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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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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극적인 ‘한국판 마타하리’?

1950년대 북·미 거물들과 ‘화려한 연애’ 김수임, 광기의 제단에 바쳐져
등록 2008-10-24 05:52 수정 2020-05-02 19:25

원정화 간첩사건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판 마타하리’라고? 어딘가 엉성하다. 북한에 넘겨주었다는 정보들은 누구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흔한 것이고, 그녀의 북한 경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녀를 아는 탈북자들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보수 신문조차도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본인 스스로 간첩이라고 주장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장진 감독의 이 생각난다. ‘장진다운’ 빛나는 풍자였다. 이 영화에서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인 간첩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남한 자본주의의 잡범들인 ‘택시강도’에게 구타를 당한다. 공작금도 모두 털린다. 어수룩한 남파간첩은 영악한 남한 자본주의 침투에 실패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오래된 고정간첩도 이 영화에 나온다. 간첩이 직업인 오 선생의 남한 생활은 힘겹기만 하다. 이들은 그냥 극중 인물일 뿐이다. 그런데 10년이 흐른 오늘, 풍자의 코드들이 갑작스러운 ‘리얼리티’로 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첩 리철진’ 풍자 코드가 현실로

‘북쪽이 싫어 남쪽에 왔건만….’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출신의 ‘귀순용사’ 이수근은 남쪽으로 내려온 지 2년여 만에 간첩으로 몰려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보도사진연감70

‘북쪽이 싫어 남쪽에 왔건만….’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출신의 ‘귀순용사’ 이수근은 남쪽으로 내려온 지 2년여 만에 간첩으로 몰려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보도사진연감70

간첩(間諜)이란 ‘스며들어 말을 전한다’라는 한자어에서 유래했다. 말 그대로 ‘적지에 잠입하여 틈새를 보아, 적의 상황을 염탐하여 보고하는 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 간첩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길다. 사마천의 에도 등장한다. 고구려에서 조선시대를 넘나드는 최근의 우리 사극에도 간자, 세작 등이 무수히 나타난다. 13편의 일부인 ‘용간’(用間), 즉 간첩활용에 대한 부분은 정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북이 적대하던 시절, 참으로 다양한 간첩사건이 있었다. 무장간첩, 고정간첩, 이중간첩, 여간첩…. 종류도 다양했다. 간첩사건은 국내적으로 냉전의 광기를 유지하고 확산하는 계기였다. 남북관계 역시 얼어붙게 했다. 1985년 부산 앞바다 청사포 간첩선 침투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정상회담 추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세동과 허담의 밀사 교환 방문은 없던 일로 됐고, 강경파가 부상했다. 1996년 8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역시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1988년 12월1일 박철언 당시 대통령 정책보좌관이 비밀 방북을 했을 때다. 박철언은 북한의 한시해 대표에게 “예전에 북쪽이 심심치 않게 공작선을 내려보내 우리 군사기지를 정찰하곤 했는데,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서로 신뢰가 깨지니 그런 불상사가 없기 바랍니다”라고 꼬집었다. 그때 한시해는 웃으면서 답했다. “뭘 그런 거 갖고 그러십니까? 남쪽에서는 U2기다 SR71이다, 첩보위성이다 해서 평양 시내를 손금 보듯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군대라는 것이 이따금 작전도 해야 하고, 임무를 수행하면 훈장도 줘야 군의 사기도 올라갑니다. 우리야 고작 요원들이 사진 몇 장 찍어갖고 오는 겁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라요.” 서로 웃었다고 한다.(박철언, 46쪽)

물론 냉전시대에는 만들어진 간첩, 즉 조작간첩도 적지 않았다. 단지 한국전쟁 때 납북 혹은 월북한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일본 유학 시절 단 한 번 우연히 총련계 인물을 만났다가, 때로는 납북됐던 어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세월을 살았다. 또한 간첩사건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선거 직전에 많이 등장하는 것도 특징이다. 1992년 이선실 사건, 1997년 황장엽 망명과 고영복 교수 사건이 모두 대통령 선거 직전에 터져나왔고, 야당이나 재야 인사들의 연루 의혹이 제기됐다.

수많은 간첩사건들이 있지만, 원정화 사건을 보면서 두 명의 비극적 간첩이 떠오른다. 김수임과 이수근이다.

1950년 6월28일 한국전쟁이 터진 며칠 뒤 한 여자 사형수가 총살됐다. 이름은 김수임, 나이는 39살, 죄목은 국방경비법 제32조 ‘간첩 이적행위’였다. 이화여전 출신이고, 미 군정청 통역관을 지낸 멋쟁이 신여성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김수임 사건이 소설로 연극으로 영화로 등장하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화려한 연애’ 때문이다. 그녀의 운명은 그녀가 이강국을 사랑하면서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강국은 경성제국대학 법대를 졸업한 공산주의자였고, 월북해 북한의 초대 외무성 부상을 지낸 인물이다. 김수임은 북한의 간첩으로 사형을 당했고, 이강국 역시 전쟁이 끝나갈 무렵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녀의 또 다른 애인은 미8군 사령부 헌병감이던 베어드 대령이었다. 그녀의 혐의는 베어드 대령에게서 정보를 빼내 이강국에게 넘기고, 이강국의 비밀 월북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녀의 자백을 제외하고 증거는 없었다.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기록은 일절 남아 있지 않다.

