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6년 만에 남은 건, 우울증뿐이다. 구진아(29·가명)씨는 2009년 2월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산더미였다. 예체능 계열 전공자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일자리를 내준 곳은 사교육 시장이었다. 계약직 시간강사로, 수업 일수에 따라 돈을 받았다. 어느 날 원장은 학생들이 무단 결석한 개인교습시간에 대해선 돈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진아씨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내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공공기관에 하소연해봤지만, 원장의 방침이 맞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곳은 없구나, 울컥했다. 서러움이 복받쳐 민주노총에 전화를 걸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강사들과 함께 소송에 나서보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그러나 원장의 뜻을 바꿀 순 없었다. 다른 강사들은 법적 절차를 밟을 의향이 없었다. 받지 못하는 돈이 큰 액수가 아니었던지라, 진아씨 역시 꾹 참고 1년을 버텼다. 두 번째 직장도 학원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5일씩 한 달을 일하고 받은 돈은 120만원. 4대 보험은 되지 않았다. 원래 맡은 일 외에, 업무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2년을 근무하고 그만두었다. 원장은 퇴직금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사교육 시장은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급하게 취직할 수 있는 곳은 통신사 콜센터였다. ‘○○사 얼굴’이라고 교육받았지만, ○○사 직원은 아니었다. 위탁업체와 근로계약을 맺었다. 1개월 교육, 3개월 수습 생활이 시작됐다. 수습 첫 달엔 50여만원을 받았다. 수습을 떼면 15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구인 광고에 게시된 연봉 액수 ‘2800’은 애초 받을 수 없는 구조였다. ‘최고의 복지 제공’ 역시 거짓이었다. 쉬는 시간은 하루에 20분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정신건강 상담센터가 있었지만, 이용할 시간이 없었다. 사내에서 근무환경 개선을 건의하거나, 불만을 해소할 길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콜센터 일을 그만두었다.
지난 1월 진아씨는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는 청년유니온이 3월에 발표할 한국형 블랙기업 지표개발 연구를 위한 심층인터뷰이 모집에 지원했다. ‘열정페이’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일자, 자신의 경험담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특별히 밖으로 표현해본 적이 없는 생각들이었다.
소리 없는 ‘을’들의 외침이 조금씩 커지는 중이다. 청년유니온을 시작으로 알바노조, 알바연대, 패션노조 등 새로운 형태의 노동조합이 확성기 구실을 하고 있다. 청년유니온은 지난해 11월9일 ‘한국판 블랙기업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 시작 두 달 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20대 계약직 직원이 정규직 전환이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뒤이어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일하던 30대 직원이 ‘노동청에 고발합니다’로 시작하는 유서를 남기고 짧은 삶을 마쳤다. 이들의 삶을 파괴한 건 일터였다.
앞서 일본에서 화두가 된 블랙기업이란, 비합리적인 노동을 젊은 직원에게 강요하는 기업 혹은 노동 착취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업으로 정의된다. 또한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이 노동자 개인의 노력이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기업 책임임을 명백히 드러내주는 말이다. 일본에서 이 운동을 주도한 건 2006년 설립된 청년 노동문제 비영리단체 포세(POSSE)다. 이 단체의 곤노 하루키 대표는 블랙기업이 사회를 좀먹는 악이라고 단언한다. “청년 노동자가 비도덕적인 회사로부터 피해를 입는다는 측면뿐 아니라, 요양 현장에서 노인 학대 문제로 드러나듯 소비자 안전도 위협한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우울증 증가는 국가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고용 불안은 시장 축소와 장기적 재정 파탄을 낳는다.” 블랙기업 피해자는 비정규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2009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계속 근로조건이 악화돼온 정규직 노동자들의 피해가 표면화됐다.
청년유니온은 블랙기업 운동을 시작하며 심층인터뷰나 온라인 설문조사 외에도 제보 사이트(www.blackcorp.kr)를 개설했다. 지난해 11월9일부터 올해 1월25일까지 63건의 제보가 접수됐다. 제보자들은 △장시간 노동 △연장수당 미지급 △임금 체불 △근로계약서 미작성 △정규직 희망고문 △계약내용의 불일치 △폭언 △휴게시간 없음 △성희롱·성추행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통한 감시 △업무 외 지시 등 노동법 위반과 인권침해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제를 호소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고통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문제제기를 해도 현실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자포자기가 말문을 막는다.
문제 제기해도 나아지겠나, 자포자기청년유니온 정준영 정책국장은 이러한 면에서 블랙기업 운동이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흔히 ‘열악하다’고 이야기되는 노동시장을 실제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피해 당사자들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함으로써 현장 문제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블랙기업 제보 사이트를 개편해 신고센터를 강화한 이유다. 제보만 받는 데 그치지 않고 곧바로 당사자와 접촉해 노동부 진정이나 언론 제보 등 문제 해결에 필요한 조처를 취할 계획이다. 더불어 오는 7월 한국의 블랙기업 후보들을 선정해 온라인 투표를 거쳐 시상식을 연다.
