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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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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사회당 선생님들”

세상에선 무명 정당이지만, ‘강남 판자촌’에선 제1야당 대접 받는 사회당… ‘동아리 정당’ 비아냥에도 13년을 지켜온 소수자운동, 기본소득의 정당
등록 2011-07-14 07:26 수정 2020-05-02 19:26

“아이고 또 오셨소.”
마주치는 주민마다 손을 잡았다. “이것 좀 먹어보라”며 팔목을 잡아끄는 이도 있었다. 국회의원은커녕 지방의원 1명 없는 ‘무명 정당’ 사회당이었지만, ‘강남 판자촌’ 서울 포이동에서만큼은 제1야당이 안 부러워 보였다. ‘사회당을 아느냐’는 물음에 266번지 화재 현장 앞에서 마주친 송희수(63)씨가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한텐 사회당만큼 고마운 당이 없소.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통사정하는 법밖에 모르던 우리한테 집 안 뺏기는 법, 관청에 가서 당당하게 따지는 법을 가르쳐준 게 그 당 사람들이오.”

선거 성적표는 초라할지라도

사회당에 포이동은 7년 전부터 청소년 공부방 활동 등을 통해 주민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다져온 ‘전략 지역’이다. 안효상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지난 7월4일에 이어 사흘 만인 7일 이곳을 다시 찾은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조철순(53) 포이동 사수대책위원장은 사회당원들을 가리켜 “너무도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학교 끝나면 갈 데도 없는 아이들을 위해 공부방을 만들어 돌봐줬다. 사회당 선생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조 위원장의 큼지막한 눈엔 어느새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 지난 7월7일 서울 포이동 판자촌 화재사고 현장을 방문한 사회당원들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위문품으로 가져온 텔레비전을 운반하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 지난 7월7일 서울 포이동 판자촌 화재사고 현장을 방문한 사회당원들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위문품으로 가져온 텔레비전을 운반하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사회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포이동에서와 달리 인색하기만 하다. 일단 당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는 사람들이 극소수다. 알 만한 사람들은 ‘운동권 동우회’ ‘동아리 정당’이라 비웃는다. 당세나 정치적 영향력이 같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비해 턱없이 미약한 탓이다. 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사회당이 거둔 초라한 성적표도 이런 평가가 굳어지게 만든 원인이다.

사회당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 금민씨를 후보로 내세워 1만8223표(0.1%)를 얻었다. 허경영 공화당 후보가 얻은 표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이듬해 18대 총선에는 지역구 후보 없이 비례대표 후보만 출마시켜 3만5496표를 얻었다. 15개 정당 가운데 12등이었다. 지난해 7·28 서울 은평을 보궐선거에선 ‘분열주의 정당’이란 비난을 감수해가며 독자 후보를 내세웠지만 0.5%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동요하고 흔들릴 법도 했지만 지도부와 당원들은 의연했다. 당시를 돌이키며 안효상 대표는 “우리의 가치와 방향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오히려 당 결속의 계기가 됐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보정당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사회당은 올해 초 진보 대통합을 위한 연석회의에 초대받았다. 정치적 지분에 비하면 턱없이 과도한 대접이란 지적이 있었지만, 사회당은 주눅들지 않고 제 목소리를 냈다.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어정쩡한 타협으로 봉합된 5·31 연석회의 최종 합의문에 사회당은 결국 서명하지 않았다. 합의문이 사회당 중앙위원회가 지난 4월 결정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관한 중앙위원회 결정서’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존재감 없는 소수정당이 정치적 고립을 자초한다’는 외부의 비아냥은 잠시였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논의가 진통을 겪고 진보신당의 분당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사회당은 진보신당 독자파의 유력한 제휴 파트너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화위복이었다. 진보 진영 내부에선 언론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도 13년이란 긴 세월을 꿋꿋이 버텨온 소수정당의 생존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활동가 당원 200~300명

사회당은 1998년 11월 ‘노동자·민중의 정당’을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청년진보당’이란 이름으로 창당했다. 창당 시기로 따지면 민주노동당(2000년)보다 빨랐다. 민중민주(PD) 계열 학생운동권에서도 반(反)민족해방(NL) 노선의 강경파가 주도한 정당이었다. 이들의 정치색은 2001년 8월 3차 당대회에서 사회당으로 당명을 개정하면서 ‘자본주의 반대, 조선노동당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에서도 확인된다. 사회당은 2002년 지방선거와 16대 대선에 후보를 출마시켰으나 참패했다.