미 보고서 “이적행위 증거없다” 결론

오랜 세월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이 사건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잠자고 있던 1950년대 비밀문서가 1996년 해제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 문서들 중에 바로 ‘베어드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베어드 보고서란 무엇인가? 미 육군성은 김수임 사건 이후 3개월에 걸쳐 베어드 대령을 조사했고, 200여 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그녀의 중요한 혐의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강국을 월북시키거나 남로당 정치자금을 운반하는 데 미군 차량이 동원된 부분, 군용 지프가 김수임을 통해 남로당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내용 등 핵심 혐의 대부분이 ‘입증할 수 없는 사실’로 서술돼 있다. 베어드 보고서는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미군에 불명예를 안겼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일련의 간첩 이적행위에 관련됐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의 말미에는 김수임의 사진 2장이 첨부돼 있고, “알려진 것과 실제 외모는 차이가 있다”는 논평이 달려 있다.

김수임은 전쟁으로 치닫는 1950년, 광기의 시대에 던져진 제물이었다. 김수임은 당시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렸다. 그러나 마타하리 역시 간첩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1999년 비밀이 해제된 영국 정보부의 제1차 세계대전 문서에는 마타하리가 군사정보를 독일에 넘긴 증거가 없다고 기록돼 있다.

이수근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대표 간첩’이었다.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린 날이었다. 북한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은 유엔사의 한국계 직원 제임스 리(이문항)에게 귀순 의사를 밝히고, 우여곡절 끝에 유엔군 장성의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이수근은 이후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의 생활도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무한 대결의 시대는 숱한 억울한 죽음을 만들어냈다. 하나둘씩 밝혀지는 조작간첩 사건은 냉전이 만들어낸 증오의 광기를 새삼 증언한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무한 대결의 시대는 숱한 억울한 죽음을 만들어냈다. 하나둘씩 밝혀지는 조작간첩 사건은 냉전이 만들어낸 증오의 광기를 새삼 증언한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반공전사 이수근의 제3국 도피 기도

그러나 675일 만에 이수근은 여권을 위조해서 비밀리에 출국했고, 홍콩 공항에서 격투 끝에 체포된다. 그 순간부터 또 다른 이수근이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졌다. 보수적인 신문들은 분노와 증오,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1969년 2월1일 한국으로 압송되어, 5개월 만에 신속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재판은 최종심도 거치지 않았고, 공범이 고등법원에 항소한 상태에서 주범을 신속히 처형해버린 것이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이수근은 왜 ‘자유의 땅’과 불화를 겪었을까? 왜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가려 하지 않고, 베트남을 경유해 캄보디아로 가려 했을까? 그가 탈출 직전에 아는 사람에게 말했다는 내용, 즉 “북쪽이 싫어 남쪽에 왔는데, 이곳도 자유가 없다. 차라리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살면서 남북 양쪽에서 체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해서 돈을 벌려 했다”는 진실일 것이다.

남한에서 그의 삶은 불행했다. 정보부는 이수근에게 충실한 ‘반공전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인이었다. 반공 강연회에서 그는 툭하면 정해진 원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 했다. 갈등이 심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남북 실정을 서로 비교해서 강연해야 되는데, 남한만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불만을 털어놓곤 했단다.

‘이중간첩’ 이수근의 일그러진 반공신화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무너져갔다. ‘이수근 사건은 김형욱의 조작’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재미있게도 조갑제 기자였다. 1989년 3월 을 통해 조갑제 기자는 이수근 사건을 심층 보도했다. 귀순 이후 탈출까지 이수근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을 찾아내서 인터뷰를 했고, 반공 시대에 가려진 실체적 진실을 보도했다. 이후 이수근 미스터리와 관련된 후속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당시 남북한 체제 경쟁으로 개인의 생명권이 박탈당한 대표적인 비인도적·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 등 적절한 조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의 이명준이 택한 길

이수근이 왜 재판 과정에서 조작된 혐의들을 인정했을까? 반공의 광기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폭력이 동원됐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최인훈의 에 나오는 ‘이명준’의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이명준은 남쪽이 싫어서 월북을 했고, 북한 사회주의도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다 전쟁포로였던 그는 석방됐을 때,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다. 그러곤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자살을 택한다. 지상에 그의 안식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대적인 남북관계에서 간첩은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증오의 광기를 동원하기 위한 ‘간첩 만들기’는 그만두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살아온 세월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가? 공안정국은 냉전의 추억이었다. 요즘 그 말이 다시금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 무슨 현실이 영화를 따라가는가?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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