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의 노무현읽기
의원들의 지역구 생색용으로 불투명 예산… 대통령과 국민이 직거래하겠다는 건 옳은가
노무현 대통령은 3월24일 행정자치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특별교부금을 보통교부금에 흡수하는 폐지방안까지 포함해 근본적 개선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특별교부금 제도가 행정과 정치에 대한 신뢰를 깎아먹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특별교부금으로 지역에 가서 큰소리치거나 행정자치부 장관이 자의적으로 쓸 수 있는 부분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의원 빼내기 사례금으로도 악용
특별교부금(정확한 이름은 특별교부세인데 대부분 특별교부금이라고 한다)은 정부 예산 가운데 특별한 용도를 정해두지 않았다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시·군·구에 배정해주는 돈을 말한다. 이를테면 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대구처럼 특별한 재해지원 필요성이 생겼을 때 특별교부금을 활용할 수 있다. 대통령이 민생현장을 순시하면서 민원인들에게 즉석 선물을 할 때 특별교부금으로 뒷받침하기도 한다. 행정자치부가 관리하며 2003년 예산기준으로 1조1800억원이니 규모가 꽤 크다.
이러한 특별교부금을 두고 노 대통령이 “행정과 정치의 신뢰를 깎아먹는다”고 문제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특별교부금이 재해대책 등의 용도로 쓰였지만, 상당한 액수가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생색용으로 분배해왔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 때 의원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몇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노인정 몇개를 지었으며…”라고 홍보해온 것들이 특별교부금을 따서 생색을 내온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린 게 아니라 지역구 사업에 쓰는 것인 만큼 이런 행태를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그러나 특별교부금의 사용내역을 보면 뭔가 투명하지 못한 구석들이 있었다.
김홍신 의원(한나라당)이 2000년에 행자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1999년 기준으로 당시 여권 실세인 김홍일·한화갑 의원의 지역구인 전남 목포에 비교적 거액인 29억2200만원이 배정됐다. 당시 총리이던 김종필 의원, 김봉호 당시 국회부의장, 김옥두·박상천 의원 등 여권 중진의 지역구에도 22억원 이상이 돌아갔다. 한나라당 중진인 박희태·하순봉·목요상 의원과 양정규 전 의원 등의 지역구도 20억∼33억원을 받았다.
그 무렵에는 김대중 정부의 야당 의원 빼가기가 정치쟁점이 된 바 있는데,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국민회의나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권정달·이택석·정영훈·황학수·송훈석 의원의 지역구에도 23억∼37억원이 배정됐다. 정권쪽이 특별교부금을 ‘의원 빼내기 사례금’으로 이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산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청와대와 정치권이 특별교부금을 줄 테니 도와달라는 식의 음성거래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비판해왔다. 실제로 정부는 내역 공개를 극구 꺼렸는데, 김홍신 의원의 자료도 승강이 끝에 ‘비공개로 열람만 하는’ 조건으로 제공된 것이었다. 그런 것을 김 의원이 ‘공익’을 앞세워 일부 내용을 언론에 흘림으로써 그나마 어슴푸레한 윤곽이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따라서 특별교부금 개선 발언은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것 같다. 국민의 세금을 계속해서 밀실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예산제도 개선 이상의 중층적 의미
그러나 이 문제에는 예산제도 개선 이상의 중층적 의미도 담긴 것 같다. 특별교부금이 대통령과 정치권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고리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 대통령이 이로써 의회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려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권 중진 의원들은 특별교부금 폐지 발언을 접하고 “그렇게까지 할 게 뭐 있나”라며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의원들 입장에선 교부금으로 지역구에 생색내던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불편해질 수 있다. 속썩이는 의원들에게 입막음할 유력한 통치수단을 포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노 대통령의 참모들은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자금을 스스로 포기한 결단”이라고 홍보한다. 국회의원들에게 음성적으로 떡값을 나눠주면서 협조를 끌어내는 ‘뒷거래 정치’ 대신 오로지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에 주력한다는 게 홍보논리의 요체다.
사실 노 대통령은 이 결정을 하기에 앞서 나름의 득실계산을 한 것 같다. 정부의 한 예산 전문가에 따르면, 특별교부금 제도가 오래 운영되다 보니 정치권 중진들 중심으로 큰 몫을 챙겨가는 사람들이 으레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원래 받던 사람들은 계속 받아도 딱히 고마워하지 않는 반면, 행여 덜 받거나 못 받는 사람은 무척 서운해하게 마련이다. 즉, ‘떡값으로 활용할 융통성의 폭이 별로 없는데도 계속 쥐고 있으면 뭘 해’ 하는 식의 계산도 했음직하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특별교부금으로 지역에 가서 큰소리를 치거나 할 부분은 없어져야 한다”, “특별교부금을 보통교부금에 흡수하는 폐지방안까지 포함해 검토해야”라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는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에게는 민의를 대변하는 ‘중간도매상’으로서의 입지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건지, 국회의원들 몫까지 빼앗고 대통령 혼자 국민과 직거래하겠다는 이야기인지 하는 따위의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정부가 원하는 법안 통과를 위해 의원들의 협조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의원을 상대로 다양한 형태의 로비를 한다. 대통령이 특정의원의 지역구에 연방정부 차원의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정부기관이 특정 지역에 자리잡도록 한다. 심지어 특정 의원이 지역구에 생색을 내도록 그 지역구 유권자들의 백악관 숙박을 허용하며, 일부 의원에게는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게 해준 적도 과거에 있었다. 즉, 의원들에게 이익을 제공하고 협력을 끌어내는 ‘주고받기’가 미국 민주주의의 한 관행으로 정착돼 있는 셈이다.
새로운 룰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노 대통령은 최근 이라크 전쟁 파병동의안 처리를 위해 국회를 상대로 열심히 뛰고 있다. 대통령이 의안 처리에 협조해달라며 여야 총무·국방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과거 정권에선 별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파병동의안 처리를 놓고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청와대 방침에 반기를 든 것처럼, 노 대통령은 정치권과 잘 협력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이를 두고 “새 정부 출범 뒤 주요 국정 현안과 고위직 인사에서 민주당을 소외시켜놓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면 마음이 내키겠느냐”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런 마당에 특별교부금마저 의원들한테서 빼앗아간다니 “해도 너무 한다”고 불만을 터뜨릴 법한 셈이다.
어쨌든 노 대통령은 특별교부금 문제에서 시작해 대통령과 의회 간 협력관계의 핵심고리인 이익과 돈의 배분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 같다. 독식보다는 나눠먹기가 좀더 민주주의 원리에 가깝다. 다만 투명하고 공정한 룰에 따라 나누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앞으로 새로운 룰을 어떻게 만들지 지켜볼 일이다.
한겨레 정치부 박창식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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