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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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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부국이 짓고 벌은 빈국이 받고

온실가스 0.4% 배출한 파키스탄이 기후위기 취약국
사상 최고의 비 쏟아낸 ‘몬순’ 영향으로 국토 3분의 1 물에 잠겨
등록 2022-09-26 15:33 수정 2022-09-26 23:34
2022년 8월29일 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주 소바트푸르의 집과 건물들이 홍수로 물에 잠겨 있다. AP 연합뉴스

2022년 8월29일 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주 소바트푸르의 집과 건물들이 홍수로 물에 잠겨 있다. AP 연합뉴스

차 안으로 물이 들어오고 있다. 운전자의 허리쯤 물이 찼을 때 차량이 겨우 땅 위로 올라섰다. 차창 밖 모습이 영상 화면에 잡힌다. 강이 아니지만 강처럼 보인다. 주변은 모두 물이고 수면 위로 집 지붕이 보인다. 차량이 향하는 전방의 길 좌우가 모두 물이다. 겨우 나 있는 길 위에 각양각색의 온갖 천을 그러모은 천막이 줄지어 섰다. 집이 수몰된 이들이 그곳에서 생활했다.

2022년 9월16일 서울 하계동 서울광염교회에서 만난 임마누엘 아문(42) 목사가 휴대전화 속에 있는 파키스탄 현지 사진과 영상 등을 보여줬다. 아문 목사는 한국에 온 지 8년 된 파키스탄인이다. 사진과 영상은 파키스탄에 있는 동료 목사가 구호물자를 가지고 홍수 피해 지역인 신드주 바딘시에 갔다가 찍어 보냈다.

다른 영상에선 이층집의 1층이 모두 물에 잠겨 있었다. 침실 침대에도, 냉장고에도 온통 물이었다. 아문 목사는 “(인더스강과 카불강 상류인)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물이 너무 차면 이쪽(파키스탄)으로 보낸다. 어릴 때 (살던 라호르시에) 홍수가 크게 났지만 이 정도까지 피해가 큰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주로 농사짓는 지역이 물에 잠겼으니 조만간 식량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안 그래도 물가가 많이 올랐다. (파키스탄에 있는 지인들과) 통화할 때마다 물어본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7월7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사람들이 인력거를 밀며 침수된 도로를 지나고 있다. AP 연합뉴스

7월7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사람들이 인력거를 밀며 침수된 도로를 지나고 있다. AP 연합뉴스

숨진 이 1559명 중 어린이가 551명

인도 서부, 남아시아에 위치한 인구 2억3천만 명의 세계 5위 인구대국인 파키스탄은 현재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2022년 6월 이후 계속된 폭우와 홍수 때문이다. 수몰 면적은 26만㎢ 정도로, 한때 이 나라 식민지 종주국이던 영국의 국토 면적보다 넓다. 집은 물에 잠기고 건물은 떠내려가고 도로는 유실됐다. 집 117만 채와 학교 2만2천 곳, 5735㎞의 도로와 철로, 246개 다리가 흙탕물 아래로 사라졌다. 파키스탄 정부는 8월2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어린이 340만 명을 포함해 640만 명의 주민이 이재민이 됐고, 국민 7명 중 1명꼴인 3300만 명이 홍수 피해를 봤다. 9월20일 파키스탄 재난관리청은 홍수로 1559명이 숨졌고 이 가운데 어린이가 551명이라고 밝혔다.

피해가 커지자 세계보건기구(WHO)는 파키스탄에 임시진료소 4500곳을 세웠다. 천막을 세워 급히 만든 이재민 캠프에는 화장실이 없다. 말라리아와 뎅기열 같은 감염병이 유행하고 급성설사, 장티푸스, 홍역 환자가 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홍수 피해액이 100억달러(약 14조원)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유엔은 300억달러 이상으로 내다봤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9월9~10일 파키스탄을 방문해 연 기자회견에서 밝힌 금액이다. 300억달러는 파키스탄 한 해 예산의 74%,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9% 규모(2021년 기준)다. 파키스탄 정부는 8월29일 임박한 채무불이행을 피하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11억달러의 차관을 확보했다. 유엔은 파키스탄에 1억6천만달러 규모의 지원을 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미국은 3천만달러 상당의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튀르키예와 중국은 구호품을 실은 항공기를 보냈고, 한국도 30만달러(약 4억2천만원) 지원을 약속했다.

