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진료는 의사에게 역사는 역사학자에게

유사역사학
등록 2017-06-13 07:32 수정 2020-05-02 19:28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 도종환 의원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후보 지명 직후 일각에서 그의 역사관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이른바 ‘유사역사학’에 지나치게 경도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도 후보자는 박근혜 정권 ‘블랙리스트’ 폭로에 앞장섰고, 국정교과서 반대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문화정책 및 장애인정책에 대한 식견뿐 아니라 정무·행정적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래서 처음엔 문재인 정부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최선의 카드란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유사역사학’이라는 불씨가 댕겼다. 기름을 부은 건 후보자 본인이다. 도 후보자는 최근 와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을 향한 비판에 대해 “‘동북아 고대역사지도 사업’이 중단되자 징계를 받은 일부 학자들과 제자들이 ‘맺힌 것’을 풀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해석하면서 “확실히 싸워야 할 문제가 있으면 싸우겠다”고 날을 세웠다.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자 ‘수라도’(修羅道)가 열렸다. “역시 ‘환빠’였다”는 격앙된 반응부터 “‘친일식민사학’을 쓸어버릴 역대급 장관 후보”라는 칭찬까지, 졸지에 인사 문제가 ‘역사전쟁’으로 비화하고 말았다. 여기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성명을 내기에 이른다. “도종환 의원이 문화부 장관으로 내정되자 식민사학과 한 몸인 이른바 보수·진보 언론이 손을 잡고 공격하고 있다. 식민사학 해체 없이 대한민국은 정상국가가 될 수 없다.”

이 글에서 ‘민족사관’ 대 ‘식민사관’, 또는 ‘실증역사학’ 대 ‘유사역사학’의 다양한 쟁점을 하나하나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정황을 종합해보면, 도종환 후보자가 (알려졌다시피 명백한 위서다)를 덮어놓고 맹신하는 이른바 ‘환빠’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고대 한반도 영토를 터무니없이 과장하는 관점에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왜 문제인가?

우리는 어느 장관이 크리스천이든 불교 신자이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헌법은 개인의 종교,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며 공인 역시 마찬가지다. 한편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타인의 자유 또는 ‘공적 합의’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성숙한 현대국가에서 공히 관철되는 공적 합의 중 하나가 바로 학문 공동체의 자율성이다. 권력이 학문적 논의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원칙. 물론 현실에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연구비 같은 수단을 통해 학문 공동체를 ‘통제’한다는 사실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라면 학문적 쟁점에 권력이 직접 개입해 결론을 내리거나 유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애당초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왜 문제였을까? 도종환 의원이나 이덕일 소장 같은 이는 ‘식민사학’이란 이유에서 국정교과서를 반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위험천만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트로핌 리센코 같은 자들은 바로 이런 토양에서 태어난다. 리센코는 사이비 유전학자였지만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인정받아 소비에트 과학계의 정점에 섰고, 끝내 생물학과 농업에 재앙적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당위에 기반한 서사’가 ‘사실에 기반한 과학’을 얼마나 무참히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문제인 근본적 이유는 ‘식민사학’이기 때문이 아니다. 권력남용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탁월한 가치관일지라도 정치권력이 학문의 내용에 직접 개입하는 사건은 전부 스캔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도 우려스럽다. 영호남 지역감정을 허물자는 선의에서 비롯됐다고 하지만 이 역시 과해 보인다. 주변국의 ‘역사 왜곡’ 역시 정부가 주연으로 나설 게 아니라 학계의 연구를 꾸준히 지원하는 것으로 족하다. 예술과 학문은 투자하되 간섭하지 않아야 발전한다. 진료는 의사에게, 역사학은 역사학자에게. 정부는 정부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런 나라가 ‘정상국가’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프리랜서 기자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