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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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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까지 새까맣게 타버린 당신!

등록 2003-01-30 15:00 수정 2020-05-02 19:23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님께… “이제는 내면화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야 할 때”

김상사님.

미루고 미루던 편지를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에 역사이야기를 연재할 때부터 마음먹은 편지를 베트남에서 돌아오자마자 쓰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모은 성금으로 지은 한-베 평화공원 준공식에 참석하고, 또 앞으로 짓게 될 (가칭)평화역사기념관의 준비를 위해 일주일간 베트남을 다녀온 것이지요. 지난 3년간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뤄오던 베트남행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습니다. 사람보다 자연은 더 회복이 빠른 모양입니다. 베트남, 그 넉넉하고 파란 자연에서는 어디에서도 30년의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몸과 마음속에 전쟁의 상처는 여전한 듯싶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그리고 우리 한국에서도요.

만주와 베트남, 모질게 재현된 역사

이 민간인 학살이라는 참으로 아픈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는 잊힌 전쟁이었지요. 참 얄궂은 것은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제기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노근리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지요. 베트남과 노근리, 한곳에서 우리는 가해자였고, 다른 한곳에서 우리는 피해자였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것 같지만 사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사건입니다. 동맹군이라는 이름의 군대가 주둔국의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눈 것이야 다 마찬가지 아니었던가요 반드시 해결돼야 할 우리의 노근리는 베트남 중부지방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민간인 학살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제 또래쯤 된 사람들, 막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을 통해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를 목청껏 부르며 골목길을 누비던 그때의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럴싸한 무용담으로 포장된 한국군의 보복전술, 아군을 터럭만큼이라도 다치게 하면 근처 마을들을 아작냈다는 이야기야 동네 이발소에서, 중국집에서, 교련시간에, 그리고 나이가 좀 더 들어선 군대와 예비군교육장에서 너무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얘기였으니까요.

어린 시절 즐겨보던 서부극의 기병대 아저씨들이 “아-와와와와”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인디언들을 몽땅 처치하는 걸 보며 환호하던 저나 제 친구들은, 맹호가 세냐 청룡이 세냐, 아니다, 백마가 최고다 해가며 베트콩이란 이름을 가진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빨갱이들을 우리 국군 아저씨들이 싸그리 쓸어버리기를 기원했습니다. 종종 우리는 저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파월장병 아저씨들의 무용담을 마치 자기가 세운 전과인 양 자랑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우리 국군 아저씨들이 지켜주었음에도 무능한 ‘자유월남’ 정권은 ‘패망’했고, 베트남 전쟁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벽하게 잊혔습니다.

1999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이야기가 알려졌을 때, 저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을 통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접하면서 저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혹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전공한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일본군은 간도가 피바다에 잠길 정도로 엄청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지요.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며 친해졌는데 그놈들이 뒤돌아서더니 수류탄을 까던지고 도망가더라는 이야기는 독립군 마을의 소년 열사 이야기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역사란 게 이렇게 모질게 재현되는 것인가요

푸옌성 뚜이호아에서 평화공원 준공식이 있던 다음날, 우리는 푸옌성 인민위원회를 방문했습니다. 푸옌성에서 최고의 실력자인 베트남공산당 푸옌성위원회 서기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 분은 준공식 날 우연히 제 왼쪽에 앉았는데, 와이셔츠 위로 그의 뒷목 오른쪽에 선명한 총탄 자국이 보였지요. 그는 베트콩 출신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참전군인들도 만났다고 합니다. 서로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들고 마주 싸운 따이한들을 베트남의 정글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만난 거지요. 그는 참전군인들도 저희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과 베트남 인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접는다’의 의미

