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정신으로 내 얘기를 많이 한 게 처음이어서 좋다.” “술자리에서 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직업·직장·생계’ 등에 관한 포커스 그룹 인터뷰에 참가한 이들의 마지막 소감은 그랬다. 앞서 3시간씩 3번을 만난 동현 등 인터뷰 참가자 5명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모여 커밍아웃, 연애, 군대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게이 친구들과 어울리지만, 가슴에 품었던 얘기를 정색하고 나누기는 어려웠다. 인터뷰는 좌담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됐다. 긴 인터뷰 원본에서 깊은 속사정, 뜻밖의 얘기를 추렸다. 그러면 커밍아웃 경험부터. 친구사이 활동을 오래 한 동현은 “커밍아웃해서 거부당한 적은 없으니까 복 받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지만, 첫 경험은 실수에서 시작됐다.
기도 제목 “새해에도 나만 알고 있게 해주세요”동현- 2000년대 초 유학을 갔는데, 가기 직전에 난생처음 연애를 서른 넘어서 했어요. 애인이랑 살려고 집을 나왔는데 그때 엄마한테 ‘유학 가기 전에 자취 경험을 해봐야겠다’며 좀 웃긴 핑계를 댔죠. 그러다 엄마를 우리 동거하는 집에 모셔서 밥도 먹고 했죠. 근데 유학을 가면서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컴퓨터에 있는 자료를 다 백업을 못한 거야. 동생보고 나중에 자료로 구워서 보내라 했는데, 그걸 동생이랑 엄마가 같이 한 거죠. 거기에 친구사이 자료, 애인이랑 찍은 사진, 야동도 있었거든요. 난리가 났죠. 엄마는 ‘너 이제 다시 안 봐!’ 그러고.
그러나 어머니는 망각했다. 잠시 귀국한 그에게 선을 보라고 강권했다. 동현은 “엄마가 막 때리면서 나중엔 막 내 소원을 들어달라는 둥… 우리 엄마 되게 극성맞거든요”라고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간 맞선이 잘될 리 없었다. 어머니는 화를 냈고, 동현은 “대판 싸우게 됐다”고 돌이켰다. 그는 “뻔히 알면서 뭘 몰랐냐고. 몇 년 전에 애인 사건도 있었고”라고 커밍아웃했다. 어머니는 “집안 망신시킨다” “없는 자식 취급하겠다” 같은 말을 퍼부었다. 동현은 “엄마 얼굴 안 보고 산 지 몇 년 됐다”고 말했지만, 아픔은 남는다. 동현은 “아빠가 엄마 때리고 바람피우고… 엄마는 아내로서는 불행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내가 웬만하면 엄마를 위로하고 도와주려 하고 의지하고 그랬다”고 돌이켰다.
동현- 우리나라에선 집안에 불화가 있으면 쟤도 이상하네 그러죠. 나 같은 경우는 내가 게이라는 것과 집안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걸 이중으로 숨겨야 했어요. 언제나 남 앞에서 연기를 이중으로 해야 하니까, 솔직하기도 어렵고 나도 자신감이 없고. 그러니까 맨날 외롭고. 뭐 연애 못하는 거 둘째 치고라도 그냥 인간으로서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속을 보여준다는 걸 처음 한 게 대학 졸업하고 나서예요.
17살 차이가 나지만 영하의 첫 경험도 컴퓨터 실수에서 시작됐다. 영하는 대학교 때 친한 선배에게서 “나 너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 같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 선배가 영하의 자취방에서 자고 간 날이었다. 영하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내 컴퓨터를 봤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돌이켰다. 교회에 다녔던 영하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 올해 나만 알고 있는 것을, 새해에도 나만 알고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 제목을 쓰는 아이였다. “게이인 걸 나만 알게 해주세요”, 그렇게 쓰지 못해서 에두른 것이다. 그런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았을 때 그는 어땠을까.
학교에 ‘이반 검열’ 광풍이 불던 시절
영하- 이제 큰일 났다. 이 사람이 없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막 도망다녔는데 이 선배가 학교에서 만나자고 해서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얘기를 했죠. ‘뭐, 난 네가 게이인 거 괜찮다’ 이러는데 거기서 밀어버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선배가 ‘야, 볼에 한번 뽀뽀나 해봐’ 이래요. 그리고 주말에 계속 문자를 보내는 거예요. 계속 생각난다고. 이 형도 게이였던 거예요.
