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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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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밖으로

등록 2009-03-24 04:55 수정 2020-05-02 19:25

신학자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고고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탄생은 몇몇 유인원들이 숲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수백만 년 동안 벌어진 까마득하고 지루한 과정이라고는 해도, 다른 한편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시간대에서 본다면, 숲 밖에 나온 유인원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기념촬영해도 좋았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정말로 유인원의 발걸음이, 닐 암스트롱이 무색할 만큼,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을까? 그렇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접 포유류와 구분짓는 결정적인 두 가지 특징은 자유로운 두 손과 부드러운 후두(喉頭)에 있는데, 이 두 기관이 숲 속에서는 생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숲 밖으로.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숲 밖으로.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땅을 짚던 팔은 노트북 자판 위로

유인원들은 숲 속에서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네 발로 나뭇가지를 움켜잡으며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다녔다. 숲 속에서 폭풍우도 피할 수 있었고, 열매도 나무마다 충분했으므로, 애초에 그들은 그곳에서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자연환경의 거대한 변화 때문에, 좀더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바로는, 아마도 산맥이 높이 솟아오르는 통에, 너무 차가워진 숲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일이 생겼다. 아, 바람 부는 초원에 믿을 만한 나뭇가지 하나 없이, 네 발을 땅에 대고 어색하게 서 있는 한 무리의 유인원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느꼈을 황량함과 황당함이라니. 아무튼 이후 초원 위에서 수없이 많은 세대의 사투가 있었겠고, 그 시간 동안 유인원은 환경에 맞게 허리를 펴고 하반신이 점점 길어지는 진화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자유로워진 두 손은 엄청난 가속도로 기술 발전을 일으키더니, 오늘날 노트북 자판 위를 가로질러 가는 중이다.

숲에서 벗어나면서 몸통 안쪽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거센 바람은 숲에서 나뭇가지의 마찰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 소음을 뚫고 외침 소리가 수신자에게 가닿자면, 단단하고 강한 울림통은 숲 속 유인원들에게 필수적이었다. 뻣뻣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벼려졌던 후두는 초원에 나와서야 힘을 빼고 나긋나긋해졌고, 유인원-인간은 더 이상 단발적인 소리에 의존하지 않고, 음성을 다양하게 분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연한 후두의 잠재력은 수많은 노래와 그보다 더 많은 속삭임의 위력을 통해 실현됐다.

지금 우리는 원숭이가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동물원으로 우리 자신을 초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을 통해 인간의 종적 우월성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진화 또는 변신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숲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투의 장소를 찾는 것, 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 주위를 둘러본다면, 어쩌면 우리 문명이 만들어온 것이 또 하나의 밀림이나 정글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진화는 계속된다

빌딩숲·아파트숲·학원숲에 갇힌 채, 표준화된 생활방식의 사다리 위로 오르느라 사지(四肢)는 책 한 권, 붓 하나 잡기 어렵다. 산책을 좌절시키는, 빽빽하게 들어찬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내레이터 모델이 내지르는 괴성은 야수의 그것과 닮아서, 우리의 후두가 심하게 경직돼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과밀한 규격화 안에서 인간의 신체와 영혼의 다양성은 많은 부분 상실됐다. 때마침, 다시 한번 숲 밖으로 탈출해야 하는 환경이 도래하고 있다. 난폭한 방식이긴 하지만, 역으로 이것은 우리의 자유도(自由度)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기회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숲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고심하거나, 이미 숲 밖으로 나온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수백만 년 전처럼 어색하고 서투르게 삶을 밀고 나가야 할 시간 동안, 용기를 잃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언젠가 그대가 새로운 인류의 시작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이찬웅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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