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국제사회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주도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는 평화·개발·인권이 유엔과 국제사회의 핵심 주제임을 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을 유엔 인권 메커니즘을 통해 조명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유엔은 실추된 옛 유엔인권위원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유엔인권이사회로 개편을 단행했다. 새로운 시스템은 인권이사회 위원국을 선출할 때 예전과 달리 후보국의 인권 준수 의지 및 공약을 보고 선출한다는 점과, 모든 유엔 회원국에 대해 정기적으로 인권 상황을 심사하는 ‘보편적 정기검토’(UPR)를 실시한다는 점으로 대표된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2006년 유엔인권이사회 초대 위원국으로 입후보하면서 다양한 자발적 공약을 제시했다. 예컨대 △여성차별철폐협약 및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 비준 △국제노동기구(ILO)의 주요 협약 비준 △인권보호 정책의 수립·이행·평가 때 시민사회와 협력 강화 △인권교육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밖에도 각종 국제인권조약의 이행을 감시하는 기구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강조하고, 유엔특별보고관들에게는 대한민국을 언제나 방문할 수 있는 초청장(standing invitation)을 내기도 했다. 우리 정부의 공약은 국내 인권 상황을 개선하고, 그 수준을 국제적 기준으로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정부는 UPR나 조약이행 심의 과정에서 이런 공약의 이행 수준에 대해 명확한 의견을 표명하지 못했다.
지난 5월, 새로 도입된 UPR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심의가 있었다. 정부는 외교통상부 차관을 단장으로 관련 부처 실무자들을 포함한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UPR에서는 그동안 대한민국 인권 문제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국가보안법, 사형제, 양심적 병역거부, 이주노동자 인권, 장애인 차별, 여성인권, 성적소수자 인권, 언론·집회의 자유 등의 문제가 빠짐없이 나왔다. 국제사회도 한국 정부에 33개에 이르는 권고안을 전달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형제 폐지, 국가보안법 폐지, 이주노동자권리협약 비준,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보장,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성적 지향에 근거한 차별 금지 등의 내용이 모두 포함됐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인권보호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강하고, 당면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대응했다. 정부는 대부분의 권고안에 대해 수용 의사를 밝혔지만,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는 폐지 대신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견해를 재확인했고, 이주노동자권리협약에 대해서는 국내법과의 충돌을 이유로 아직 비준할 의사가 없지만 기존 국내법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의 보건, 안전 및 취업권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변했다. 정부 답변에 대해 국내 비정부기구(NGO)들은 정부 보고서가 작성된 이후 변화된 정부 정책을 분석한 자료를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하면서 보고서 작성 당시보다도 퇴보하고 있는 정부의 인권정책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럼에도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UPR와 달리 올 5월에 있었던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우리 정부에 대한 심의는 아주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심의 과정에서 정부 대표들은 심의 전에 제출한 국가보고서 내용과 전혀 다르게 답변하는가 하면 동문서답으로 대응해 사실관계 파악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통역마저 엉망이어서 심의에 나선 위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아동 인권을 개선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고가 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현장에 참석했던 국내 NGO 대표들도 정부가 심의를 철저히 준비하지 않았고, 조약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니냐고 비판했다. 더군다나 아동권리위원회는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유엔 인권조약심의기구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곳이어서 그러한 비판이 더욱 쓰게 들렸을 것이다.
촛불집회 특별조사관 파견의 의미새로운 유엔 인권 시스템은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정부도 국제 인권 무대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한 점, 이 위원회가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ICC)로부터 A등급을 받았다는 점을 큰 자랑거리로 삼아왔다. 그러나 올해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직속기구로 편입시키려 시도했을 때, 국제 인권사회는 상당한 우려를 표시했다. 국제 인권사회는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을 규정한 ‘파리원칙’을 제시한 바 있으며, 이는 국제 인권 기준을 국내에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또 단기간에 경제 발전과 인권 신장을 이룬 모범 국가로서 한국의 모델을 따르려는 나라들이 많은 만큼,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직속기구화는 이들 나라의 인권 상황에 미치는 영향도 크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우려는 더욱 심각했다. 이처럼 이제 한국의 인권 문제는 한국만이 아니라 국제 인권사회에서도 상당한 함의를 갖는다.
국제 NGO인 국제앰네스티가 촛불집회와 관련해 특별조사관을 파견하고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 내용은 앞으로 각종 유엔 인권 메커니즘에서 우리나라를 심의할 때 계속 인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 유엔특별보고관이 대한민국 내에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례도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에 대해 방어적이기보다는 적극적이고 솔직하게 대응함으로써 국내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권과 관련해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선진 인권국가로서 자신감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인권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엔인권이사회 초대 회원국을 지냈고 올해 회원국으로 재선된 상황에서 수동적인 인권외교 정책은 글로벌한 인권 이슈들을 국제사회에서 주도해야 할 대한민국의 시대적 위상과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이제 제네바로 대표되는 국제 인권사회의 주요 인권 이슈들을 주도하는 역량을 갖추고 국제사회의 인권 논의를 국내의 인권보호 노력과 결부해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국제인권의 국내 주류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선 대한민국의 인권보호 수준에 상응하는 자신 있는 인권외교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
제네바(스위스)=우종길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인권담당관
*이 글은 글쓴이의 개인적인 견해로서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공식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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