영화 같은 얘기에 대담자들은 ‘일동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영하의 말이 “그 선배랑 그렇게 사귀게 된 거예요”라고 끝나서다. 영하가 동아리 여자친구한테 커밍아웃을 했던 장면을 묘사하는 말도 영화 같다. “오피스텔에 사는 친구였는데. 걔가 침대에 누워 있고 저도 옆에 누웠는데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내가 게이야’라고 말은 못하고 나를 제3자라고 두고 얘길 하겠다. 그래서 ‘영하’라는 애가 게이야, 이런 식으로 얘길 했어요.” 나중에 영하는 자긍심을 가지고 사는 친구를 만나며 커밍아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영하- 친구들한테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클럽에서 알게 된 명문대 다니는 형이 있었어요. 근데 그 형이 자살을 해서… 되게 충격이었거든요. 저도 언젠간 혼자 살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불안감도 커지고. 마음이 많이 아파서 엄마한테 그 얘길 했어요. 근데 엄마가 ‘왜 자살을 했냐’고 물어서, ‘그 사람 게이인 것 같다’고 하니까 막 저주 비슷한 말을 하는 거예요. 저희는 기독교 집안이라서요. 너무 화가 나서 엄마한테 커밍아웃을 했어요.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하고….
이렇게 세대가 달라도 커밍아웃 경험은 통한다. 다행히 영하의 가족은 누나가 성소수자 가족 모임에 나올 정도로 변했다. 교회에 다니며 누구도 그의 정체성에 대해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던 시절, 영하는 다른 친구를 비난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학교에 ‘이반 검열’ 광풍이 불던 시절이었다.
영하- 고등학교 때 저희 반 여자애랑 앞 반 여자애랑 사귀었어요. 그게 학교에 막 알려지고 일기장이 공개되고. 저도 같은 퀴어잖아요. 근데 거기서 제가 가만히 있으면 탄로 날 것 같은 거예요. 저도 앞장서서 “쟤 레즈래, 왜 저래” 하면서 막 손가락질하고 그랬거든요.
“되게 애틋했던” 청소년기의 연애청소년기에 연애를 한 사람도 있었다. 민우는 고등학교 방송반 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친구네에서도 자고 우리 집에서도 자고 하면서 알게 됐죠, 서로가 서로를”이라고 말했다. 그는 “되게 애틋했던 것 같아요”라고 돌이켰다.
민우- 감정은 있는데 말로 표현을 못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사귀자고 할 수도 없고. 남들 모르게 손을 잡는 정도였죠. 그 애가 손이 컸어요, 저는 작았고. 그래서 가다보면 뒤돌아보다가 이렇게 슥 내밀어요, 새끼손가락을. 시선을 앞에 두고. 그러면 제가 이렇게 (새끼손가락으로) 잡아요.
그렇게 애틋한 시절이 학년이 바뀌고 졸업을 하면서 끝났지만 민우는 오랫동안 그 경험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힘들었다.
민우- 사실 애틋한 첫사랑을 말할 때는 가슴도 아프고 눈물도 나야 하잖아요. 그런데 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게 조금 아쉬워요. 마음이 되게 아팠고, 그때는 애절했는데, 울어볼 수가 없었어요. 말을 할 수도 없었고, 혼자 속으로만 삭여야 했고. 모든 상황이 그랬던 것 같아요.
“게이의 연애가 주는 특별한 충족감이 있느냐”는 질문에 승민은 “게이니까 경험을 이야기할 사람이 제한적인데, 연애할 때는 공감할 얘기가 많아서 좋았다”고 답했다. 30대 민우는 “일단 남녀는 지금 나이면 결혼 얘기가 나오고 조건을 보잖아요. 근데 우리는 결혼이 아니라 연애라서 배경보다 그 사람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한편 동현은 “순수해서 좋긴 하지만, 순전히 마음만 가지고 가기 때문에 애정이 식으면 끝”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순수한 연애도 좋지만, 제도로 묶이고 싶은 욕망도 강하다. 이들에게 결혼이나 파트너십 제도가 있다면 활용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영하- 조금 무서워요. 그걸 하려면 용기를 내야 하잖아요. 국가기관에 ‘나 게이다’ 말해야 하고. 나중에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되니까요. 그게 악용될 수도 있고요. 제도가 있더라도 문화적 차별이 있어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승민- 저는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하고 싶어요.
