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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레즈비언으로”

‘LGBTI 사회적 욕구조사’ 여성동성애자 4명 인터뷰…

삶과 사랑에 관한 너무 길어서 매우 알찬 수다
등록 2014-08-22 03:59 수정 2020-05-02 19:27
서울 거리에 ‘여기에 지나는 사람 10명 중 1명은 성소수자입니다’ 현수막을 내걸었던 ‘마포구 레인보우 주민연대’(마레연)의 회원 대부분은 레즈비언이다. 레즈비언들은 2000년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주도해왔다. 가장 인권에 민감하고 행동에 과감한 성소수자인 것이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서울 거리에 ‘여기에 지나는 사람 10명 중 1명은 성소수자입니다’ 현수막을 내걸었던 ‘마포구 레인보우 주민연대’(마레연)의 회원 대부분은 레즈비언이다. 레즈비언들은 2000년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주도해왔다. 가장 인권에 민감하고 행동에 과감한 성소수자인 것이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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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레즈비언들이 이들처럼 자긍심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의 레즈비언 포커스 그룹 인터뷰에 모인 언니들은 커밍아웃 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고, 인권운동의 상징까진 아니어도 조력자는 기꺼이 되고 싶어 했다. 가장 연장자인 수민씨는 ‘천리안·하이텔·나우누리’로 시작되는 1990년대 후반 이후 현대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산전수전을 몸으로 겪었고, 30대 후반인 혜정씨도 잡지를 읽고 찾아간 레즈비언 바 계단에서 가슴이 터질 듯 뛰었던 고전적 경험이 있다. 언니들이 오랜 파트너십을 유지해온 반면 동생들은 지금 싱글이다. 14살 때부터 혼자 살아온 진아씨는 레즈비언 싱글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유일한 20대인 나래씨는 2000년대 중반 중·고등학교에 ‘이반 검열’ 광풍이 불던 시절을 ‘청소녀 이반’으로 살았다. 하나하나가 역사인 언니들의 수다는 추리기가 어려웠다. 너무 길어서, 매우 알차서.

10주년 기념일에 올린 결혼식

혜정: 지금 결혼한 애인이 네 번째. 저는 보통 길게 사귀는 편이죠.

수민: 슬픔이 많았겠어요.

혜정: 그렇죠. 제가 이번에 결혼식을 원했던 것도 그래야 내가 뭔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거 같아서 하자고 졸랐어요.

사회: 그래서 지금 얼마나 되신 거죠?

혜정: 딱 10년하고 이제 한 달이 지났어요. 10주년 기념일에 결혼식을 했어요.

혜정씨는 “그런 역경들을 겪어가면서”라고 말했다. 그는 “둘이 합쳐서 2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처음 만났다”고 돌이켰다. 파트너와 처음 만난 겨울에 돈이 없어서 자기 옷만 샀는데 “서로 미안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당시에 샀던 옷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혜정: 처음에 내가 용돈을 안 주는데 달라는 소리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샤워할 때 지갑을 몰래 꺼내봤더니 1천원짜리가 이만큼 있어요. 혹시 직장에서 훔쳤나, 생각도 했죠. 며칠이 지나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어봤죠. 1천원짜리가 왜 그렇게 많냐고. 대답하기를, 회사에서 점심은 대놓고 먹는 식당이 있고, 저녁에는 똑같은 데서 먹기 질리니까 사장님이 4천~5천원씩 식대를 준대요. 그러면 그걸 1천원짜리 김밥을 사먹고 2천~3천원을 아껴서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놓고….

파트너의 일이 잘 풀리고, 혜정씨도 열심히 맞벌이를 해서 지금은 집 장만을 계획할 정도로 형편이 나아졌다. 그는 “힘든 시간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 사람이랑 헤어지면 나는 다른 어떤 사람도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라면서도 “한번은 이 사람이 속을 썩여서 정말 자살하려고 옥상에 끈을 맨 적도 있어요”라고 털어놓았다.

혜정: 그래서 제가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어요. 첫째는 결혼식이고, 둘째는 돈 있으면 바람을 피운단 생각을 했어요. 집이며 통장이며 제 명의로 했어요.

