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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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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돌아온 차떼기당의 망령

총선 앞두고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악재 만난 한나라당… 폭로 배경 둘러싸고 음모론 일며 당내 계파 갈등 격화 조짐
등록 2012-01-12 02:30 수정 2020-05-02 19:26

“누군가 날 우리에 가둬놓고 쳇바퀴를 굴리게 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변한 게 없나.” 한나라당에서 10년 넘게 일한 한 고참 보좌관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무런 의욕이 안 생긴다”고 했다. 웬만한 초선 의원보다 한나라당의 ‘속살’을 잘 아는 그의 한숨엔 절망이 배어 있었다.

박근혜 비대위엔 오히려 호기?
그럴 법도 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테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의 충격이 여전한 가운데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폭로’라는 핵폭탄급 사건이 또 터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은,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가진 한나라당의 고전적이고도 치명적인 약점이다. 한나라당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인 것이다. 특히 “전당대회 때 당 대표 후보 한 명으로부터 300만원이 든 봉투가 와서 곧 돌려준 적이 있다”고 고승덕 의원이 폭로한 사건의 주·조연이 국회와 청와대의 최고위급 인사로 알려져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형국이 됐다. 돈봉투를 들려보낸 이는 박희태 국회의장, ‘봉투 배달자’는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이라는 것이다. 김 수석은 박 의장이 한나라당 대표를 지낼 때 비서실장이었다.
박희태 의장은 “전혀 모르는 일이고 나하고는 관계없다”고 했다. 김효재 수석은 “고승덕 의원과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고, 접촉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이를 두고 누리꾼들은 선관위 사이버테러 사건에 빗대 “(의원이 모른다고 하면) 비서가 한 일이냐”고 비꼬았다. 고 의원은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협조해 진실을 밝히겠다”며 ‘실체’에 관해선 입을 다물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고 의원에게 참고인 자격으로 1월8일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고 의원이 얼마나 ‘성실하게 협조’하느냐에 따라, 검찰 수사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전당대회를 ‘돈잔치’로 치렀다면, 돈을 준 사람이든 받은 사람이든 법과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한나라당의 4·11 총선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대형 악재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박근혜 비대위가 연일 ‘인적 쇄신’을 부르짖는 가운데 이런 폭로가 터져나왔다는 시점의 미묘함 탓에 한나라당 안에선 오히려 ‘호기’를 맞았다는 말도 나온다. 특히 박근혜 비대위원장으로선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상황이라는 해석도 퍼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진실 규명의 책임이 검찰에 넘어갔고, 박 비대위원장은 불거진 의혹에 대한 여론, 검찰 수사 결과 등에 따라 당 쇄신을 추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고 의원의 폭로가 알려지자마자 박 비대위원장은 이 사건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그는 1월5일 비대위 회의에서 “국민 사이에서 의혹이 확산하기 전에 신속하게 진실을 밝혀 의혹을 털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회의 참석자들은 한나라당이 자체적으로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으나, “당내 기구에 맡기면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의혹을 해소할 수 없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었다고 한다. 박 비대위원장은 당 대표 때인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진 의원인 김덕룡·박성범 의원이 공천헌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즉각 긴급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이들을 검찰에 수사 의뢰키로 결정한 ‘경험’이 있다. 이런 발빠른 대응은 ‘자정 노력’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한나라당 지지율도 40%대를 유지해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에도 박 전 대표의 수사 의뢰 결정은, ‘일단 뭉개고 보자’는 식이던 전임 지도부의 사이버테러 사건 대응과 비교돼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

2008년 7월3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박희태 현 국회의장(왼쪽 둘째)이 당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2009년 9월까지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그는 당시 전당대회 때 돈봉투를 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2008년 7월3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박희태 현 국회의장(왼쪽 둘째)이 당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2009년 9월까지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그는 당시 전당대회 때 돈봉투를 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왜 3년 전에는 침묵했나

검찰이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얼마나 밝혀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폭로 정국이 고 의원과 박 비대위원장이 의도했든 아니든, 사전에 교감을 했든 아니든 서로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일단 고 의원의 폭로가 이명박계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도 박 비대위원장으로선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김종인·이상돈 비대위원 등 박근혜 비대위 인사들은 이명박계 중진 의원 등 ‘구주류’의 용퇴를 주장해왔다. 이에 일부 이명박계 인사들은 집단행동까지 경고하며 반발해왔다. 그런데 돈봉투를 주고받은 이들은, 현재까지 거론된 인물과 당내 세력분포를 고려할 때 이명박계가 대부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비대위는 이들을 ‘물갈이’할 더없이 좋은 명분을 얻는 반면 이명박계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고 의원의 폭로에 정치적 노림수가 있었다는 뒷말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그가 돈봉투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인식했다면, 봉투를 건네받은 시점에 이를 공개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는 사건이 벌어진 지 3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런 사실을 밝혔다. 왜 그랬을까? 고 의원은 이상득계로 분류되며, 지역구는 한나라당에서 ‘금싸라기’로 불리는 서울 서초을이다. 쇄신론이 비등한 상황에서 고 의원이 4월 총선 때 다시 이 지역 공천을 받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고 의원의 뒤늦은 폭로를 두고 “박근혜계로 넘어가 공천을 보장받으려는 것”이라는 말이 한나라당에서 나오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다.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계파 갈등은 다시 불붙을 태세다. 이명박계의 한 의원은 “이명박계를 비리집단으로 낙인찍어 도매금으로 팔아먹으려는 것 같다. 쇄신은 고도의 정치적 과정인데, 비대위는 당내 갈등과 소란만 부채질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이명박계의 또 다른 의원은 “쇄신을 하겠다면서 정적만 제거하려고 든다. 돈봉투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면, 국민적 의혹을 받는 정수장학회 사건도 털어야 쇄신 아니냐”며 박 비대위원장을 향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박 비대위원장의 잠재적 경쟁자로 꼽히는 이재오 의원과 정몽준·홍준표 전 대표, 김문수 경기지사 등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이들은 박근혜 비대위의 활동에 비판적인 시각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런 의견을 나누기 위한 회동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준 전 대표는 1월8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비대위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겠다고 별렀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명박계 의원들의 정서, 다소 약해지고 있는 박 비대위원장의 지지율 등을 고려하면 이들이 ‘반박근혜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어쨌거나 공천과 당 주도권을 둘러싼 ‘박근혜계 대 비박근혜계’의 싸움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된 듯하다.

김문수·이재오·정몽준·홍준표, ‘반박근혜 쿠데타’?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한나라당과 정치를 둘러싼) 환경은 변화했는데, 왜 밥그릇을 찾으려는 한나라당의 메커니즘은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이 당은, 당이 국민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세력이 어떻게 생존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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