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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달려?” 대표 힐링툰 작가 돌배

돌배① <샌프란시스코 화랑관><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율리>…치밀한 설계로 그려낸 ‘안전한’ 세상
등록 2024-05-18 07:19 수정 2024-05-23 06:14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에서 ‘바람’이 던지는 “왜 안 달리냐”는 말은 누구든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힘이 있다. 돌배 제공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에서 ‘바람’이 던지는 “왜 안 달리냐”는 말은 누구든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힘이 있다. 돌배 제공


“왜 안 달려요?”

42.195㎞를 넘어 100㎞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하는 러너, ‘바람'의 말이다. 웹툰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에 등장하는 이 대사를 읽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따끔했다. 정곡을 찔려서가 아니라, 정말로 달리고 싶어서. 만화를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과 함께 달리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나는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아침 조깅에 나섰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으로 데뷔한 돌배 작가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 <계룡선녀전>을 잇달아 냈다. 특히 계룡산에 살던 선녀 바리스타가 서울로 와서 카페를 연다는 사랑스러운 설정을 가진 <계룡선녀전>은 2018년 티브이엔(tvN)에서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된 바 있다. <계룡선녀전>은 돌배 작가 특유의 다정다감한 정서와 고전 설화가 만나 탄생한 만화로, 전반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속 깊은 서사로 독자들을 한껏 매료시킨 걸작이다. 그는 매 작품에서 누구든 기꺼이 발 들여놓고 싶을 만한 따뜻한 세계를 그려낸다. 잘 만든 이야기 속에 푹 잠겨 있고 싶은 날이면, 기꺼이 그의 만화를 펼친다.

따뜻한 힐링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헤어진다음날, 달리기> 등을 그린 돌배 작가. 류우종 기자

따뜻한 힐링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헤어진다음날, 달리기> 등을 그린 돌배 작가. 류우종 기자


흔히 이야기는 이야기를 만든 사람의 모습을 닮는다고 한다. 이토록 다정한 세계를 보여주는 만화가 돌배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어떻게 이런 세계를 그려내는 걸까. 마침 따뜻하게 봄바람이 불어오던 날, 만화가 돌배를 만났다.

애니메이터에서 만화가로

돌배 작가의 데뷔작인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의 아이티(IT)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성 ‘가야’다. 돌배 작가 역시 그 당시 미국의 게임 회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만화를 어린 시절부터 좋아해 만화가를 꿈꿨지만, 당시 주변의 만류로 만화가의 길을 선뜻 걷기는 어려웠다. 그 대신 선택한 것이 애니메이션이었다.

본래는 꿈이 만화가였다고요. 애니메이터의 길은 어땠나요?

“저는 원래 다른 거로 돈을 열심히 벌어서, 50대쯤 일찍 은퇴하고 벌이에 상관없이 그리고 싶은 만화를 마음껏 그리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게임 회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면서 틈틈이 그렸던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을 네이버웹툰에 정식 연재하면서 전업 작가가 됐죠. 처음 애니메이션 공부를 시작할 땐 출판만화와 애니메이션 작업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움직임을 다루는 작업이에요. 반면 출판만화는 이야기와 정적인 컷을 다룬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어요. 만화를 좋아해서 애니메이터가 됐지만, 출판만화와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서로 요구되는 재능이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제가 생각했던 출판만화 작업과는 크게 달랐지만, 이것도 적성에 맞아서 정말 재밌었어요.

회사에서 제 별명이 ‘드래곤 마스터’였어요. 3년 동안 용만 애니메이팅(정지된 캐릭터를 움직이도록 그리는 작업)했거든요. 유저가 알을 사면, 거기에서 새끼 용이 나오고, 새끼 용이 시간이 지나 점점 자라는 모습을 그렸어요. 앉아서 날갯짓하기도 하고 불을 뿜기도 하고요. 그 이후엔 사람이 광선검으로 싸우거나 총을 쏘고 앞뒤로 구르는 장면들을 그렸는데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렇지만 이런 작업을 했던 경험이 켜켜이 쌓여서 지금 웹툰을 그릴 때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2024년 2월28일 조경숙 만화평론가가 돌배 작가를 인터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2024년 2월28일 조경숙 만화평론가가 돌배 작가를 인터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나랑 같이 태권도 합시다!”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가야’처럼 작가님도 미국의 게임 회사에서 일하면서 화랑관에 다녔다고 했죠. 원래 운동을 좋아하거나 잘하는 편이었나요?