보이시한 부치와 여성스러운 펨

레즈비언 커플을 보이시한 부치(Butch)와 여성스러운 펨(Femme)으로 나누기도 한다. 혜정씨가 펨이라면 신랑은 부치다. 이성애적 통념으로, 부치가 가부장 같아 보이지만 펨이 관계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래된 커플이 그렇다. 진아씨는 펨에게 재산권을 주는 경향에 대해 “제도적인 걸 원하지만 안 되니까 차선책을 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혜정씨의 경우는 커플이 싸우면 파트너 어머니가 쫓아와서 “나는 혜정이 아니면 싫다”고 하실 정도로 신뢰를 쌓았다. 혜정씨는 “헤어지고 싶어도 파트너의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고, 우리를 롤모델로 여기는 레즈비언 후배들한테 면목도 없어질 것 같다”며 웃었다. 물론 그는 지금도 파트너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한다. “여자지만 남자 같은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계에서 단점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혜정: 곧 새 직장에 나가는데, 결혼했다고 얘기했어요. 굳이 여자랑 결혼했단 얘기를 하진 않았지만. 요즘은 이성애자도 결혼하고 호적에 바로 안 올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나중에 알려지면 저 여자랑 결혼했다고 얘기하면 되고. 직장만 빼고 친구나 가족 모두가 알고 있어서 무서울 게 없어요. 옛날에는 협박도 ‘가족한테 이른다’ 이랬는데 다 아는데 뭘. 하하.

이렇게 자긍심 넘치는 커플이지만, 생계가 걸리면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의 파트너가 동네에서 자영업을 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관계를 알면 영업에 지장이 생길까 걱정된다. 그래서 커플인 것을 티 내지 않으려 “둘이 동네에서 좀 떨어져서 걷는다거나” 조심한다. 6년을 살아온 동네를 떠날까 싶은 생각도 든다.

혜정: 동네 분들이 저희를 친척으로 알고 있어요. 저희 부모나 그쪽 남동생이 수시로 왔다갔다 하니까요. 요즘은 미디어 영향도 있고 해서 눈길이 달라요. 한번은 식당에 갔는데, 약간 레즈비언 같은 아주머니 한 분이 ‘둘이 사귀지?’ 그래요. ‘네? 가끔 그런 소리 듣는데요’ 그러고 말았어요. 요즘 우리 여기 너무 오래 살았다, 그래요.

결혼식을 올릴 만큼 관계가 공인되기를 바라는 혜정씨. 동성 커플의 법적 관계 중에 느슨한 파트너십과 친족관계까지 포함하는 결혼제도 가운데 무엇을 원할까?

혜정: 딱 파트너십이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저는 파트너 어머니와 어떻게 보면 며느리 같지만, 며느리는 아닌 관계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그이한테 좀 과한 사랑을 보여주는 분이세요. 법적 결혼으로 딱 엮이면 시월드가 겪어질 것 같아서…. 레즈비언 커플인 게 저한테는 좋은 면이 있는 거죠.

“첫사랑을 시집보낸” 기억

모두들 웃으며 “무서운 분”이라고 했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에 공감도 갔다. “다시 태어나도 레즈비언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43살 수민씨는 5년, 2년, 9년 사귄 애인이 있었다. 지금 애인과는 5년째 동거를 하고 있다. “첫사랑을 시집보낸” 기억도 있는 그에게 관계의 법·제도화는 남다른 감회를 부른다.

수민: 9년 사귀고 헤어졌을 때, 걷다가 이만큼 빈 공간을 훅 밟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뭐냐면 서로 ‘너랑 못 살겠다!’가 아니었거든. 점점 마음의 끈을 놓다가 나는 다시 잡아가고 있었어. 마지막에 뭐가 안 맞아서 헤어지게 됐는데. 우리가 법적 부부거나 애가 있었다면 ‘그래, 참고 살자’ 해서 다시 연결될 수 있었을 거야.

그는 지금 인권운동 하는 애인을 만나서 잘 지낸다.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해서 어머니도 “너만 좋다면 좋다”고 인정했다. 앞으로 운동하는 애인의 조력자로 레즈비언 커플의 모델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키우고 있다. 장구한 연애의 역사와 솔직한 욕망을 가진 그도 ‘성소수자라서’ 아팠던 기억은 있다.