그는 이어서 베트남 정부가 왜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진실위원회 활동을 해온 지난 3년 동안 가장 궁금하기도 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더 많은 경제원조와 투자를 끌어내기 위해 과거의 민감한 문제들, 피해자들의 사무친 원한을 혹시 구석으로 밀어놓고 덮어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솔직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는 우리 일행이나 자기네 베트남이나 민간인 학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의지는 똑같지만, 다만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실위원회나 이 문제를 파헤치는 방식이라면, 전쟁의 참화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너무 큰 고통을 당한 자기네는 일단 이 아픔을 잊고 벗어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일행은 맹호부대가 주둔한 빈딘성 따이빈사로 향했습니다. ‘사’는 우리나라로 치면 읍·면 단위에 해당하는 곳인데, 이곳의 공산당 서기장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그 역시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잃은 사람입니다. 우리 일행은 380여명이 숨진 자리에 세워진 고자이 언덕의 위령비에 참배한 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운명의 날 따이한들이 건너왔다는 작은 다리를 옆으로 끼고, 우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사철나무 비슷한 나무가 양쪽으로 키보다 높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호젓한 산책길로야 더없이 좋을 그 길에서 저는 갑자기 꼭 37년 전 총을 들고 이 길을 걸어갔을 따이한 병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을에서는 빼곡한 나뭇잎 사이로 내 움직임을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나뭇잎에 가려 마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때 마을에 베트콩이 있어 방아쇠를 당긴다면… 무서워졌습니다. 너무 떨렸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끔찍한 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김 상사님, 참 이상합니다. 일본군이 간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전후 국군이나 경찰, 우익치안단체, 청년단체들이 행한 민간인 학살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두려움과 그 현장에 내동댕이쳐진 우리 사병들에 대한 연민이 엄습해왔습니다. 대학 강단에서 베트남전과 관련한 강의를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스무살 남짓한 그때, 그 병사들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너무나 귀여운,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여드름 자국이 채 가시지 않은 저 학생들보다 더 어린 나이였구나. 아직 삶의 방향이 잡히지 않은 어린 청년들을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면서, 베트남이 어떤 곳인지, 무얼 하는 곳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보이는 것은 모두 적이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라’라고 가르쳤을 뿐이지요. 젊은이들을 베트남의 정글로 보낸 자가 18년,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해 군내에서 승승장구한 자들이 정권을 이어받아 12년을 보낸 나라에서 정작 참전군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든 아무도 괘념치 않았습니다. 피부에 반점이 돋고, 이유 없이 아프고, 그리고 자식들마저 픽픽 쓰러져도 그게 고엽제 때문이란 것을 안 것도 미국에서 고엽제가 문제가 되고 한참이 지나서였습니다.

생존자 할머니들과의 만남

서기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아저씨는 좁은 방안을 가득 메운 우리에게 잔잔한 어조로 그때 그 일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마을사람들을 모아놓은 데에 한국군 가운데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던졌고, 그것은 자기 발에 맞은 뒤 굴러가더니 꽝 하는 소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방안에 자기와 어머니, 누이동생이 누워 있었답니다. 누이동생과 어머니는 모두 두 다리가 잘려나갔습니다. 먼저 누이동생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네 동생이 죽었나 보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마을사람들은 동생을 거적으로 말아내갔습니다. 방안에 단둘이 남았고, 처음에는 큰 소리로 울부짖던 어머니의 비명은 점점 낮은 신음으로 변하더니 동생을 묻으러 간 마을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낮은 신음마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다시 어머니를 내갔습니다. 온몸에 파편이 박힌 그는 천애의 고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이미 해방전쟁에 참가해서 전사한 뒤였답니다. 몸이 회복되고 그는 산으로 들어가 총을 잡았습니다. 이 단단한 과거의 소년 베트콩은 애써 담담하게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틀림없습니다. 그는 오늘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한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30여년 만에 몸에 박힌 파편을 제거했다지만, 마음에 박힌 파편이야 어떤 명의가 제거해줄 수 있겠습니까

옆방에는 곱게 단장한 할머니 네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두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들이셨지요. 마음의 상처를 안고 미친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들은 다 내가 그때 죽어야 했다고 하십니다. 한국과 베트남, 차이가 없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우리는 곧 떠나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인사를 드리라고 해서 몇 사람이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갔습니다. 막막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도대체 이런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휘청 무릎이 꺾이면서 저는 분홍색 아오자이를 입은 할머니의 뼈만 남은 무릎 위로 고꾸라졌습니다. 분홍색 옷이 까맣게 보이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어떻게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따라온 외신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인터뷰를 하자고 했습니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한답시고 아픈 상처를 헤집고 다니는 우리나, 생생한 현장의 육성을 전한답시고 이런 때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이나 참 사람되기 글러먹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저는 베트남전이나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다루면서 증언도 많이 듣고 끔찍한 사진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능한 한 끔찍한 사건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잖으면 도저히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한 3년 이렇게 도닦듯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베트남에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괜히 별로 덥지도 않은 날씨만 탓해봅니다.

