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를 마치고 짐을 챙기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재소자들이 감옥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의 건강상태는 어떠한지를 알아보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와서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전화였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만사 제치고 달려오던 친구의 부탁인지라 의과대학 수업을 며칠 빠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에 참여하여, 지방의 몇몇 교도소를 찾아가 시설을 검토하고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맞닥뜨린 상황은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당신들이 뭘 알아?’복도 끝에 서 있는 교도관이 “일동, 정좌”라고 크게 외치면 그제야 재소자들이 구금된 감방 복도를 지나갈 수 있었다. 감방에서는 재소자들이 ‘양반다리’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감방을 보다가 간혹 재소자들과 눈을 마주치면 그렇게 민망하고 어색했다. 그들에게는 하루 중 대부분을 보내는 생활공간인데, 외부인이 갑작스레 찾아와서 그 초라한 살림살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느껴질까봐 미안했다. 2.5평의 비좁은 공간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6명의 남자가 말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본다고 당신들이 뭘 알아?’
교도소 의무과에서 만난 의무과장은 우리에게 열변을 토했다. 얼마나 자신이 힘든지 아느냐고, 아까 만난 재소자들 대부분이 살인과 같은 중범죄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그들이 걸핏하면 교도소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을 협박하고 걸핏하면 소송을 건다고, 얼굴에 대놓고 침을 뱉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어떤 일인지 아느냐고 말했다.
그 이야기들을 듣다가, 인간적 고통은 있으시겠지만 인권 측면에서는 재소자들의 권리가 생각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의무과 교도관이 일어났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분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쳤다. “재소자들의 인권만 있고, 교도관들의 인권은 없다는 말입니까.” 문을 닫고 나가는 교도관의 뒷모습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 뭘 알아?’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마음이 복잡했다. 양심수들이 0.75평 독방에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던 교도소와는 많이 달랐다. 교도소의 수용시설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지만, 교도관들의 근무환경도 열악했다. 재소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복역해야 하고, 또 그들에게는 얼마만큼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 걸까. 죗값을 치르기 위해 들어와 있는 그들의 인권 보호는 어디까지일까. 밤낮없이 일하는 교도관의 근무환경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었다. 교도관도 재소자도 외부에서 온 연구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잠깐 왔다 가는 사람이 무슨 조사를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몇 년 뒤 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사로 충남 논산훈련소에서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근무지를 선택할 때, 교도소 근무를 선택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만 23살 이하 재소자가 있는 소년교도소와 재판을 앞둔 성인 재소자가 머무는 구치지소였다. 그곳에서 일하며, 교도소 진료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배워갔다. 의과대학에서 배웠던 지식과는 다른 공부가 필요했다.
“마음이 아직도 16살입니다”22살이나 되었을까. 이미 전과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가게에서 과일상자를 훔치다가 잡혀온 재소자였다. 아침에 의무과에 왔는데, 가슴에 한 줄로 길게 2도 화상이 나 있었다. 나머지는 문제가 없는데, 특정 부위에만 수포가 이렇게 크게 생기는 화상은 배운 적이 없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라고 묻는데, 그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자고 일어나니 그렇습니다”라고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나보다 재소자 진료 경험이 많은 의무과장님께 상의드렸더니 그 친구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겨울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감방이 너무 추워 몰래 반입한 1.5ℓ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채워서 안고 잤던 것이다. 맨살에 그 뜨거운 물을 품고 잤던 것이다. 교도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들키지 않도록 보이지 않게 밤새 꼭 품고 있었으니 그 화상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프지 않은데도 의무과에 오는 재소자들이 있었다. 갑갑하니까 잠시라도 바깥 공기를 쐬려고 산책 삼아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내가 “어디가 아파요?”라고 물으면, 미처 대답을 준비 못해 머쓱해 웃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그냥 같이 웃으며 소화제를 처방해주곤 했다.
좀 다른 경우도 있었다. 아프기는 아픈데 정확히 모르는 경우였다. “배가 언제부터 아팠어요?”라고 물었는데, 그 재소자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답을 못했다.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처음에는 그냥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감방을 쓰는 주먹 좀 쓰는 조직 출신 재소자의 약을 대신 타기 위해 온 것이었다.
교도소 안에는 전혀 다른 유형의 ‘범죄자’들도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들어온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었다. 총을 들지 않겠다는 종교적 이유 하나로 수백 명의 신자가 징역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살상과 관련된 훈련이 아니라면 그보다 더 길고 힘든 대체복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특별한’ 이들은 그 장벽을 원정출산으로 병역면제로 가볍게 넘기도 하던데, 20대 초반의 젊은이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징역살이’를 감당하고 있었다.
의무과에서 간병일을 돕던 아이도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어느 날이었던가, 매일같이 허리가 아프다고 의무과에서 약을 타가던 한 재소자가 자신이 원하는 다른 약을 주지 않겠다는 내 말에 갑자기 폭발했다. 책상을 주먹으로 치고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그날 오전 진료를 마치고 창문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데, 간병일을 돕는 아이가 내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그 녀석들 16살에 교도소 들어와서 마음이 아직도 16살입니다. 사회생활도 하고 사람도 만나야 변하는데, 그 아이들은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거였구나.
차분하게 표준어로 협박당하다내게 성인 구치소에서의 진료는 더 어려웠다.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수준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해한 여성 재소자나 오랫동안 군복무를 하다가 퇴직한 뒤 사기 사건에 얽혀 감옥에 온 남성 재소자를 진료할 때면, 마음이 복잡했다. 죄와 벌이라는 게 무엇이고, 그 판단은 누가 해야 하는지.
인권위 조사 때, 교도관이 말했던 것과 같은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이미 여러 중범죄를 저지르고 복역하다 새로 저지른 사건이 발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구치지소에 온 한 재소자는 교도소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협박할 때도 내게 절대로 욕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욕을 하면 처벌을 받기 때문이었다. 욕이 전혀 섞이지 않은 표준어로 이렇게 사람을 협박하고 모욕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몸으로 깨달았다. 협박을 통해 그가 얻으려는 것들은 사회에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게 통한다는 걸 보여주기 싫어 요구사항을 거부하며 버텼다. 그렇게 버티는 과정이 내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교도소 근무를 마치고, 재소자들의 정신건강 연구로 석사과정 학위논문을 썼다. 기존 문헌들을 검토하며 새로운 여러 사실을 알아갔다. 외국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연구가 이미 진행되어 있었다. 재소자들이 일반인에 비해 결핵이나 B형 간염 등의 유병률이 높고 정신건강이 나쁜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교도관들 역시 야간근무를 비롯한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인해 불안이나 우울장애 발생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학위논문을 국내외에서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은 물었다. 다른 취약계층도 많은데, 왜 하필 죄짓고 감옥에 있는 재소자냐고. 자유를 빼앗기고 감금생활을 하면서 죗값을 치르는 것이지 아플 때 방치당하는 것까지 징역살이에 포함될 이유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또 어느 사회에서나 죄를 짓는 사람의 대다수는 사회에 있을 때도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해 의료서비스로부터도 소외된 약자니까, 교도소에서라도 그들을 치료해주면 좋은 일 아니겠느냐고도 말했다.
그들의 인권도 존중해야 하나?그럴 때면, 누군가 반문하기도 했다. 가벼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야 그렇다고 쳐도 성폭행이나 살인으로 들어온 이들에게도 그런 치료를 해주는 게 맞느냐고, 그들의 인권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냐고.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어찌 답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하곤 했다.
인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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