홍수는 남아시아에 해마다 6~9월 불어오는 ‘몬순’ 때문에 일어났다. 남아시아 몬순은 남쪽 아라비아해에서 불어오는 고온다습한 계절풍으로 폭우를 유발한다. 한국의 장마와 이치가 같다. 기후변화로 한국도 여름마다 폭우가 길게 내리고 심해지듯, 몬순 영향 지역도 집중호우가 잦아지고 강해진다.

파키스탄 재난청은 2022년 몬순 기간에 폭우가 지난 30년 평균의 3배에 가깝게 쏟아졌다고 밝혔다. 피해가 컸던 발루치스탄주와 신드주는 평소보다 7~8배 많은 비가 내렸다. 2022년 7월과 8월은 1961년 이후 가장 많은 비가 내린 7월과 8월이었다. 셰리 레흐만 파키스탄 기후부 장관은 “‘괴물 몬순’이 전국에 끊임없는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빙하와 몬순이 만나 발생한 홍수

피해를 본 곳은 파키스탄 남쪽인 발루치스탄주와 신드주를 중심으로 한 인더스강 주변 72개 지역이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이자, 인도라는 이름의 기원인 인더스강은 정작 인도가 아닌 파키스탄의 국토 한가운데를 관통해 흐른다. 주변 지역은 대부분 농촌이고 파키스탄에서도 가장 빈곤한 곳이다. 파키스탄 북부 ‘세계의 지붕’에 놓인 빙하도 홍수 피해를 키웠다. 히말라야산맥과 이어진 카라코람·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고원에는 7500개 넘는 빙하가 있는데, 극지방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많은 빙하가 이곳에 있다. 빙하가 녹은 물로 불어난 인더스강이 몬순 폭우를 만나 범람한 것이 이번 홍수의 정체다.

북부 고산지대 빙하와 몬순 폭우의 영향을 공통으로 받는 남아시아 지역은 기후위기에 특히 취약하다. 국토 전역에 230개 넘는 강이 얽혀 있는 저지대 국가 방글라데시도 2020년 파키스탄처럼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태평양의 섬나라들처럼, 방글라데시는 사실상 해수면 상승으로 침수가 시작된 나라로 여겨진다. 같은 남아시아의 네팔과 인도도 해마다 몬순 시기 홍수 피해에 시달린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4분의 1이 사는 남아시아에 극단적 폭우가 내릴 가능성이 급격히 커진다고 경고해왔다.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가열(온난화) 탓이다.

2022년 9월15일 한 국제연구팀(WWA·세계기후특성)도 파키스탄의 이번 폭우가 기후변화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기후변화가 이번 집중호우의 강수량을 50~75%까지 키웠다고 밝혔다. 이들은 2022년 6~9월 인더스강 분지 전역에 60일 동안 내린 비와, 발루치스탄주·신드주에 5일 동안 내린 비의 양을 분석해,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2도 오르지 않았을 때보다 비의 양이 각각 75%, 50% 더 많았다고 분석했다. 파키스탄과 인도,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영국 출신인 연구팀의 과학자들은 “인류가 초래한 기후변화에 따라 파키스탄의 최대 강우량이 추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며 “극단적 날씨에 대한 파키스탄의 취약성을 급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연구에 참여한 영국 그랜섬연구소의 프리데리케 오토 수석연구원은 영국 <가디언>에 “기후 과학자들이 극단적 날씨에 대해 예측해왔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구온난화의 ‘지문’이 (파키스탄 홍수 사태에서) 분명히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기록을 보면 인류가 대기 중에 온실가스를 내뿜기 시작한 이후 이 지역에 강한 폭우가 극적으로 증가해온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구, 환경, 행성과학 등을 연구하는 미국 브라운대학의 스티븐 클레먼스 교수도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의 이번 홍수가 “기후변화에 따라 앞으로 일어나리라 예상되는 것들과 매우 일치한다”고 말했다.