호치민시로 돌아와서는 전쟁유물박물관을 찾았습니다. 박물관에서는 베트남의 고엽제 피해자와 장기수 선생님 한분을 모셔와 우리와의 만남을 주선해주었습니다. 고엽제 피해자인 둑은 미국에 있을 때 방송 프로에서 본 적이 있는 해맑은 청년이었습니다. 몸이 붙은 샴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샴 쌍둥이 분리수술이라는 것이 둘 다 살아날 확률이 매우 낮답니다. 둑의 형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거의 식물인간 상태라고 합니다. 한국에도 고엽제 피해자가 많다며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자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또 목이 메었습니다. 한번 헝클어진 감정은 날이 바뀌어도 추스려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도 자식 안부는 겁이 나서 잘 물어보지 않아”라던 김 상사님 전우 분의 힘없는 목소리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돈, 그놈의 돈 때문에…

항불전쟁 기간 5년, 항미전쟁 기간 14년, 도합 19년을 악명 높은 콘타오 감옥에서 보낸 판 구앙 홍 할아버지는 우리 사회에서 뵐 수 있는 장기수 선생님들처럼 깐깐하면서도 푸근한 인상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부인 역시 14년간 콘타오 감옥에 수감된 장기수 출신입니다. 무남독녀 외딸은 전쟁기간에 전사했답니다. 그 딸은 작전에 나갔다가 적과 마주쳤는데,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나이 어린 전사를 온몸으로 감싸안아 그를 구하고 하늘나라로 갔다더군요. 잔혹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 싸우던 어머니는 출옥 뒤 딸 소식을 듣고는 정신을 놓아버렸답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는 지금 많이 회복되셨지만, 딸 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힘들어 하신다면서 판 구앙 홍 선생님은 부부가 같이 나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뭐가 우리에게 미안한지, 가해자의 나라에서 온 우리에게 피해자들이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희는 할아버지께 진실위원회가 만든 티셔츠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 옷에는 ‘미안해요 베트남’이란 말이 쓰여 있었지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로만은 안 돼.” 잠시 숨을 고르시더니 할아버지는 “지금도 여러 곳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어. 반전과 평화를 위해 힘써야 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따이빈사 마을의 당서기장 아저씨처럼 아체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로 부모를 잃은 소년들은 지금도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복수심에 불타는 소년전사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이 베트남에 사죄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책임이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김 상사님, 2000년 12월15일 제가 속한 베트남전진실위원회와 김 상사님의 전우들이 민간인 학살 문제를 포함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다시 짚어보는 공동토론회를 했지요. 참전군인들 수천명이 그해 6월에 한겨레신문사를 습격해 격렬한 항의를 벌인 일도 있는 터라 발표장 분위기는 자못 긴장되었습니다. 300석이 넘는 방청석의 대부분은 군복을 입은 참전군인들로 채워졌지요. 제가 발표를 시작한 지 채 5분도 안 돼- 민간인 학살 문제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방청석에서는 “저 새끼 죽여!” “끌어내” “야 이 새끼야, 니 배때기에는 총알 안 들어갈 줄 알어!” 하는 고함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저는 성능 좋은 마이크의 힘을 빌려 30여분에 걸쳐 무사히 발표를 마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겁이 전혀 안 났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제 마음을 지배한 것은 두려움보다는 슬픔이었습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나이에 군복을 입고 이 자리에서 이런 식의 행동을 해야 하다니…. 바쁘게 바쁘게 달려온 우리의 현대사는 한번도 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김 상사님, 김 상사님께서 베트남의 정글에 가신 것은 자유수호나 반공십자군이라는 거창한 명분 때문이 아니었지요. 김 상사님 같은 가난한 농촌의 젊은이들이 머나먼 베트남으로 가신 것은 돈, 그놈의 돈 때문이었습니다. 별을 셋이나 단 한국군 사령관이 받는 돈이 타이군나 필리핀군 소대장인 중위급이 받는 돈에도 못 미치고,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든 한국군 사병들이 제 나라 전쟁을 치르는 베트남군 사병들과 비슷한 돈을 받을 정도로 턱없이 적은 돈을 받았지만, 그래도 한달 50달러 남짓한 돈은 당시의 사정에서는 아주 큰돈이었습니다.