동현- 저는 주택 청약이든 의료보험이든 조금이라도 보호받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데, 애인 같은 경우는 직장에 알려질까봐 하지 않겠다고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싸울 것 같아요.
제도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결혼과 파트너십이라는 갈림길이 있다. 성소수자 안에서도 선호가 갈린다. 친족관계 형성과 상속이 당연한 결혼에 견줘 파트너십은 친족관계를 포함하지 않고 상속도 선택할 여지가 있다. 어떤 제도를 선호하는지 물었다.
정식- 저는 부담을 좀 싫어해서 파트너십 정도가 좋아요.
민우- 결혼제도요. 제 욕심일 수도 있는데 헤어지는 과정이 되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보험처럼 안정적이고 싶은 거죠.
동현- 이왕이면 결혼제도요. 처음에 파트너십만 도입한 다음에 파트너십 제도를 만들자고 하면 ‘파트너십이 주어졌는데 무슨 소리냐’ 이렇게 나올 것 같아요.
게이판 ‘사랑과 전쟁’ 나오겠네나이가 어릴수록 결혼을 선호하고, 나이가 들수록 파트너십을 선호하는 설문조사 결과가 여기서도 반복됐다. 결혼제도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관계의 해소가 어려운데도 결혼이 더 좋으냐고 물었다.
민우- 일단 그 제도를 선택했다면, 상대방과 저의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에 신청할 거잖아요. 그 정도 마음을 먹었을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요.
동현- 게이판 ‘사랑과 전쟁’ 나오겠네.
영하- 저한테 해소를 고려하는 시점은 오히려 결혼 신청을 하러 갈 때일 것 같아요. 해소가 어렵지만 신청해보자고 결심하는 거죠. ‘이런 장애물을 같이 한번 넘어볼까?’ 이런 거죠.
웃긴 얘기도 많다. 인터넷은 흩어져 있던 게이들을 이어주는 끈이 됐다. 청소년 시절 온라인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경험도 이제는 적잖다. 민우는 “온라인에 처음 가입한 건 고등학교 때”라고 돌이켰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생전 처음 만난 게이는 이랬다.
민우- 그 아저씨가 21살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환상을 가지고 만났는데 승용차를 가지고 나왔어요. 40대쯤 돼 보이는 아저씨였어요. 처음엔 이 형이 들켰구나, 그래서 아버지가 나오셨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나 이제 어떡하지? 학교에 알리면 어떡하지?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차에 타라고 해서 타긴 했는데, 혼날 거라고 생각하고 겁을 먹고 있었고요. 그런데 아저씨가 무릎에 손을 얹으시더라고요. 내려서 도망갔죠.
민우는 “이후로는 오랫동안 온라인을 하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온라인과 더불어 게이바 같은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질문도 있었다.
영하- 해방, 자유.
동현-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애인을 만나든 섹스 파트너를 만나든.
민우- 일주일의 활력소?
정식-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공간?
끝으로 군대 얘기가 나왔다. 여기엔 짐작과는 다른 군대가 있다. 정식은 군대에서 커밍아웃을 해서 동료들이 받아들인 경험을 말했다. 마침 입대를 앞둔 영하에게 ‘가장 걱정되는 점’을 물었더니 뜻밖의 답변이 나왔다.
영하- 저는 어릴 때부터 무서웠던 것이 축구였거든요. 축구를 하는 게 무서워요.
동현- 미리 처음에 못하는 걸 알려주면 괜찮아요.
민우- 당당하게 알려줘야 해요. 오히려 큰소리쳐야 돼요.
너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지 못한 치유에이렇게 남성다움을 검증하는 집단 스포츠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게이들도 있다. ‘깨알같이’ 군대에서 축구 하지 않는 법까지 알려주는 인터뷰 친구들. 서로를 알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사이였던 이들은 집단 인터뷰를 통해 묘한 끈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연말에 송년회도 따로 하는 사이가 됐다. 나의 얘기를 털어놓고 너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지 못한 치유에 이른 것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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