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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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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회담’을 기억하라

등록 2008-05-16 00:00 수정 2020-05-03 04:25

날짜 정해놓고 서두르다 ‘최악의 부실’로 손꼽히게 된 1995년 회담은 지금에 어떤 교훈을 주는가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남북 대화가 중단됐다. 북한은 남한 정부를 ‘괴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상호 신뢰는 무너졌고, 비수 같은 말들이 휙휙 공중을 날고 있다. 이 칼럼의 제목은 ‘냉전의 추억’인데, 이렇게 가다가 ‘냉전의 현실’이 될까 두렵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명박 정부에게 주문한다. 그 길은 아니라고. 도대체 어떤 길이기에 가지 말라고 하는가? 1995년 쌀 회담이 해답을 줄 수 있다. 남북 회담의 역사에서 ‘최악의 부실 회담’으로 손꼽히는 이 회담 속으로 들어가보자.

△ 1995년 6월25일 강원 동해항 중앙부두에서 열린 ‘우리쌀 북한 수송 출항행사’에서 주민들이 북녘으로 향하는 씨아펙스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북한이 남한의 쌀 지원에 합의한 지 6시간 남짓 만에 열린 이날 행사엔 동해 인근에서 긴급히 끌어모은 1천여명의 주민이 ‘동원’됐다. (사진/ 연합)

온탕과 냉탕을 정신없이 오간 2년 반

쌀 회담이 열린 1995년 6월은 정확히 김영삼 정부의 임기가 절반, 그러니까 2년 반이 흐른 시점이었다. 당시 나웅배 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은 문민정부의 다섯 번째 장관이었다. 취임 이후 6개월에 한 번씩 장관이 바뀐 격이다.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의 취임사를 기억해보라. 그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온탕에서 냉탕으로 옮겼다. 1994년 6월 카터 전 미 대통령의 중재로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면서 다시 온탕으로 건너왔지만,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조문 파동을 겪으면서, 다시 냉탕으로 널뛰었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의 강경한 반북 여론에 편승했다. 그 결과 조문 파동을 거치면서 남과 북의 상호 신뢰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됐다.

그러나 국제 환경은 다른 길로 나아갔다.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합의를 할 때, 김영삼 정부는 협상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뒷전에 있다가 돈만 내는 신세로 전락했다. 1995년에 들어서면서, 김영삼 정부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은 식량위기 상황이었다. 5월 하순 북한은 일본의 자민당 소속 인사들을 통해 긴급 식량지원을 요청한다. 그러자 김영삼 정부는 일본보다 먼저 쌀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미국도 일본도 북한과 관계를 진전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여론의 변화도 한몫했다. 보수든 진보든 한국 정부는 뭐하냐고 묻고 있었다. 그것이 북한 문제를 둘러싼 여론의 이중성이다. 그렇게 쌀 회담은 시작됐다.

왜 쌀 회담을 ‘최악의 부실 회담’이라 부를까? 비극의 첫 단추는 북한이 남한 당국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년 반의 대립 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대화가 끊어졌다. 노태우 정부 시기 8번의 고위급 회담을 치렀던 공식 채널도 끊겼고, 전두환 정부 때부터 가동되었던 비밀 접촉 라인도 끊어진 지 오래였다. 북한은 한술 더 떠, 쌀을 주겠다니 받겠지만 당국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영삼 정부는 할 수 없이 민간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비선’(秘線)이다. 이 시기 비선들이 넘쳐났다. 비선의 활개는 북한의 기대 수치를 높여놓았다. 쌀 회담은 결국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홍지선 북한실장이 나서 흑룡강성 민족경제개발공사 최수진 총사장의 도움을 받아 성사됐다.

