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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 아내에게 ‘밥상 안식년’ 차려준 농부

등록 2009-01-21 14:08 수정 2020-05-03 04:25

강한 남자, 능력 있는 아버지. 대한민국 40~50대 남성들이 대체로 갖고 있는 로망이다. 실현되지 않는 로망은 곧 콤플렉스가 된다. 농부 김광화(52)씨도 원래는 그랬다. 아내가 돈을 더 잘 벌면 소외감을 느꼈고, 직장생활을 할수록 점점 미끄러지는 내리막길 인생이라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기도 했다. 한계를 느낀 김씨는 13년 전 돈과 경쟁에 쫓기는 서울살이를 접었다. 경남 산청 간디공동체에서 2년을, 다시 전북 무주로 가서 논을 사고 집을 짓고 살아온 지 10년이다.

아내에게 ‘밥상 안식년’ 차려준 농부

아내에게 ‘밥상 안식년’ 차려준 농부

농촌 생활이라고 어려움이 없을까. ‘나의 선택이니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 정착을 준비하는 4년 동안 방 한 칸에 네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던 때의 갈등. 그러나 그 기간은 김씨에게 스트레스, 강박과 이별하는 ‘치유’의 10년이기도 했다.

올해 치유의 시작은 아내에게 ‘밥상 안식년’을 주는 일이다. 김씨와 아내, 그리고 두 아이들이 준비하던 식사 준비에서 아내를 빼줬다. 아내에게 밥 차리는 일에서 자유를 주는 일이 어떻게 남편에게 치유일까?

“아내가 집을 며칠 비우면 그렇게 초라해지더라고요. 하루이틀은 견딜 만한데 사흘째로 접어들면 ‘때우기식’으로 먹는 것도 힘겹죠. 이제 차려주는 밥 먹고, 간혹 아내의 요리법에 시비를 거는 ‘집안의 큰아들’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활동의 기본인 자기 먹을거리를 만드는 일은 ‘독립된 인격체’의 기본인데 그 기본을 전통적인 부부 역할론에 빠져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내 먹을거리를 해결할 줄 아는 것은 자기 완성”이라고 말했다. 25년 동안 아침마다 ‘뭐 해먹을지’라며 고민해왔던 아내에게 자유를 주면서 덤으로 얻은 건, 아내와의 소통이다.

요리는 감각을 깨우기도 한다. 김씨는 3년 전부터 걸음마를 하듯 요리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기 위해 맛을 보면 혀가 깨어나요. 달착지근한 당근맛, 아삭아삭한 무맛, 달콤텁텁한 고구마맛 등을 온전히 느끼고 그것으로 요리를 만드는 거죠.” 혀로 맛보고 요리를 배워나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또 다른 삶의 재미다.

미감뿐 아니라, 맨손으로 물 없이 마른 세수를 하면서 볼·눈·코·귀를 문지를 때 오는 느낌에 집중하면 자존감도 깨어난다. 감각을 깨우는 일은 자기 몸에 집중하는 것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첫 단계다.

움직임에 충실한 것도 정신적 스트레스와 잡념을 이기는 방법이다. “농촌에 처음 와서 몸을 움직이는데 땀이 나니 개운하고, 몸을 제대로 쓰지 않아 생겼던 움츠러듦도 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그는 비단 농사일뿐 아니라 생활 속 모든 움직임에 충실하다. 걸레질부터 요가처럼 한다. 걸레질을 하면서 허리·허벅지·배를 포함한 온몸의 근육을 깨운다. 신문이나 책을 보면서도 가슴을 펴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읽다가 숨을 내쉬면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읽기도 한다. 자세히 읽고 싶은 기사는 골반을 여는 자세로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읽는다. “몸에 충실하면 몸도 깨고 덩달아 마음도 깨어납니다.”

김씨는 이에 더해 “아내와 연애를 해보라”고 전했다. 부부 사이에 생기는 들뜨는 마음을 흘려버리지 않고 잘 살려나가라는 것. 함께 손 잡고 산책하고, 산책할 때는 늘 입던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슬쩍 챙겨 입어보고,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면, 아내가 여자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기도 한단다. ‘낯설게 보기’로 설렘을 만드는 것도 무료한 삶의 치유 방법이다.

김씨는 그렇게 혀를 깨우고, 몸을 깨우고, 아내와 연애하면서, 도시의 남자들도 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의 치유 노하우들은 그가 이번에 새로 낸 책 에 소개돼 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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