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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05-01-25 15:00 수정 2020-05-02 19:24

보산동 클럽 업주와 마마상이 밝힌 달러 유입 최전선 필리핀 ‘주스 걸’들의 생활

▣ 동두천=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월12일 오후 동두천 보산동 클럽 거리는 한산했다. 미군 훈련 기간인 탓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은 모두 필리핀인이었다. 휴대전화 액세서리 가게를 지키는 이들도, 영업 시작 전 업소 앞에서 미군과 농지거리를 하는 이들도 필리핀 여성들이었다.

동두천시에 등록된 외국인은 1997년 521명이었으나 2002년 1562명으로 5년간 세배가 늘었다. 2002년 러시아 국적 여성은 299명(남성 3명), 필리핀 국적 여성은 536명(남성 88명)이었다. 미등록자를 합하면 더 늘어난다. 대부분 보산동에 있는 클럽에서 일하고 있다. 동두천 달러 유입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을 매개로 클럽 안에는 업주와 매니저(마마상으로 불리는 클럽 종업원 출신의 한국 여성), 남성 홀 관리자와 수위가 돈을 벌고, 클럽 밖에는 옷가게·화장품가게·식당·기념품점 업주와 종사자, ‘히빠리’(나이 들어 클럽에서 받아주지 않아 나홀로 영업하는 한국 여성)들이 포진해 있다. 캠프 케이시 정문쪽인 보산동에는 45곳, 후문쪽인 광암동에는 15곳의 클럽이 성업 중이다. 1990년대 이래 줄지도 늘지도 않은 규모이다. 러시아 여성들은 부쩍 빠져나가고 필리핀 여성들이 자리를 채우는 추세이다. 업소당 평균 8∼10명이 있는 것으로 계산하면 대략 500여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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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산동의 한 클럽 업주 ㅂ씨가 필리핀 여성 15명이 집단 생활하는 살림집을 공개했다. 예닐곱명이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모두 기획사를 통해 공연예술비자(E6)로 한국에 온 이들이다. ㅂ씨는 “편법으로 온 셈인데 꼬박꼬박 월급 주니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평균 120만원 안팎인 이들의 월급 중 45%는 소개료 명목으로 기획사로 나간다.

ㅂ씨는 “기지 이전 문제로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지만, 사실 장사가 안 돼 문 닫은 업소가 많은 게 아니라 미군에게 ‘영업정지’ 처분을 받아 문 닫은 업소가 더 많다”고 말했다. 영업정지 이유는 미군 멋대로이다. ‘서비스’가 좋지 않았다거나, 여성 종업원이 미군 무릎에 앉았다거나, 제3세계 외국인을 받아 테러 위험이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영업정지 딱지가 붙는 건 아니지만 헌병 둘이 서서 출입을 통제하니 같은 효과이다. 보통 5개월가량 처분이 ‘내려진다’. ㅂ씨는 “동두천에 미군이 많을 땐 1만2천명 됐는데 지난해 3600명이 이라크로 떠나면서 확 줄었다”면서 “하지만 장사가 안 되는 진짜 이유는 부시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일 훈련이다 테러경계다 하면서 미군들의 외출시간을 제한하고, 심리적으로도 위축시킨 탓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케리 당선을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면서 “2008년이 되면 동두천 경기도 나아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부시 임기가 끝나면 “기지 밖으로 나와 노는 미군들이 늘 것이기 때문”이란다.

업주 “케리 당선을 얼마나 원했는데"

필리핀 여성들은 ‘주스 걸’로 불린다. 미군이 한잔에 1만원씩 하는 주스를 사면 10분간 대화한다. 3천원은 여성 몫이고 7천원은 업주에게 간다.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매니저 생활을 했다는 마마상 ㅇ씨(40대 후반)는 “얘들 사고 치지 않게 관리하고 매상 올려주는 게 내 일인데 위아래로 쪼임이 심하다”고 말했다. 여성 한명당 한달에 300잔씩의 주스가 할당처럼 매겨져 있다고 한다. 하루 10잔 분량이다. 할당을 못 채우면 300달러인 ‘외출’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가야 한다. 그래도 이들의 처지는 클럽 밖 ‘히빠리’들에 견주면 나은 편이다. ㅇ씨는 “클럽 밖 여자들은 대부분 혼자 사는데다 미군들이 못된 짓 해도 보호받을 길이 없다”면서 “50∼60살이 돼도 이 동네 못 떠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과거 동두천 학생들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 음절을 뒤집어 ‘천두동에서 왔다’고 말하곤 했다. ‘여자 장사하는 동네’라는 오명 때문이었다. 기지 이전과 반환 문제로 뒤숭숭한 동두천이 그 꼬리표를 떼기는 어려워 보인다. 달러 유입 피라미드의 밑바닥 사람들이 한국 여성에서 필리핀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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