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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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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향수(鄕愁)

등록 2011-12-16 01:22 수정 2020-05-02 19:26

작가 허준이 1946년에 쓴 단편 ‘잔등’은 이국에서 풍찬노숙의 세월을 보내고 방금 환국한 한 사나이의 시선에 포착된 당대 현실의 갖가지 풍경을 그린 소설인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향수란 이렇게 근본적인 것일까.’ 나는 누워서 눈에 스며드는 높은 하늘의 푸른빛을 마음껏 가슴에 물들이며 아까 제방에서 떨어져 내려가 잔잔한 수변에 진을 치고 뭉기어 밥을 짓던 오붓오붓한 칠팔인의 일행을 문득 생각하였다. (중략) “너 만주서 저런 하늘 봤니?” “못 봤어요.”(중략) 비로소 눈몽아리를 뜨겁게 함을 깨닫는 이러한 연상들 속에서 나는 조선이 그처럼 그리울 수가 없는 나라인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일러스트 이강훈

일러스트 이강훈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을 권리

몸이 이국에 있어서 내게도 향수(鄕愁)가 도진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독일 베를린의 슈프레강가 숲 속 오솔길을 걸으며 우리나라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도시와 시골, 산하를. 베를린 한가운데를 가르며 흐르는 슈프레강은 한강에 비하면 그저 개울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작은 강의 이쪽과 저쪽에 무성한 숲은 한강변과 비교할 수 없이 베를린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무성한 숲 속 길은 방치해둔 듯이 자연스럽게 온갖 수풀이 무성하고 길들은 포장하지 않은 흙길 그대로다. 베를린 시내에서 나는 그렇듯 포장하지 않은 흙길을 자주 본다. 그 강가의 풀밭이나 흙길에 주변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을 나오고,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하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주말에는 고기를 구워 먹고 논다. 그 강가 숲 속 한켠에 ‘집 나온 젊은 예술가들’이 공연을 한다. 그곳이 정말 도시 한가운데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고목나무 숲이 무성하고 한가롭고 풀 향기, 흙 냄새가 싱그럽고 조용하다. 그러나, 또 그러한 곳이 어찌 슈프레강가뿐인가. 베를린 시내 전체가 숲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를린에는 자랑스러운 것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난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문화적으로 섹시하다는 것이다.” 베를린 시민들이 ‘보비’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시장이 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의 자랑거리 중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하나는 베를린시민 중 누구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그러니까 수입이 없는 사람은 사회보장금으로 집세와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회를 갈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는 바로 베를린 시내에 꽉 찬 숲이 말해주듯, 일상생활에서 자연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숲 속에서 뒹구는 아이들, 사랑을 나누는 연인, 책을 읽고 일광욕을 하는 베를린 사람들이 먼 이국에 가서 향수가 일면 어쩌면, 이곳 슈프레강가에서의 날을 떠올리지 않을까. 작가 허준이 그린 인물이 먼 이국에서 돌아와 감개무량하게 ‘그처럼 그리울 수가 없는 조선’이라고 뇐 것처럼, 그들도 그토록 그리울 수가 없는 독일이고 베를린이라고 뇔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도 그런가. 1946년의 하늘이나 2011년의 하늘이나 우리나라의 하늘빛은 똑같을 것이지만, 그러나 내게 왜 조국 대한민국은 허준의 소설 속 주인공이 뇐 것처럼 ‘그처럼 그리운 조선’일 수만은 없을까.

가난을 수치로 만드는 나라

가난한 사람들은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셋방’에 살아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나라, 우리나라. 아니, 지하 셋방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나라, 우리나라. 돈 없는 집 자식들은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빚쟁이가 되어야 하는 나라, 우리나라. 가난이 원수고, 가난을 수치로 만들어버리는 나라, 우리나라. 가난한 이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나라, 우리나라. 그런 나라이니, 자연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사정이 이러하니, 시인 정지용의 ‘향수’가 나는 차라리 부러울 따름이다.

공선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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