일터의 부조리는 노동단체 상담소뿐 아니라 익명성을 보장한 플랫폼을 통해 바깥으로 알려진다. 2012년 트위터에서는 익명의 다수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계정 ‘○○○ 옆 대나무숲’ 열기가 뜨거웠다. 같은 업계에 속한 ‘을’들은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는 현실을 폭로했고 서로를 위로했다.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을들의 서글픔은 여전하다. 2013년 게임 개발자들이 만든 웹사이트 ‘꿀위키’(www.ggulwiki.com)가 등장했다. 정보기술(IT) 업계를 비롯한 여러 기업들의 뒷담화와 직원 부려먹기, 야근수당 안 주기 등 ‘회사들의 각종 꼼수’가 집단지성을 통해 공유됐다. 지난해에는 직장인을 위한 익명 게시판 앱 ‘블라인드’와 전·현직 직원들이 직접 회사를 평가하는 서비스 ‘잡플래닛’ 등이 등장해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사내에 소통과 갈등 해결을 위한 창구가 마련된 기업은 많지 않다. 익명 게시판 등이 있어도 이용률이 떨어진다. 정말 익명이 보장되는지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된 우리 사회에서 실명을 걸고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엔 부담이 크다. 김경수(29·가명)씨는 신입사원으로 정식 채용됐다고 생각한 첫 직장에서 동료들 간 친목 만남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장이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쓰는 회사였다. 또 다른 구직자들도 구인 광고만 믿고 입사했다가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에 경험담을 올렸다. 회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포털 사이트 쪽에 게시물 게재 중단을 요청했다.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 변호사와 상담을 했더니,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법적 분쟁도 불사하고 싶었지만 금전적·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블라인드는 본인이 소속된 회사나 업계 게시판에 익명으로 의견을 올릴 수 있는 폐쇄형 서비스다. 한 기업의 일정 수 이상의 직원이 신청해야 게시판이 열린다. 회사 전자우편 계정을 통해 해당 회사 직원임을 인증해야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이용자는 소속 회사 게시판과 회사가 속한 업계 게시판(라운지)만 볼 수 있다.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소속 회사명은 노출된다. 소규모 회사의 경우 익명성 확보가 어려워, 직원 수가 많은 회사 게시판이 대부분이다. ‘땅콩 회항’ 사건이 블라인드에 게시됐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전자우편 인증을 막는 회사도 생겼다. 네이버를 시작으로 2월24일 기준 136개 기업 게시판이 있다. 보수적인 조직문화를 지닌 조선·건설·자동차 기업도 눈에 띈다.
직장인 송수진(33·가명)씨는 집에서 블라인드를 확인한다. 회사나 회사 근처에선 아예 하지 않는다.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린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블라인드에서는 가벼운 정보를 물어보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신뢰할 만한 정보가 꽤 있다. 업계에서 자주 발생하는 갈등에 대한 해우소도 된다. 기업별 인센티브 격차나 고용 형태에 대한 차별을 느낄 수 있는 게시물을 보면 박탈감을 느낄 때도 있다.”
팀블라인드 공동창업자인 정영준·문성욱 대표는 ‘블라인드’를 개발할 당시 2000년대 중반 네이버에서의 근무 경험을 떠올렸다. 즐겨 사용하던 익명 게시판이 어느 순간 폐쇄된 것이다. “회사 생활이 일상에서 대다수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고 소통에 대한 욕구는 커질 수밖에 없는데 문화적·환경적으로 이러한 욕구를 억누르게 된다. 익명성이 소통을 늘려줄 수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팀블라인드 대표들도 게시자의 신원을 알 수 없도록 구조를 짜놓았다. 개인정보 수집도 최소화했다. 익명성과 신뢰성 확보를 관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게시물을 보면 오히려 회사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이 글을 주도적으로 올린다.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려면 변화를 촉구해야 하는데 그 시작은 대화가 아닐까.”
잡플래닛에는 각 기업의 사내문화·복지·경영진 등에 대한 직장인들의 ‘적나라한’ 장단점 평가가 올라온다. 개인정보를 원하는 만큼 수집할 수 있는 기업에 비해, 구직자들은 기업에 대한 ‘진짜’ 정보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블랙기업으로 제보된 한 업체를 이 서비스에서 검색해보니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게재된 정보를 놓고 기업의 항의를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2월25일 만난 잡플래닛 김지예 이사는 한 업체 대표와 긴 통화를 하고 있었다. 게시된 연봉 정보가 사실과 다르다는 전화였다. 채용 면접을 앞둔 시점이었다.
내부 속사정이 ‘광고’가 되는 시대로기업 위기관리 전문가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는 ‘내부 고객인 직원들의 세력화’를 거부할 수 없는 트렌드라고 짚는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비자가 세력화를 했듯, 내부 고객인 직원들도 세력화할 여건을 갖췄다는 것이다. 과거엔 직원을 막 대하면서도 광고를 통해 좋은 기업 이미지를 심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내부의 속사정도 밖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노동 환경을 변화시키는 건 쉽지 않다. 김 대표는 “대한항공처럼 사회적 논란이 되거나 직원들의 기업 평판이 구직자들의 입사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면 변화 촉구의 단초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헌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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