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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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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사진가들

등록 2012-06-27 02:37 수정 2020-05-02 19: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어제야 구치소에서 나오면 꼭 한 번은, 이번만은 꼭 술 한잔이라도 해야지 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성남훈, 노순택, 한금선, 조재무, 정택용, 김흥구, 최형락, 이미지, 박선주, 임태훈, 이정선, 김홍지, 송수정, 박정훈, 정기훈, 이명익님 등등. 일명 ‘최소한의 변화를 꿈꾸는 사진가들’ 모임이다. 대표가 있는 것도, 총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까지가 회원인 모임도 아니다. 때로 이 모임 이름으로 일을 할 때 모이는 사람들이 다다.

희망버스의 진짜 배후

경복궁이 보이는 박정훈씨 작업실 옥상이었다. 6월16일 다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 복직과 희망버스 사법 탄압에 맞서는 돌려차기 행사 ‘희망과 연대의 날’을 준비하며, 이번 일만 끝나면 정말이지 잠깐이라도 쉬며 어디 낯선 곳이라도 다녀오고 싶었는데 풍광이 참 좋아 어디 여행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사람, 노순택을 처음 만난 곳은 경기도 평택 대추리였다. 정태춘·박은옥 선배가 발의해 만든 평택 문화지킴이들이었다. 사실 나는 워낙 천박하게 살아와 지금도 구김과 가식이 없고 어떤 경우에도 경우에 벗어나지 않는 고귀한 사람들을 만나면 주눅이 드는데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정택용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때 처음 만났고, 한금선과 조재무는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김흥구와 최형락 등은 4대강 순례 때 처음 만났다. 주로 노순택과 한금선을 귀찮게 많이 했다. 난 단 한 번도 돈이 되지 않는 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나쁜 짓이었다. ‘나는 인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인생은 날 위해 술 한잔 사지 않았네’라는 누군가의 노래처럼 술도 밥도 한 번 사지 않았다. 진짜 나쁜 짓이었다.

나는 진짜 술 한잔하고 싶어서 갔는데, 자연스럽게 네 번째 사진 달력 이야기로 회의가 진행된다. 첫 번째 달력은 용산 투쟁 때였다. 당시 이들은 ‘빛에 빚지다’라는 열다섯 달짜리 희한한 사진 달력을 만들어주었다. 달력만 만들어준 게 아니라 판매까지 해서 500만원이라는 거금을 추모기금으로 내주었다. ‘최소한의’ 작품비나 작업비라도 빼고 달라고 사정했지만 이들은 싸늘했다. 두 번째 달력은 2010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때였다. 당시 나는 노순택을 붙잡고 사정했다. 포클레인 위에서였다. 용산 항쟁 뒤 명동성당에서 천일기도 중인 문정현 신부님께 기륭 비정규 투쟁을 지켜주시라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그래선 안 될 철부지 부탁을 다시 하고 있었다. 순택은 비정규직의 문제를 알릴 달력을 다시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그만 실수로 포클레인에서 떨어져 병원에 있는데 다시 달력을 팔아 1천만원을 모아다 주었다고 했다. 이 기금은 기륭공대위 결의로, 희망버스에 대한 검찰의 말도 안 되는 기소 내용대로라면 희망버스의 배후인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사회운동 네트워크’(비없세)에 전달되었다. 웃기는 검찰의 기소 내용과 달리 당시 비없세는 너무나 힘겨워 해산을 논의 중이었다. 그런데 1천만원의 돈이 턱 들어오니, 다들 하는 말, 돈도 있는데 좀더 해보자였다.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이 사진가 모임이 희망버스의 배후인 셈이겠다.

어제야 알았는데 지난해에도 세 번째 달력 사업을 했다고 한다. 다시 1천만원을 모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사진기를 내려놓고 홍보부터 판매, 배송까지 허드렛일이 너무 많아 힘들었다고 한다. 지난해 이맘때는 달력이 아닌 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집을 만들어주었다. 사진가들이 몇 달 동안 부산을 오가며 찍은 희망버스와 한진중공업 투쟁을 담은 사진 기록집이었다. 단 한 푼의 작품료도 인세도 받지 않고 전액 기부였다. 그들은 그렇게 몇 년 동안 현장을 오가며 역사의 눈이 돼주었고, 시대의 빛이 돼주었고, 진실의 순간이 돼주었다.

그들의 사진을 역사로 만들길
결국 술 한잔하자는 자리는 네 번째 사진 달력에 대한 결의 모임이 되고 말았다. 이번엔 어떤 현장에 연대하는 것으로 하는 게 좋겠냐고 했을 때, 사실 마음속으로는 다음달 7월23일, 2천 일을 앞두고 있는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연대해주면 어떠냐고, 목 밑까지 차오른 얘기도 그렇게 험난하게 싸우고 있는 여러 동지들이 생각나 끝내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온 몇 년. 기록되지 않고 찍혀져 있지 않은 우리의 보이지 않는 연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돌아본다. 그런 사회적 진실을 찍어주려고 함께해온 이 외롭고 바보 같은 사진가들에게 우리 사회가 한 번쯤은 고마워해주길 바라본다. 이젠 우리가 그들의 사진을 우리의 역사처럼 간직해주었으면 좋겠다.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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