가슴 찢어지던 전화를 기억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의혹이 한창 제기될 무렵, 저는 한 방송사 TV토론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김 상사님의 옛 전우들에게서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 전화의 대부분은 거친 전화였지만, 한분의 전화만큼은 달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드리려고 머나먼 남쪽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는데, 돈 있고 백 있는 놈들은 다 빠지고 자기 같은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데, 그런 자신이 용병이고 학살자냐고. 울음 섞인 전화에 저의 가슴도 찢어졌습니다.

김 상사님.

지난 3년간 진실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김 상사님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말에는 부르르 떨며 분노하셨지만, 김 상사님을 비롯한 파월장병들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이 이제와 생각해보면 베트남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큰 아픔을 주었다는 점은 동의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베트남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베트남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박정희의 정략적인 파병으로 한국사회에 군사독재가 강화되고, 우리 사회 전체가 하나의 병영이 되었다는 거창한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그러나 착하디 착한 우리 남편이 월남 1년 갔다 오더니 영 딴사람이 되었다는 친구분 사모님의 말씀이나, 월남 갔다 온 뒤에는 내 눈에 너무 살기가 등등하다고 한동안 가족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는 김 상사님의 말씀은 잊히지 않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이 없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기념’해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희 진실위원회에서는 베트남에 (가칭)평화역사기념관을 세우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평화역사관을 짓는 일은 저희가 심부름이야 하겠지만, 저희 진실위원회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김 상사님, 김 상사님이 청춘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낸 그 땅을 김 상사님을 모시고 한번 다녀왔으면 합니다. 김 상사님의 소중한 추억이 어린 곳이기도 하고, 또 김 상사님과 가족들의 고통의 뿌리가 내려 있기도 한 그곳, 그리고 김 상사님과 김 상사님의 옛 전우들, 아니 당신들을 그곳에 보낸 자들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김 상사님과 함께 다녀오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바람이 아니라 지난 일주일 제가 만난 모든 베트남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옆집 아주머니처럼 생긴 베트콩 출신 교수들

고통이란 함께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과 서로 총을 겨누던 사람들이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서로 고통을 나누며 당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가 베트남에 가니까 역사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왔다고 호치민시의 역사학 교수 여러 분이 나와주셨습니다. 놀랍게도 그 분들의 대부분은, 정말 옆집 아주머니처럼 생긴 역사박물관장님을 비롯해서 젊은 사람들만 빼놓고는 항미전쟁 기간에 총을 든 베트콩 출신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아픈 역사로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어떤 이유로 만났든 인연을 더욱 소중히 발전시켜가고 싶어하십니다. 고통의 연대, 고통받은 자들이 서로 아픔을 나누며 힘을 모을 때 고통은 가벼워지고, 또 다른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일도 막을 수 있습니다. 김 상사님, 평화역사관 계획이 구체화되는 대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2003년 1월25일

한홍구 올림


독자 여러분께: 베트남 사업으로 과 인연을 맺게 되어 역사이야기를 연재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저도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만,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마감날짜 맞추다보니 같이 뛰어야 할 활동가들에게만 부담을 주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평화역사기념관 일이 조금 틀이 잡힐 때까지 당분간 연재를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과분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그러신 것처럼 평화역사관 사업도 많이 성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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