통령에게 애정이 있어 잘되라고 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처음 만났는지 서로 아이디를 확인하며 인사했고, 누군가 기자에게 하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탄식했다. 분노가 공유될수록 언성은 더 높아졌고 과격해졌다.

내년 8월까지 1년이 남았다. 절대평가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을 ‘문재인 반대 세력’으로 간편하게 낙인찍는 것만으로 부정 평가 쪽으로 기울어진 절대평가 담론을 바꿀 수 있을까.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데이터 분석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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