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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은 본래 한 몸이었다…<좁은 방> 최성민

최성민① 현실의 편린들에 집요하게 다가서는 연속의 과정
등록 2024-05-25 00:54 수정 2024-05-29 08:49
작품집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에 실린 단편 만화 <모노레일 드림>의 한 장면. 최성민 제공

작품집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에 실린 단편 만화 <모노레일 드림>의 한 장면. 최성민 제공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지만 정말 실재하는 것 같다. 또는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초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접근을 멈추지 않는다. 만화가 최성민의 작업은 ‘현실적’이라는 감각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할 정도로 현실에서 쉽게 지나치는 편린들에 집요하게 다가서는 과정의 연속이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흔하게 마주치는 불편함과 기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저 재수가 없었다면서 어떻게든 훌훌 털어내는 대신 왜 일상에서 이러한 감정을 겪게 되는지 작가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기를 반복한다.

일상의 불편함과 기묘함을 놓치지 않아
최성민 작가의 <좁은 방>

최성민 작가의 <좁은 방>


그러한 고민의 끝에 나온 작품은 때로는 에스에프(SF)나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 되기도 하고, 작가의 가장 최근 연재작이자 처음 시도한 장편 웹툰이었던 <좁은 방> 같은 리얼리즘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르는 달라도 최성민 작가의 결은 달라지지 않는다. 매 작품의 방향성은 조금씩 달라져도, 최성민 작가는 현실의 묘한 순간들을 끝까지 포착하며 끝내 그 순간에 깃든 이면을 드러낸다. 작가는 어떻게 현실을 바라보기에 일상의 조각들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심리를 짚어낼 수 있었을까. 2013년 독립만화잡지 <쾅>(QUANG)에서 처음으로 단편 작품을 발표한 이후 꾸준히 독립만화의 영역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최성민 작가를 2024년 4월1일 서울 신촌의 독립연구공간 캣츠랩에서 만났다.

최성민 작가 작업 도구. “최근 만화는 모두 아이패드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이패드 거치대, 블루투스 키보드, 만화 전용 앱인 클립스튜디오의 단축키 리모컨으로 호환되는 조이스틱도 필수 도구죠.”

최성민 작가 작업 도구. “최근 만화는 모두 아이패드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이패드 거치대, 블루투스 키보드, 만화 전용 앱인 클립스튜디오의 단축키 리모컨으로 호환되는 조이스틱도 필수 도구죠.”


만화는 언제 처음 관심을 갖게 됐나요.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유치원 때 가까이 살던 사촌 언니가 있었는데, 만화책이 항상 많았던 집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정말 어릴 때부터 만화는 항상 자연스럽게 제 손에 붙어 있는 존재였어요. 아무래도 한창 <드래곤볼>이 유행할 때라서 그런가, 저는 도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이 정말 좋았어요. 어른이 되어 다시 봐도 너무 재미있는 만화예요. 그리고 와타세 유의 <환상게임>. 그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2D에서 느낀 첫사랑이었어요.”

<드래곤볼>은 일본은 물론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죠. 작가님은 <드래곤볼>의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요.

“저는 도리야마 아키라가 그려내는 세계관이 정말 좋았어요. 배경이 미래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선사시대 같기도 하잖아요. 타임머신이 나오는가 하면 공룡이 나오기도 하고. 이런저런 것들이 마구 뒤섞인 세계관이 무척이나 흥미로웠어요. 자유롭고 재미있게 느껴졌으니까. 여기에 캐릭터들도 범상치 않잖아요. 일본 소년만화들은 우정을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느낌이 많은데, 손오공은 정말 전투 그 자체에만 미쳐 있는 캐릭터잖아요.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고, 만화의 재미에 집중한 단순함에서 오는 강렬함이 있어요. 여기에 부르마나 치치 같은 여성 캐릭터들도 누구 하나 개성이 겹치지 않고 통통 튀고 독보적이죠. 캐릭터에 몰입하면서 <드래곤볼>을 봤어요.”

미래 같고 과거 같았던 <드래곤볼>의 세계관

사실 <드래곤볼>은 이제 ‘현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만화의 정석이 된 작품이잖아요. 작가님이 그리는 작품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는 느낌도 듭니다. 혹시 만화를 그리면서 <드래곤볼>에 영향을 받은 점이 있을까요. 

