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탐구생활] 인간적 고민

등록 2008-05-23 00:00 수정 2020-05-03 04:25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창밖으로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열어놓았던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싸늘하다. 도널드 사령관은 깊숙이 몸을 숨겼던 의자에서 한 번 몸을 떨면서 일어난다. 고개를 든다. 옆으로 손을 뻗어 책상 위를 더듬는다. 한참을 더듬어 잡히는 시가는 단 하나. 어제 BY센터장이 두고 간 시가 한 갑이 밤사이 재가 되고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마지막 남은 한 개비.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켜 시가에 불을 붙인다. “휴~.” 담배 연기를 내뱉느라 나는 소리인지 한숨인지 분간이 어렵다. 전화벨이 울린다. 새벽녘의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도널드 사령관의 가슴이 따끔해지고 놀란 기척을 낸다. “그래, 들어오시게.”
뚜벅뚜벅 군홧발 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한참이나 그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도널드 사령관은 혼잣말을 한다. “내가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일까. 혼돈스럽군.” 군홧발 소리가 멈추고 1, 2초 단정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들어오시게나.” 오랫동안 잠겼던 성대를 놀랬는지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진다. 호크 BY센터장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들어온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 사령관에 대한 연민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그렇네.” 침묵이 이어진다. 도널드 사령관의 손끝에 걸린 시가가 고집스럽게 불꽃을 내고 있다. “다 탔습니다.” 조심스런 호크 센터장의 살짝 들린 고갯짓을 따라가던 사령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뜨겁지도 않은 듯 천천히 손을 들어 재떨이에 시가를 비벼끈다. “이렇게 뜨겁지 않겠나?”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다. 침묵을 깰 것은 단호한 결정밖에 없다. “어쩌겠나. 처리하시게.” “네, 알겠습니다. 이미 어제 만반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사령관의 눈에 혐오의 빛이 스친다. “얼마 전에 데이터베이스를 드렸는데도 그렇게 고민하셨습니….” 말꼬리를 물고 천둥처럼 터지는 쿨럭거리는 소리. “자네마저….” 호크 센터장은 고개를 들어 손을 내젓는다. “쿨럭쿨럭 쿡쿡…!” 잠시 기침 소리가 잦아들자 센터장은 기침 소리가 말을 삼킬세라 빠르게 내뱉는다. “그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잊으셨습니까? 100년 전, 2003년 겨울 520만을 살처분한 데 이어 2008년에는 결국 700만이 넘었습니다. 그 뒤 연속적인 돌연변이로 조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지 않았다면…. 조심이 흉흉합니다. 빠른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쿠데타까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이어서 터지는 기침 소리. 사령관도 함께 기침을 해댄다. “사실 나도 인류독감에 걸린 것 같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