2022년 9월13일 홍수 피해 지역인 파키스탄 남부 신드주 라르카나에서 한 수재민이 아이에게 손으로 물을 받아 먹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2년 9월13일 홍수 피해 지역인 파키스탄 남부 신드주 라르카나에서 한 수재민이 아이에게 손으로 물을 받아 먹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홍수 이전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

파키스탄은 독일 환경단체 ‘저먼워치’가 발표한 세계기후위험지수에서 세계에서 8번째로 기후위기에 취약한 국가로 꼽혔다(2021년 기준). 세계기후위험지수는 최근 20년 사이 기후변화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 규모를 토대로 추산된다. 농사를 위해 수십 년간 이어진 숲의 벌채와 홍수를 막는 맹그로브숲의 제거, 허술하게 지어진 건물과 배수 등 열악한 기반시설은 파키스탄의 홍수 피해를 한층 키웠다. 같은 기상 조건에도 가난한 나라는 더 큰 피해를 입고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정작 파키스탄 국민이 1959년 이래 지구상에 배출한 온실가스의 양이 전체의 0.4%에 불과한데도 그렇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9월10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한 인터뷰에서 “주요 20개국이 오늘날 온실가스의 80%를 배출한다”며 “파키스탄 같은 개발도상국이 이런 재난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부유한 나라가 도와줘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파키스탄의 문제는 홍수 피해에만 그치지 않는다. 파키스탄은 이미 경제위기와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으로 휘청거리던 상태였다. 조만간 식량 가격은 더 큰 폭으로 오를 것이다. 1947년 8월 영국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은 노동력이 풍부한 인구대국이지만, 1인당 GDP가 1500달러대에 불과하다. 섬유, 농산물, 광물 등 단순한 노동집약형 저부가가치 산업이 주력이다. 인구의 40%가 농업에 종사한다. 한데 이번 홍수 피해 지역이 대부분 농경지다. 큰 피해를 본 신드주는 파키스탄 식량의 3분의 1을 생산한다. 파키스탄 정부는 수몰 지역의 물이 빠지는 데 3~6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피해 지역은 한 해 농사를 망친 셈이다. 신드주에서 가장 큰 목화 생산지인 상가르의 목화 재배농 임다드 힝고르자(45)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농작물이 막 수확할 준비가 됐을 때 홍수가 일어났다”며 “밭에 사람 키만큼 물이 고였는데 언제 빠질지 모르겠다. 모든 걸 잃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은 몬순 이전인 2022년 초부터 경제위기로 국민이 기초 물가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물가 급등의 여파였다. 2022년 3월 물가가 12.7% 급등하자 민심 이반이 생겼고 총리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통과돼 새 정부가 들어섰다. 셰바즈 샤리프 총리가 이끄는 새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차관을 받아냈지만, 여러 불리한 이행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유가보조금이 폐지되고 유류세가 도입됐다. 휘발유 가격은 2022년 초 리터당 150루피(약 885원)에서 8월 250루피로 폭등했다. 7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25%, 8월 중엔 한때 42.3%를 기록했다. 세계식량계획의 파키스탄 지부 라티 팔라크리슈난 국장은 “우리는 매우 비참한 상황에 있다. 밀 재고도 여유가 없고 농부들은 종자마저 다 (홍수에) 잃어버렸다”고 호소했다.

라르카나에 지어지는 수재민 천막. AP 연합뉴스

라르카나에 지어지는 수재민 천막. AP 연합뉴스

불평등과 싸우는 길이 기후위기 대응

기후위기에 따른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세계기후위험지수에서 취약국으로 꼽힌 나라들은 모두 가난하다. 푸에르토리코, 미얀마, 아이티, 필리핀, 모잠비크, 바하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타이, 네팔 등은 2000~2019년 전세계에서 일어난 자연재해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 지수를 작성한 저먼워치는 이 시기 세계적으로 1만1천여 건의 극한 기후현상의 결과로 47만5천 명이 목숨을 잃고 2조5600억달러(약 3천조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산했다. 이 피해의 상당수가 가난한 나라에 집중됐다.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이와 그 문제로 고통을 겪는 이가 다르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정의’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오랜 기간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풍요를 누려온 부유한 나라들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2019년 최연소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에스테르 뒤플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는 2022년 9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배출 책임은 주로 부유한 나라와 그 나라의 소비자에게 있지만, 그 비용은 주로 가난한 나라의 시민들이 부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파키스탄의 홍수를 봤다. 방글라데시도 물에 잠길 것이고, 인도도 일부 지역이 아예 경작이 불가능한 지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뒤플로 교수는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곧 기후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한 가지 큰 오류는 기후변화를 줄이기 위한 노력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분리하는 것”이라며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더 많이 소비할수록 더 많이 배출하기 때문이며, (온실가스) 배출량을 대규모로 줄이려면 부유한 이들이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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