수민: 9년을 살았던 친구가 회사에서 스프레이를 뿌리는 일을 하다가 잘못해서 얼굴에 뿌렸대요. 눈에 들어가서 병원에 간신히 실려갔는데 그 전화를 받고도 갈 수 없었어요. ‘내 친구가 아파서 가야 한다’고 회사에 말할 수는 없잖아요. ‘악!’ 소리도 못하고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는 지금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다. 연하의 애인에 안정된 직장, 주말이면 어울려 운동하고 살아온 날들을 공유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는 “식구가 다섯”이라고 하는데 “개 아들, 개 딸”이라고 부르는 강아지 세 마리를 포함해서다. 어느새 40대에 접어든 그는 “어제 갑자기 6살짜리 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꿈 이야기를 꺼냈다.

수민: 나는 늘 엄마한테 엉겨붙는 딸을 보면 정말 부럽거든. 왜 요즘 자꾸 그 생각이 나는지. 꿈에서 내가 개를 너무 좋아하니까 개가 변해서 애가 됐다, 내가 정말 열심히 사랑하니까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개는 다른 데 가 있고 어떤 여자애가 와 있는 거야. 마치 길을 잃어서 우리 집에 온 것처럼. 애를 보살피다가 보내야 할 것 같아서 집에 전화를 걸라고 했어. 근데 자꾸 암호 같은 번호를 누르는 거야. 내가 ‘이리 줘봐’ 그래도 애가 자꾸 숨기려고 해.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는데…. 그 신호를 받고 온 사람이 나를 음해할 것 같았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 여자애 얼굴이 너무 또렷하고….

그러나 혼자는 입양할 수 있어도 레즈비언 커플은 입양이 더욱 어려운 현실이 있다. 수민씨의 다음 세대인 진아씨는 커플은 아니지만 “회사 사람들 빼고는 모두 알 만큼” 커밍아웃에 적극적인 사람이다. 진아씨는 “커밍아웃 다 하고 싶어요.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유는? “그게 내 삶을 설명할 대표적인 거니까.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빼면 별거 안 남잖아요.” 그런 그가 30살까지 철저하게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진아: 우리 언니가 누가 봐도 레즈비언이었죠. 중학교 때부터 내가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인식한 순간부터 언니를 보면 알겠더라고요. 근데 제가 중학교 때 우리 언니가 사귀던 사람이 결혼을 했어요. 그 언니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서 ‘죽겠다’고 하는 걸 제가 봤죠, 엄마가 충격받는 걸 보고 ‘나는 그래선 안 되겠구나’ 생각했죠.

진아씨는 중학교 시절 예쁜 여자한테 마음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성정체성을 깨달았다. 그 자체로 고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참담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15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시간이 흘렀다. 그의 나이 30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비로소 언니에게 말했다.

진아: 언니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았는데…. 15년 동안 엄마도 숨기고, 저도 숨기고, 언니도 숨기고. 언니한테 ‘엄마도 알고 있었으니까 너무 죄책감 갖지 말라’고 했어요. 저도 커밍아웃 하고. 언니가 더 충격을 받았죠. 1년 동안 언니를 못 만났어요.

학교선 모범생 코스프레, 밖에선 팬 코스프레

12살 터울이 나는 언니는 언제나 엄마 같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살아온 자매는 그랬다. 언니는 레즈비언 커플로 16년을 살았지만, 동생의 커밍아웃에 충격을 받았다. 진아씨는 “언니는 되게 조카를 갖고 싶었고 엄마의 마음이었던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이제는 “여자 얘기를 함께 할 수 있는 사이”가 됐지만 말이다.

김조광수 감독의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게이와 레즈비언이 위장결혼을 하면서 생긴 이야기다. 레즈비언 이야기가 나온 드문 한국 영화다. 청년필름 제공

김조광수 감독의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게이와 레즈비언이 위장결혼을 하면서 생긴 이야기다. 레즈비언 이야기가 나온 드문 한국 영화다. 청년필름 제공

진아: 나는 연애하는 게 좀 힘들어요. 데이트는 해도 나중에 이 친구가 뭔가 기대한다는 걸 느끼는 순간 도망가는 스타일이죠. 요즘은 나이 들어서 사귀어보려고 하지만 막상 해보면 내 성격은 그게 아닌 것 같고. 감정적인 친밀함을 줘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요. 저는 14살 때부터 혼자 살아왔으니까요.

반면에 언니는 오랜 가족이 있다. 그런데 파트너십 제도가 없는 현재로선 진아씨가 언니의 유일한 상속자다. 다르게 말해서 16년을 함께 살아온 언니 파트너에게 법적 권리는 없다는 말이다. 진아씨는 파트너는 없지만 같이 살고 싶은 사람들은 있다.