2003년부터는 ‘가장 차별받는 사람과 가장 먼저 연대한다’는 원칙 아래 평화·생태주의 노선,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를 당의 주력 활동으로 삼았다. 한국이라크평화지원팀을 운영하고 장애인이동권운동에 적극 결합해 사회적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확장되진 않았다. ‘희망사회당’(2006년 4월)을 거쳐 ‘한국사회당’(2006년 10월)으로, 다시 ‘사회당’(2008년)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에는 ‘사회적 공화주의’라는 정치이념과 ‘기본소득’(소득의 많고 적음이나 노동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일정하게 지급하는 소득) 강령을 전면에 내걸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진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사이 1600여 명으로 시작한 당원 규모(1998년 청년진보당)는 지난 6월 말 현재 5759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당원 명부상의 수치일 뿐 실제 당비를 납부하고 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간당원 규모는 지속적으로 줄어왔다는 게 중평이다. 실제 사회당은 2000년 총선 직후와 2008년 진보신당 창당을 전후해 노선 갈등에 휘말리면서 두 차례 대규모 탈당 사태를 겪었다. 탈당자 대부분이 당 활동에 적극적인 진성 당원들이란 점에서 타격이 컸다.

사회당원들 가운데 당원 대회에 참가해 의결권을 행사하고, 당이 주최하는 집회나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활동가 당원’ 규모는 200~300명 정도다. 수는 적지만 당에 대한 헌신성과 활동력은 어느 정당원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지난해 6·2 지방선거 이후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압력에 직면한 진보신당 일각에서 사회당과의 선통합론이 나온 것도 민주노동당 주류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려면 사회당 활동가들의 ‘수혈’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속내가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 지난 6월26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사회당 제15차 당대회에서 중앙당 지도부와 서울시당 당원들이 서울시당기를 앞세우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회당 제공

» 지난 6월26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사회당 제15차 당대회에서 중앙당 지도부와 서울시당 당원들이 서울시당기를 앞세우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회당 제공

“커밍아웃하는 사람 보듯”

당원들은 20~40대에 걸쳐 있지만, 주력을 이루는 것은 30대다. 1990년대 중반 전성기를 누린 학생정치조직 활동을 통해 당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직장인, 사회운동단체 활동가 등으로 변신한 이들은 매달 1만~10만원씩 당비를 내며 국고 지원 없이 운영되는 빈한한 당의 살림살이를 지탱하고 있다.

비정규직 병원노동자 지원단체에서 일하는 이은영(38)씨는 “아이 낳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정당 활동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지만 당이 지켜온 가치와 노선이 옳다는 확신, 바르고 헌신적인 활동가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당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 발벗고 나서는 편”이라고 했다. 40대 당원인 이영기(41)씨는 중앙당 당직자로 일하다가 생계 문제 때문에 인천의 한 사회단체로 자리를 옮긴 경우다. 그는 “10년 넘게 당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에 의미 있는 획을 그었다고 자부한다”며 “북한의 경직된 사회주의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기본소득과 보편적 복지를 전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킨 것도 사회당이 맺은 소중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들의 자부심은 소수정당원으로서의 설움과 고통을 감수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기도 했다. 한 당원은 “어떤 모임을 가든 사회당원이라고 말할 때면 커밍아웃하는 사람 바라보듯 뜨악한 시선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조영권 대변인은 “친지들에게 당원 가입이라도 권유할라치면 ‘권영길·노회찬이 있는 당도 아니고, 왜 하필 그 당이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며 “알 만한 사람들에겐 강령이라도 얘기하며 설득하겠지만, 친척들 앞에선 정말 난감하다”고 했다.

이런 당원들에게 “사회당이 과연 정당이냐”는 말처럼 아픈 지적은 없다. 사회당의 독자 노선을 비판하는 쪽에선 “선거에 나가 강령·정책에 대해 유의미한 평가를 못 받는 조직이라면 정당이라기보다 정치운동단체에 가깝다”고 깎아내린다.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의 지원과 지지를 못 받는 사실상의 운동권 동아리”란 비판도 단골로 따라붙는다. 하지만 사회당 사람들도 할 말은 있다. “득표와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진보의 원칙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현실주의 노선이라 정당화할 수 있느냐”(이영기)는 것이다.

‘제2의 사회당’ 극복할까

사회당은 지난 6월26일 당대회에서 “9월 말까지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에 동의하는 정치세력 및 개인들과 함께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는 특별결의문을 채택했다. 내심 기대하는 것은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거부하는 진보신당 독자파와 함께 제2의 진보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다. 진보신당 내부의 흐름(868호 표지이야기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진보 통합’ 참조)으로 미뤄 이들의 기대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관건은 재창당에 성공하더라도 선거라는 경쟁 국면에서 지난 18대 총선에서처럼 유력 진보정당으로의 표쏠림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제2의 진보정당’에 대해 벌써부터 ‘제2의 사회당’이 될 것이란 우려가 진영 내부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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