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제작 생태계 제도 개선은 대통령 관심 사항이고 국무총리도 챙기고 있다. 제도가 개선되었다고 판단할 때까지 방송통신위원회가 계속 챙겨나가겠다. 지상파 방송의 행태는 명백한 고통의 전가, 위험의 외주화다. ‘광고 시장이 어렵다, 지상파 방송이 어렵다’는 얘기는 핑계가 될 수 없다. 1년만 지켜봐달라. 반드시 악습을 끊어야 한다.”
‘상품권 페이’ 빠진 외주제작 개선책고삼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방통위가 꾸린 ‘방송사 외주환경 제도개선 TF’ 반장이다. 지난해 12월엔 방통위, 문화체육관광부,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5개 부처가 합동으로 발표한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이하 종합대책)을 조율해냈다. 1991년 방송 편성에 외주제작 의무편성제도가 도입된 이후 범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본 첫 사례다. 지난해 7월 EBS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다가 아프리카에서 생을 마감한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종합대책은 △방송제작인력 안전강화 및 인권보호 △근로환경 개선 △합리적인 외주제작비 산정 및 저작권 배분 △외주시장 공정거래 환경 조성 △방송분야 표준계약서 제·개정 및 활용 확대 등을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5대 핵심 과제로 정리했다.
하지만 종합대책에는 의 연속 보도로 알려진 ‘상품권 페이’ 문제는 담기지 않았다. 제작 환경 개선의 핵심 문제라고 할 임금 문제의 치밀한 조사가 이뤄진 것인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이번에는 정부가 30년 가까이 이어진 방송업계의 악습을 끊어낼 수 있을까. SBS가 ‘상품권 페이’ 지급에 대한 공개 사과문을 발표한 1월18일 오후 고삼석 방통위원을 만났다.
오늘 공개된 SBS의 사과문은 확인했나.1월19일에 방송사 외주제작 제도 개선 간담회가 있다. 지상파 4사(KBS·MBC·SBS·EBS)와 종합편성채널 4사, CJ E&M 등 주요 방송 사업자들이 모두 참여한다. 이 자리에서 최근 불거진 ‘상품권 페이’ 문제에 대한 공유가 있을 텐데, 그전에 사과 입장을 밝힌 것 같다. 타의로 발표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고백했단 점에서 잘했고, 적절했다고 본다.
방송업계에서 ‘상품권 페이’는 매우 만연한 문제였다.(그런 관행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품권이 큰 금액으로, 급여성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황당했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냈다고 본다. 한마디로 위험의 외주화다. 불이익을 외부로 떠넘기는 구조다. EBS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사망한 PD들과 이번 상품권 페이 문제 등으로 방송사와 외주사, 제작사와 스태프들 간에 놓인 불공정함이 많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방통위는 상품권 페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갈 생각인가.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자들이 계약서도 없이 일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개선하겠다. 방송사와 외주사, 제작사와 스태프 사이의 거래와 고용 관계를 제도화하는 데 주력하겠다. 계약 관계에서 제도가 개선되면 처우 등 많은 문제가 순차적으로 풀릴 것이라 본다.
“외주사 스태프와 작가는 엄연한 노동자”현재도 표준계약서가 있다. 방송사들이 이를 무시하고 안 쓸 뿐이다.맞다. 방통위가 일방적으로 강제할 순 없다. 외주사들의 경우 더 그렇다. 다만 방송사 재허가·재승인 항목에 계약서 문제를 평가 항목으로 넣을 순 있다. 표준계약서가 정착되려면 기본적으로 제작비가 표준화되어야 한다. 현재는 방송사 자체 제작과 외주 제작 사이에 엄청난 단가 차이가 있다. 이것도 차별이다. 차별적 요소를 반영한 표준 단가를 지키고 있는지를 반드시 방송사 재승인·재허가 평가 항목에 넣으려고 한다.
현장 스태프들은 방송사와 외주사의 관계를 개선한들, 그 온기가 아래 현장 노동자에게까지 내려올 것인지 염려한다.현행 방송 제작 관행이 최정점에 강자가 있고 강자가 많이 가져가는 것으로 세팅되어 있다. 약자의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상생의 생태계를 만들 수 없다. 약자도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려면 룰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 법으로 강제할 부분과 정책으로 유도할 부분이 각각 다르겠지만 필요하다면 법도 만들고 제도나 환경도 개선하겠다. 독립PD의 죽음과 상품권 페이 같은 문제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이제 더 이상 최정점의 방송사들도 묵인만 할 순 없다.
방송사들은 여전히 외주사 스태프나 작가들이 노동자가 아닌 ‘프리랜서’라고 주장한다.노동자성 인정 여부는 약자 편에서 불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풀어야 한다. 그들은 노동자다. 인정이 안 된다면 개선해야 한다. SBS의 사과나 MBC 최승호 사장의 발표는 방송사들도 이 부분을 전향적으로 인정하고, 약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통위가 그 약속이 구속력을 갖도록 이행을 점검하겠다.
방송사의 상품권은 대부분 직접 영업을 하는 협찬으로 마련된다. 광고 영업은 대행할 수 있는데 협찬 영업은 직접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에 미비점이 있어 보인다.협찬 영업에 대한 문제제기는 2년 전부터 있었다. 다만 규제에는 양면성이 있다. 공익성 확보 차원에서 유용하겠지만 자율성은 위축될 수 있다. 그래도 부작용이 생긴다면 법 개정 전에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고시 개정이나 시행령 개정까지 검토하겠다. 협찬 제도 개선안은 마련되어 검토 중이다.
“제작 환경 개선은 대통령 관심 사항” 방송사와 외주사의 불공정한 관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방송 스태프들의 문제는 수십 년 된 문제다. 늘 그때뿐이고, 바뀌지 않았다.이번에 5개 부처가 합동으로 방송 제작 실태를 들여다본 것은 지난 10년 동안 없었던 일이고 정부 차원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방송 제작 생태계 제도 개선은 대통령 관심 사항이고 국무총리도 챙기고 있다. 제도가 개선되었다고 판단할 때까지 방송통신위원회가 계속 챙겨나가겠다.
지상파 방송의 보도 기능이 강력하니 관료들이 눈치를 보느라 이 문제가 방치된 것이 아니냔 시각도 있다.다른 부처는 방송사 무서워한다.(웃음) 공정방송을 만들겠다는 지상파 방송들이 자기들만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방송의 특수성을 강조하다가 그동안엔 제도 개선이 안 됐는데 그렇게 되면 상품권 페이처럼 약자들만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제는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이어야 한다. 터놓고 고민을 나누고 개선 방안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제 왔다. 지금껏 지상파 방송의 행태는 명백한 고통의 전가, 위험의 외주화였다. 그걸 인식해야 한다. ‘광고 시장이 어렵다, 지상파 방송이 어렵다’는 얘기는 핑계가 될 수 없다. 뭘 점검하고, 어떤 것을 개선하는지 1년만 지켜봐달라. 반드시 악습을 끊어야 한다. 그런 것들과 결별하라는 게 촛불혁명이 정부에 준 정신 아닌가.
글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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