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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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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이여 단결하라

등록 2006-09-29 15:00 수정 2020-05-02 19:24

자본의 책임 회피와 저임금 정책이 탄생시킨 도시의 노동빈민들…‘사회적 배제’를 허물기 위해서는 노동자들 스스로 조직화해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2001년 하버드대학에서 청소부·경비원·식당 아줌마 등 시설노동자들의 생활임금 개선을 요구하는 큰 싸움이 벌어졌다. 하버드대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시간당 6∼7달러로 먹고살기 힘들 정도의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하버드대 학생들까지 가세하면서 하버드대 사상 최초로 총장실 점거투쟁이 벌어졌다. 교정에는 수백 개의 텐트가 세워졌고 학생들이 매일 밤 동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과 시설노동자들은 40여 일간 한 발짝도 안 나왔고, 식당 노동자들이 밥을 날라주고 동참한 교수들은 농성장에 가서 특별수업을 했다. 결국 노동조합이 인정되고 생활임금을 쟁취했다. 기존의 노동조합운동이 남성·대공장·정규직 중심이었다면, 하버드대의 싸움은 저임금 빈곤층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이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기치로 내건 ‘새로운 목소리’(New Voice) 운동의 대표적 사례이다.

없어진 게 아니라 안보일 뿐

빈곤층은 ‘실업’보다는 이제 임금소득 감소와 고용불안 증대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잊었던 빈곤’은 다시 찾아왔다. 다만 빈곤이 서구화된 형태로 재출현했을 뿐이다. 즉, 달동네와 빈곤의 거리는 사라졌지만 빈곤층은 뿔뿔이 흩어져 사회 밑바닥에 은폐된 채 퇴적됐다.

일을 하면서도 빈곤한 ‘노동빈민’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도시 곳곳의 지하 셋방으로 쪽방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을 ‘견딜 만한 상태’라고, 어쨌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한다.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남루한 집에서 사는지, 불충분한 음식을 먹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도심의 가난한 자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야에서 ‘실종’됐을 뿐이다.

1990년대 말 호텔 청소부 등 여러 저임금 노동 생활을 체험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바바라 에렌라이히는 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감정은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다. 누군가 생활비에도 모자라는 임금을 받으며 일한다면, 예컨대 그 사람이 굶음으로써 우리가 더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능력과 건강, 그리고 인생의 일부를 우리에게 선물로 내주고 있는 셈이다. ‘일하는 빈민’은… 다른 사람들의 자녀가 보살핌을 받도록 자신들의 아이를 소홀히 하며, 다른 사람들이 환하고 완벽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자신들은 허름한 집에서 살며, 자신들은 결핍 상태를 견딘다.”

요즘의 빈곤은 경제적 결핍을 넘어 주거·환경·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배제’를 뜻한다. 빈곤은 게으름·방탕 등 개인의 나쁜 습관 탓이라기보다는 개인한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저임금과 실업에서 비롯된다. ‘아직 배가 덜 고픈, 근로 의욕을 잃은 자’들이 더 이상 아니다. 배가 덜 고프다고 비난하는 건 파리의 빈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비스킷을 먹지 그러느냐”고 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지함과 다를 바 없다.

사실 빈곤은 ‘저임금 경제’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저소득층에 속하고, 그러다 보니 이들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값싼 물건을 만드는, 즉 임금비용 통제를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임금 삭감은 회사와 노동자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그럴듯한 위기론이 퍼지고, 노동자들의 머리는 혼란스럽다. 더 이상 사용자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A기업의 노동자는 다른 경쟁기업인 B기업 노동자들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자본은 불황기뿐만 아니라 호황기에도 비용 삭감을 위해 잉여인력 감축을 단행하고 있다. 단기 이윤 추구가 기업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임금·인력 감축은 수익성을 개선해 주주들의 투자를 유도하고 은행 대출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활용된다. 영국의 철강회사 코러스(Corus)는 2001년 2월에 전체 인력의 5분의 1인 6천 명을 해고했는데, 이 회사의 주가는 즉시 9%나 치솟았다. “사용자들은 자신의 지갑이 항상 두껍다고 생각하고 줄이려고 한다.”

이렇게 저임금 빈곤층을 대량 배출하는 자본은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조차 교묘하게 회피한다. 하청·파견·아웃소싱·프랜차이즈…. 같은 일터에서 일하지만 노동자들은 각각 다른 사용자들한테 고용돼 있다. 대자본은 상당한 자본 설비를 갖추지 않고도,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고도 아웃소싱·프랜차이즈를 통해 시장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보장받는다. 자본의 입장에서 하청 확대는 경기 불안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편이지만, 본질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값싸게 활용하고 기업 간의 거래계약 해지만으로도 고용계약을 쉽게 중단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한창 성장하는 자녀를 둔, 황금기의 노동자일수록 노동생애는 고용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의 마더 존스는 없는가

노동빈곤은 우리 사회가 지닌 자원의 총량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몇몇 악덕 사용자의 차별적 대우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제도’ 때문이다. 그러나 빈곤층에게는 잘못된 사회적 시선과 제도를 고칠 정치적 권력 역시 결핍돼 있다. 자신들의 문제인데도 그들은 국외자이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다. 국가가 제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이 스스로 나서야 한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불린, 전설적인 여성 노조 조직책 마더 존스는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12마일이나 되는 산 속 좁은 길을 걸어가 광부들을 조직했다. 저임금 광부들은 희미한 호롱불 아래 노조가입 원서를 썼고, 광산 소유주들은 마더 존스를 전염병보다 더 무서워했다. 그녀가 죽어서야 광산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하버드대에서처럼, 또 마더 존스처럼 가난한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조직화하는 ‘오르그’(Organizer·조직 전문가)들이 노동조합을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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