“영향이 확실히 있죠. 저는 <드래곤볼>에서 자유로움을 느껴요.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구나. 창작자 입장에서 <드래곤볼>을 보면 자유로움이나 해방감이 있다고 할까요. 가끔 만화를 그리면서 겁이 나는 순간이 있어요. 예를 들면 <좁은 방>은 제가 그렸던 작품 중에서도 상당히 현실적인 배경이잖아요.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삶과 배경을 그려야 하다보니 ‘틀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런데 <드래곤볼>은 그러지 않으니까. 현실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감각으로 배경이나 디자인을 만들잖아요. <드래곤볼>만이 제가 SF나 판타지적 경향의 작품을 주로 만들게 된 계기는 아니지만, <드래곤볼>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2024년 4월1일 최성민 작가가 서울 신촌의 한 작업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류우종 기자

2024년 4월1일 최성민 작가가 서울 신촌의 한 작업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류우종 기자


지금까지 그린 만화들이 일상을 장르적인 느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드래곤볼> 외에 어떤 점들에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평소에 하는 생각이 제 작품에 많이 담기게 되는 게 있어요. 자전적인 이야기하고는 또 달라요. 제 이야기를 저 스스로 하는 것에 부담을 가질 때가 많아서. 캐릭터나 배경은 나 자신하고 동떨어져 있도록 만들면서, 평소에 하는 생각을 버무리는 느낌으로 작품을 완성하게 되네요. 가령 <퓨러파잉 F>(Purifying F, 2020)는 사소한 생각에서 시작한 작품이었어요. 어느 날 밖을 나가는데 미세먼지가 너무 심한 거예요. 정말 싫더라고요. 이제는 숨도 마음 놓고 못 쉬는 세상인가. 그런 불평을 하다가 다시 어느 순간, ‘내가 사실은 남들과는 다른 특이 체질이어서 온 세상의 모든 오염물질을 내 안에 가둘 수 있는데, 그 체질 때문에 내가 희생돼서 세상이 깨끗해진다면?’ 그런 상황을 생각하게 된 거죠. 어떤 의미로는 좀 황당하기도 하고 우스운 상황을 생각하다가, 이제 여기에 살을 붙여서 작품을 만들게 됐죠.”

 

2024년 4월1일 최성민 작가가 서울 신촌의 한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류우종 기자

2024년 4월1일 최성민 작가가 서울 신촌의 한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류우종 기자


황당하고 우스운 상황에 살을 붙이다

그렇게 일상에서 느끼는 생각을 포착하면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장르적으로는 SF나 환상적인 느낌이 강해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서는 탁 가라앉는 느낌으로 여운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어둠에서 완벽한 도피는 할 수 없다는 감각을 줄 정도로요.

“하지만 저는 현실과 환상을 완벽하게 구분하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이미 환상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잖아요? 밤마다 꾸는 꿈도 그렇고, 망상이나 착시 현상도 그렇고. 현상이나 사물을 왜곡해서 인식하는 순간도 적지 않죠. 그렇게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와 생각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삶을 살잖아요. 저는 삶에서 마주치는 그런 환상적인 요소를 약간 극대화해서 만화적으로 표현해요. 환상이 현실과 결코 떨어져 있지 않기에, 제가 주로 하는 만화의 장르가 SF적인 성향이 강해도 은유적으로 현실을 잘 포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계속)성상민 문화평론가

◆<좁은 방> 최성민 작가 인터뷰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

“만화를 그리면서 나를 더 좋아하게 됐어요.”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58.html

팁박스-최성민의 상상력 

최성민 작가의 상상력은 기발하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표현법은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 고사가 생각날 정도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마치 현실과 환상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한 몸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처럼, 최대한 환상적인 요소를 배제한 장편 만화 <좁은 방>에서도 작가는 주인공들의 망상이 점차 현실과 겹치면서 생기는 무수한 심리를 밀착력 있게 그려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환상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는 작가의 솜씨는 만화가 빚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 어떻게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엿보게 한다. 

또한 그의 상상력은 현실 속 우리의 삶과 긴밀한 연관성을 맺으며 과감한 상상력을 가미한 표현에서도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단편 <퓨러파잉 F>에서 선보인 ‘심각한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한 능력을 지닌 자들에게 임무가 맡겨진다’는 설정은 히어로물의 클리셰를 비틀어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세태를 고민하게 한다. 그렇게 최성민의 만화에서 상상력은 현실에서 시작한 존재이자 어떤 순간에선 상상으로 빚어낸 모습에서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작품 목록

<출동! 샤바라> 2016~2018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연재. 아쉽게 단행본이 나오지 못한 작품.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여성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쾌하지만 날카로운 아동 만화.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 2020년 만화세계 펴냄. 최성민 작가의 첫 단행본. 쉽게 분리할 수 없는 현실과 환상을 소재로 한 3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퓨러파잉 F> 2020년 만화세계 펴냄. 두 편의 SF 단편이 수록된 단행본. 비현실을 말하면서도 결코 현실과 떨어지지 않는 최성민의 스타일이 빛을 발한다.

<좁은 방> 2021~2022년 카카오웹툰 연재. 2023년 송송책방에서 단행본 출간. 최성민 작가의 첫 번째 웹툰. 배경과 소재는 가장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루는 감각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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