6월25일, 지방선거 이틀 전까지

6월17일 베이징에서 회담이 열렸다. 북쪽에서는 전금철 통일전선부 부부장, 남쪽에서는 이석채 재정경제부 차관이 대표였다. 북한은 당국회담이 아니라는 의미로 전금철의 직함을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일명 대경추) 고문으로 정했다. 이 차관은 김현철씨와 경복고 동문이었다. 합의 내용은 한국산 쌀 15만t을 제공한다는 것이었고, 창구는 남쪽의 KOTRA와 북쪽의 삼천리총회사로 정해졌다. 남쪽 대표단은 당시 김현철씨 세력으로부터 “일본보다 먼저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25일 이전에 쌀을 북한에 보내야 한다”는 지침을 받았다. 그해 6월25일은 지방선거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시한이 정해진 협상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6월21일 합의하고 나서, KOTRA팀이 계약서에 북한 쪽 서명을 억지로 받아낸 시각은 6월25일 낮 12시쯤이었다. 서울에서는 계약서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홍구 국무총리 일행이었다. 이들은 대북 쌀 지원 수송식이 열리는 동해항에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동해항에는 이미 계약서에 서명하기도 전에 2천t의 식량을 실은 채 대기하고 있는 배가 있었다. 그날 저녁 6시쯤 동해 인근에서 긴급히 끌어모은 주민 1천여 명의 환송을 받으며 ‘씨아펙스’호는 아무런 원산지 표시도 없는 쌀을 싣고 어떤 항구로 가야 할지 알지도 못한 채 출항했다.

목적지도 없이 떠난 배가 국기 게양에 대한 합의를 알 턱이 없었다. 국제 관례는 다른 나라 항구에 들어갈 때 배에서 가장 높은 마스트에 입항하는 나라의 국기를 달고, 배꼬리에는 선박이 속한 나라의 국기를 단다. 씨아펙스호에 인공기가 있을 리 없었고, 선장은 국제 관례에 따라 배꼬리에 태극기를 달고 청진항으로 들어갔다. 배를 안내하러 나온 북한 관계자는 태극기를 내리라고 요구했다. 한국의 국적선이 북쪽 항구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옥신각신하다 같은 달 27일 오전 이 배는 태극기는 내리고 인공기만 매단 채 내항에 들어가 쌀을 하역했다. 그날은 지방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인공기를 강제로 달고 쌀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여당은 참패했다. 인과응보였다.

이미 남북 양쪽은 “남쪽 쌀 수송선이 북쪽 항구 입항시 쌍방 국기 모두를 게양하지 않는다”고 구두로 합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허겁지겁 출항했던 씨아펙스호는 이런 합의 사실을 누구로부터도 통보받은 바 없었다. 아니 통보받을 여유가 없었다. 쌀을 받는 청진항도 삼천리총회사 직원이 도착할 때까지 국기 게양에 관한 남북 합의를 모르고 있었다. 영문 모르고 갔다가 봉변을 당한 씨아펙스호는 29일 밤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린 날이다.

결국 굴욕적인 사과문을 보내다

겨우 사과문을 받아내고 쌀 수송은 재개됐지만 이번에는 ‘삼선비너스’호 억류 사건이 발생했다. 이 배는 8월1일 청진항에 들어가 하역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 사진 찍기 취미를 가진 이양천 일등항해사가 몰래 사진을 찍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북한은 곧바로 이 사건을 ‘계획적인 정탐 행위’, 즉 간첩 행위로 몰아갔다. 그리고 남쪽에 정부 차원의 사과를 요구했다. 인공기 게양 사건에 대한 사과를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계산이었다. 결국 정부는 굴욕적인 사과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삼선비너스호를 풀어주는 대가로 쌀 잔여분량을 다 받아낼 수 있었다. 10월7일 코렉스부산호의 동해항 출항을 끝으로 대북 쌀 수송은 마무리됐다. 10월15일 김영삼 대통령은 와 한 인터뷰에서 “더 이상 남북 대화는 없다”고 밝혔다. 임기 말까지 그 말은 지켜졌다. 그렇게 ‘잃어버린 5년’은 흘러갔다.

대화 중단이 장기화하면, 결국 남쪽은 시간에 쫓기게 된다. 얼마쯤은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는 정부의 대북정책에 여론은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뭐하고 있냐’고 묻는다. 그때서야 이 길이 아니라고 깨달으면 이미 늦다. 그리고 갑자기 서두르면 탈난다. 실패한 역사를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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