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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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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자기연민

등록 2018-02-27 05:33 수정 2020-05-02 19:28

2월22일 언론중재위원회(중재위)에 다녀왔습니다. 언론 보도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면 그 의견을 경청해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는 것은 언론사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지난해 4월 편집장이 된 뒤, 제가 보기엔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도 ‘반론보도’를 적극 받아주며 사안을 매듭짓곤 했습니다.

이번에 중재위로 가게 된 것은 제1195호 표지이야기 ‘열심히 일한 당신 상품권으로 받아라?’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은 거대 방송사들이 비정규직 작가나 외주제작사 스태프에게 임금을 제때 주지 않고 심지어 상품권으로 지급하는 이른바 ‘방송계 갑질’ 실태를 고발했습니다. 이 보도가 나간 뒤 중심 사례로 언급된 SBS는 1월11일 “이 일로 인해 SBS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애쓴 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입장을 밝혔고, 18일엔 상품권 관련 신고센터 운영 등의 내용이 담긴 종합 대책까지 내놓았습니다.

문제는 보조 사례로 언급된 KBS였습니다. KBS는 최근 의 “허위·왜곡 보도로 인하여… 국가 기간방송사로서 명예가 실추됨과 동시에 대한민국 대표 공영방송으로서의 신뢰도에 상처를 입게 됐다”며 해당 기사에 대한 정정·반론보도와 1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해왔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프리랜서 작가들에게 작가료 ‘일부’를 상품권으로 지급한 것은 사기 진작을 위한 ‘추가 수당’으로, 정규 편성 실패 때문이 아니며, 이 같은 사실을 사전에 협의했다는 것입니다. 22일 중재위에서 이들을 만났지만 해당 보도에 대한 정정보도는 물론 의 사과와 손해배상까지 요구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조정은 ‘불성립’되었습니다. ‘상품권 페이’라는 사실의 ‘해석’과 몰상식하고 위법 소지가 큰 원고료(사실상 임금) 지급이 이뤄지게 된 ‘의사결정 과정’을 보는 (결국 상품권을 받은 작가)과 KBS의 인식이 화해하기 힘든 차이를 보이는 셈입니다.

이날 중재위에서 KBS의 모습을 보며, 수십 년 동안 누적된 방송사의 갑질 관행을 청산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상품권 페이’ 보도 후 엔 너무 많은 제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제보 중엔 노동을 제공하고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배추·안마기·갓김치 등 현물을 받은 사례도 많았습니다. KBS 는 2015년 11월 “근무형태: 주 5일 상근. *페이는 매주 상품권으로 지급합니다”라는 온라인 구인광고를 버젓이 올려놓고, 은 작가 고료를 “회사 내규(!)에 따라 백화점 상품권으로 매주 10만원씩 지급”하겠다고 밝힙니다. 임금을 상품권으로 받은 작가는 100장 넘는 문화상품권 뒷면의 스크래치를 벗긴 뒤 온라인 환전 사이트에 들어가 100번 넘게 코드를 입력하며 ‘방송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깊은 자괴감에 빠졌는데, 방송사 직원은 자신이 입은 감정의 상처를 울며 강변하는 데 골몰합니다. 국가 기간방송사가 ‘상품권 페이’ 문제에 사과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지독한 ‘자기연민’에 빠져 있으면, 전기요금에 더해 강제로 시청료를 징수당하는 국민이자 시청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 이런 갑질 행태가 이어지는 근본 원인이 노동자로서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수많은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부정해온 ‘방송 적폐’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다행히 고삼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그들은 노동자다. 노동자성 인정 여부는 약자 편에서 불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풀어야 한다”(제1197호 특집 기사)고 말했습니다. 이번호 ‘이슈추적’에선 지방 방송작가들이 어떤 고통을 감내하며 방송 현장을 지키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앞으로도 좋은 보도 이어가겠습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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