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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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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 노동을 사수하라

등록 2006-06-02 15:00 수정 2020-05-02 19:24

비정규직 고용으로 ‘인건비 따먹기’만 하는 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교육·훈련을 통해 노동자들의 숙련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향한 길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에서 “한국의 기업주는 노동자들은 해고할 때 대단한 사회적 양심을 발휘했다. 그들은 사회적 계약이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설사 그것 때문에 자신의 돈을 잃을지라도 그 계약을 저버리기를 꺼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티글리츠가 한국을 방문했던 1990년대 초의 모습일 뿐이다. 비정규직 급증과 정리해고 속에서 기업과 노동자 간의 결속·신뢰와 장기적 관계는 깨진 지 오래다. 자연히 노동자에 대한 교육·훈련이 줄어들고, 숙련 형성을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노동자의 권리를 삭감함으로써 경쟁 우위를 찾는 ‘인건비 따먹기’ 경쟁이 강화되고 있다. ‘노동 유연화’라도 교육·훈련을 통해 노동자들의 숙련을 향상시키는 ‘기능적 유연화’가 아니라, 노동을 언제든 쉽게 갈아치울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수량적 유연화’가 판치고 있다.

‘세계의 공장’ 영국 쇠퇴의 교훈

지식기반 경제에서 고도로 교육·훈련을 받은 숙련 노동인구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반대로 저숙련 서비스직이 고용의 주요 배출구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건 한국의 기업들 대다수가 숙련 형성을 위한 교육·훈련 투자를 기피하고, 필요하면 다른 기업에서 숙련 노동자들을 스카우트해 빼내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숙련 무임승차’ 현상이다. 여기저기서 한국 경제의 ‘산업정신’ 상실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너도나도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 산업’을 발굴해야 살길이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한 인적자본 투자를 늘려 성장동력을 높이자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한때 ‘세계의 공장’이었던 영국이 쇠퇴한 원인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표되는 복지병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지만, 근본 요인은 노동자 교육·훈련의 빈곤에 있었다. 영국은 값싼 노동력과 낮은 노동생산성이 장기간 지속되는 ‘저숙련의 균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에서 자동차, 항공우주 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도 첨단 기술기계와 정보혁명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숙련 노동’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 숙련 노동이라는 자원을 가진 독일은 고임금 경제에도 불구하고 고부가가치 상품 전략을 통해 산업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일본 역시 장기적 고용관계를 바탕으로 사용자는 교육·훈련 투자를 늘리고, 노동자도 회사에 더 오래 머무르려고 하는 강력한 유인이 상호간에 작용하고 있다. 사실 노동자의 숙련이 높아지면 기업도 해고하기 어려워진다. 노동자가 회사를 그만두면 훈련에 들인 투자비가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교육·훈련을 통해 노동은 고용이 안정되고 자본도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으므로 서로의 결속이 강화되는 것이다.

톰슨은 에서 “직조공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는 직조공 시인, 직조공 생물학자, 직조공 수학자, 직조공 음악가, 직조공 지질학자, 직조공 식물학자 등이 있었다. 북부의 박물관과 박물학협회들은 직조공들이 세운 것이다. 또 외딴 촌락들에서는 평평한 돌 위에 그림을 그려 기하학을 독습하던 직조공과 미적분학을 열심히 논의하던 직조공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고 했다. 1830년대 당시 직공들은 그 시대의 체계화된 지식을 ‘기술’로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보통의 기계설치공조차도 대개는 기하학과 측량법에 상당한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숙련이 ‘노동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 뒤 노동 과정 통제를 위해 노동자들에게서 장인적 숙련을 박탈한 뒤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정신적 ‘구상’ 능력을 자본가의 손에 넣었다. 요즘 세계화 시대에는 또다시 노동 통제를 위해 ‘비정규직’을 활용하고 있다.

‘인간화된 노동’을 향하여

인적 자본은 물적 자본과 달리 주어진 한계가 없고 얼마든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특히 교육·훈련 투자는 사유재이면서도 공공재에 속한다. 개인의 기술을 증대시키고 동시에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고부가가치 품질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숙련이 향상되지 않으면 혁신이 이뤄질 수 없다. 또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경영 관행을 고집하는 한 ‘장기적인’ 투자 성과를 내는 훈련은 수익이 불확실해지고, 그래서 기업마다 훈련비용 지출에 인색해지게 된다. 기업마다 앞다퉈 도입하는 성과급 체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보상받을 수 있는 행동만 하게 되는 직장에서 고참이 신참 노동자을 교육할 유인이 생길 리 없다.

20세기 초 미국 기업들은 작업 속도를 늘리고 노동을 ‘탈숙련’화 하려고 ‘의자에서 일어서기’ 0.033초, ‘가운데 서랍 열기’ 0.026초, ‘연필 들기’ 0.034초 등으로 각 작업시간을 측정했다. 직원들이 한 번 물 마시려 움직이는 데 평균 몇 피트를 걷는지 정확하게 잰 뒤 거기에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려고 했다. 모든 것을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둬서 노동자들이 조립라인 기계에 또는 책상에 한 점처럼 붙어 있도록 했고, 그래서 신경이 온통 집중돼 일하는 노동자의 어깨라도 건드리면 금방 지붕을 뚫고 날아가버릴 정도가 됐다. 물론 사람이 육체적·정신적 건강함을 유지하려면 다양한 동작을 하면서 행동을 변화시켜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숙련 형성은 ‘인간화된 노동’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본은 값싼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떠나기도 하지만 숙련 노동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한다. 일본 기업들이 최근 중국에서 철수하고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잘 교육받고 훈련된 노동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 숙련 형성이 ‘성장의 엔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비싼 기계’가 그 기계를 만드는 데 들인 비용보다 더 많은 이윤과 생산량을 가져다주듯 높은 숙련을 가진 노동자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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