진아: 노후에 공동체가 필요하죠. 분명 외로울 테니까. 서울 근처에 땅을 사서 공동체를 만들고 살자고 한 이들이 있어요. 막상 진척은 잘 안 되고 있지만. 200평 정도 땅을 무상 임대해놓긴 했어요. 나중엔 같이 살고 싶어요.

진아씨의 다음 세대인 27살 나래씨는 “미친 17”이라고 자신의 청소년기를 돌이켰다. 경기도에서 학교를 다닌 그는 주변엔 비슷한 친구가 없었다. 그는 “가수 모임에 나갔더니 저랑 비슷하게 생긴 애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아이돌 팬클럽에 가입하고, 멤버들의 외모를 따라하는 팬코스(팬 코스프레)를 하면서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나래: 애들을 만났는데 ‘둘이 사귀고 있대’ 이런 얘기가 들리고, 밥을 먹다가 나가서 골목에서 여자끼리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그랬죠. ‘아, 여기다! 여기가 신세계다!’ 했죠.

그렇게 팬덤 안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는 “학교에서는 모범생 코스프레, 밖에서는 팬 코스프레를 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중 생활 가운데 처음 미친 듯이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만났다. 가출한 그녀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미친 17” 시절은 갔다. 그러나 신세계도 잠시, 이반 검열 열풍이 불었다. 팬코스 열풍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래: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잖아요. 근데 같이 팬코스 하던 친구가 ‘어떤 오빠가 자기를 좋아한다’면서 이성애자로 돌아가는 탈반을 한다는 거예요. 20살이 되면서 애들이 머리를 기르고 화장하기 시작하고. 저랑 너무 다른 거예요. 저는 어떻게 하면 30살, 40살까지 레즈비언으로 살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다른 애들은 ‘이건 한때지’ ‘너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그러는 거예요. 너무 슬펐죠.

그는 한때 이런 경험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이제는 “팬코스 커뮤니티가 나의 10대에 큰 도움이 됐다”고 수긍한다. 다만 당시에 “어른들 누군가 성경험을 좀 얘기해줬으면” “가출한 친구들을 대하는 방법을 알려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나중에 인터넷 카페를 통해 성인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처음 접하고 그는 “30~40대 레즈비언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고 돌이켰다. “내 친구들은 다 탈반하고 나만 남는 건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들은 싸운다. 진아씨는 성차별을 극복하고 싶어서 일부러 여성들이 잘 하지 않는 영업직을 택했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시비 거는 직장 동료들, 성희롱을 일삼는 남자들과 멱살잡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성차별과 싸우는 언니들, 야릇한 과거사 얘기에 죽이 맞았다. 대학교 4학년 시절에 “오춘기”를 앓았던 수민씨는 “20대에 플라토닉러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경험을 하고선 ‘집어치워, 섹슈얼이 있어야 완벽한 사랑이야’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커밍아웃 해도 믿어주지 않는 이들에겐 “나는 여자 엉덩이를 보면 느껴”라고 하면 ‘직방’이었다고 한다.

가장 여성스러운 면이 강한 혜정씨는 “남자친구를 만났지만 요만큼의 떨림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잠깐 만났던 남자친구는 아직도 착각을 한단다. 그는 “걔는 자기가 헤어질 때 뭔가 상처를 줘서 제가 남자를 아예 안 만난다는 죄책감을 갖고 살아요”라고 전했다.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곧 죽어도 자기 때문이라고” 한단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네”

인터뷰 사회를 보았던 나영정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활동가는 인터뷰 중간에 말했다. “커밍아웃 얘기하면 약간 일생이 보여요.” 차별 경험을 앞세우다 아쉽게 삭제돼버렸지만, 언니들 웃으며 즐기며 살았다.

마지막으로 언니들의 바람 하나를 전한다. 요컨대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네”. 게이커플은 애정하는 방송이 레즈비언은 잘 다루지 않는 이유가 “상품성이 없어서”라고 이들은 일침을 날린다. 진아씨가 분석한 게이 커플이 인기 있는 이유는? “이성애자 여자들, 레즈비언 여자들, 게이들도 좋아하니까. 이성애자 남자들만 싫어하고.” 레즈비언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이성애자 여자들도 싫어하고 게이들도 싫어하고 이성애자 남자들도 싫어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언니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침묵은 죽음이니까.

정리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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