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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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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닥거리 경제

등록 2009-02-05 07:06 수정 2020-05-02 19:25

나는 지금 박사 논문 지도교수가 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교수가 예전에 속해있던 금융조사 분석기관에서 일하는 이들도 함께했다. 단연코 뜨거운 화제 1위는 한국 정부의 ‘미네르바 체포 소식’이었다. 역시 선수들이었는지라 사건을 보는 시각에 남다른 것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야말로 현재 경제위기를 통제할 능력과 자신감을 상실한 전세계 지배 세력의 불안감의 극적 표출이라는 것이 그날 이야기의 대충의 결론이었다.

기우제 올리는 신관의 불안감

푸닥거리 경제.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푸닥거리 경제.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2차 대전 이후의 현대 자본주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경제 시스템의 조종 능력’에 그 정당성의 근거를 두어왔다.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의 작동을 성공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방향만 다를 뿐이지 케인스주의자들이나 하이에크주의자들이나 똑같다. 자신들이야말로 경제의 작동을 ‘정밀하게, 과학적으로, 수량적으로’ 관찰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의 목소리는 오히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쪽이 더 시끄러웠다. 따라서, 하늘의 강우량이 그해 농사의 풍흉에 절대적이던 아득한 옛날, 신과 통해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신관들이 그러했듯이, 이들도 지난 몇십 년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 작동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지금 벌어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위기로 이들의 능력이라는 게 순식간에 거덜이 나고 만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홍수든 가뭄이든 책임은 무정한 하늘에 있지 열심히 기우제 올린 제사장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 경제학, 혹자가 붙인 이름으로 ‘푸닥거리 경제학’(voodoo economics)의 결과라는 혐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난 십 몇 년간 벌어진 이른바 ‘금융 혁명’은 누구의 눈에도 각종 금융 사기와 대규모 금융 거품으로 이어질 것이 명백했지만, 그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이들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너희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지금은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게 된 ‘신경제’(new economy)니 ‘검은 물질’(dark matter)이니 하는 허망한 소리까지 떠들어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전 지구의 경제가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야말로 ‘검은 구멍’에 빠져버렸고, 모래알만큼 많은 경제학 박사들은 모두 침묵 모드로 들어가버렸다.

요즘 나 등 여러 유명 경제 매체의 지면에는 ‘혹시 현대 문명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를 떨쳐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글들이 사설에 칼럼에 분석 기사에 넘쳐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안습’인 경우가 많다. 이는 악몽이다. 자신들이 키와 노를 쥐고 있다고 믿었던 지구 경제라는 배가 알고 보니 키질·노질 따위와는 상관도 없이 그저 급류에 떠밀려 표류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이제 천길 폭포로 빠져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전세계의 경제 담론에 유령처럼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은 공포의 고백

한국에서도 이른바 ‘경제 운영 기성 권력’(economic establishment)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관계, 학계, 업계, 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사실상 지난 몇 년간 한국의 경제 운영 방향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은 한국 경제가 위기의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능력 상태에 빠져든 상태다. 거창한 기우제를 무수히 지냈건만 몇 년째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는 나라가 있다 하자. 그곳의 신관들은 얼마나 엉덩이가 따끔거릴까. 이 분위기 파악 못한 미네르바라는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해 마땅히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그날 저녁자리의 중론이었다.

이것이 미네르바 사건의 ‘지구적 보편성’이지만, 이 사건의 ‘한국적 특수성’도 지적되었다. 지금 불안한 것이 한국 정부뿐인가. 이 공포 속에서도 모든 정부는 자신들의 상황 통제력이 불신당할까봐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표정 관리에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 정부는 ‘믿거나 말거나’(oddly enough)난에 실린 이 엽기적인 사건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처해 있는지를 전세계에 공포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앞서가는 ‘선진화’ 정권이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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