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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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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연설

등록 2015-04-14 07:24 수정 2020-05-02 19:27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관련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던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이는 생소한 풍경이 아니다. 정권이 끝나고 시작되는 시기 푸닥거리의 부작용은 매 정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관(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야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누구에게 이득이 되고 누구에게 손해인지 따지는 데 이골이 나 있지만 장삼이사들의 입장에선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영 알 수 없다. 애초 자원외교 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듯했던 이완구 국무총리는 성완종 회장의 주검이 발견되기 직전 “일본의 뿌리는 백제”라며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운명은 이렇게 얄궂다.

언론은 성완종 회장을 ‘정치인형 기업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 정치의 힘을 노골적으로 빌려야 했던 시대가 있었고,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세태가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 자수성가형 기업인은 직접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비극적 결말을 예상하기 쉬운 이야기인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목전에 두고 보니 보수 정권은 기업과 항상 친밀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중부담-중복지’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하청업체 납품단가 인상과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확대 등 대기업에 부담이 되는 얘기를 대놓고 해버렸다.

야당은 환호했지만 당내에서는 “너무 나갔다”는 얘기가 나왔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섣불리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한 신문은 유승민 원내대표가 거의 이적행위라도 했다는 듯이 굴었다. 그러나 유승민 원내대표의 주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경제전문가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위였다. 그의 발언에 이 정도 울림이 있는 건 오히려 그간 여당이 그야말로 비상식으로 일관해온 것에 대한 피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요구를 유승민 원내대표가 섬세하게 다뤄줬다는 것은 이후 상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세월호를 인양해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는 유가족들의 요구를 교섭단체 연설을 통해 다시 한번 표현했다. 그가 실종자 가족들의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자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돈’으로 논점을 흐린다는 비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유승민 원내대표가 이를 신사적으로 ‘진화’함으로써 부담의 무게를 줄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니 세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다음날 진행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로 옮겨갔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감동적 연설에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이며 제1야당의 당수로서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것인가에 눈길이 쏠린 것이다. 문재인 대표는 ‘경제’라는 말을 99번이나 사용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 등을 통해 ‘소득주도 성장’의 근거가 될 만한 다양한 숫자를 언급했지만 유승민 원내대표를 넘어서는 감동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경제전문가를 상대로 주눅이 들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줬다. ‘연설 대결’로만 본다면 1전 1패다.

그래도 괜찮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고 모든 연설이 언제나 감동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문재인 대표가 대안적 담론을 가진 ‘유능한 경제정당’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대중적 신뢰를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 동교동계가 어쨌다는 얘기가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낫다. 그러나 더 이상 실수는 없어야 한다. “국회의원이 400명은 돼야 한다”는 발언은 농담 비슷한 것이었다며 어물쩍 넘길 만한 게 아니었다. 제1야당 대표이자 유력 대권주자로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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