“전혀요. 제일 못하는 걸 꼽으라면 늘 운동이라고 대답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일하면서 건강이 많이 나빠졌거든요. 원래는 늘 긍정적이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부정적인 마음이 생긴데다 자신감도 떨어졌죠. 운동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 어쩌면 생존 본능이었을지 몰라요. 처음에는 헬스장에 다녀봤는데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더라고요. 그런데 화랑관에 다니고 나서 운동에 재미를 붙였어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주변에 마구 말하고 다녔죠. 그땐 머릿속이 태권도로 가득 차 있었어요. 옆차기를 어떻게 하면 잘하지 고민하고, 매일 연습하고.

원래 처음 시작하면 그렇잖아요. 고수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 이야기를 잘 안 하지만, 초심자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떠들죠. 그런데 제가 태권도 너무 좋다고 계속 이야기하니까 오히려 지인들은 더 시큰둥한 것 같았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말로 하지 말고 만화로 그려서 보여주자.’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에 대해 종종 독자들이 ‘힐링툰’이라고 말하는데, 처음엔 의아했어요. 원래 이 만화의 주제는 딱 하나였거든요. 나랑 같이 태권도 합시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도 그렇게 시작된 작품인가요? 러닝을 좋아해서 ‘같이 러닝하자’ 하는 마음으로요.

“음, 비슷해요. 제가 너무 좋아하고 또 재밌어해서 그리게 됐죠. 원래는 달리기를 정말 못했어요. 그런데 태권도에서 검은띠를 따려면 5㎞를 꼭 뛰어야 하거든요. 그것도 ‘워밍업’으로요. 다른 사람들에게 5㎞는 준비운동 수준인지 몰라도 저한텐 정말 힘든 거리였어요. 검은띠를 따고 싶다는 일념으로 2년 동안 달리기를 연습했어요. 처음엔 500m도 채 못 달렸는데, 매일 연습하다보니 2년이 지나서는 비로소 5㎞를 달릴 수 있더라고요. 저는 달리기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 검은띠를 따고 나서도 계속 달렸죠. 그 이후 제주도 하프 마라톤, 하와이 풀 마라톤에도 도전했고요.

큰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언제나 정말 잘 뛰는 선두 그룹 주자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 주자들이 정말 다양해요. 나이 든 분도 많고, 러닝셔츠 하나 입고 심지어 샌들 신고 달리는 분도 있어요. 동네 마실 나온 차림으로 풀 마라톤을, 그것도 가장 빨리 달리는 거예요. 그분들을 보면서 생각했죠. ‘아, 달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누구도 공격받지 않는 세계
<계룡선녀전>의 한 장면. 돌배 제공

<계룡선녀전>의 한 장면. 돌배 제공


“너의 그 굶주림을 위로하기 위해, 온 우주가 너를 위해 움직였단다”<계룡선녀전>)

오랜 옛날, 굶어 죽은 아이의 억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온 우주가 움직였다는, 이 대사는 여전히 심금을 울린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착하고 불쌍하기만 했냐면, 그렇지 않다. 틈만 나면 툴툴거리고 불평불만이 많은데다 전생엔 연못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으니까. 모난 구석이 많은 캐릭터지만 그럼에도 ‘온 우주가’ 그를 기꺼이 품어준다.

돌배 작가의 ‘우주’는 그렇다. 가야에게 괜스레 시비를 거는 ‘페넬로페’(<샌프란시스코 화랑관>), 주인공을 차버린 전 여자친구 ‘선진’(<헤어진 다음날, 달리기>) 등 얄밉게 등장한 캐릭터도 이야기가 진행되다보면 모난 구석마저 사랑스러운 조연 캐릭터로 변화한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제각기 매력이 있다. ‘썩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이곳 안에서, 독자들마저 이해받는 기분이 드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작가님 작품에는 늘 ‘힐링툰'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녀요. 작품을 읽다보면 위로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제 작품에 ‘힐링툰'이라는 이름이 붙는 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장단이 명확하죠. 현실에 분명 존재하는 극한 갈등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작품 안에서는 안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창작하는 세계 안에선 그게 누구든 공격받지 않고 포용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죠.

특히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페넬로페’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특정한 모델이 있는 건 아니고 제가 미국에서 만났던 친구들의 여러 가지 면면을 모자이크처럼 엮어서 만든 캐릭터거든요. 가끔 얄미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는 없고 나름의 사랑스러운 면면을 갖춘 인물이죠. 딱 우리 주변의 친구들처럼요.”

조경숙 만화평론가 

<샌프란시스코 화랑관><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율리> 돌배 작가 인터뷰는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15년간 쌓아올린 또다른 세계’(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26.html)◆ 

팁박스-돌배 작가의 설계도
돌배 작가는 15년간 콘셉트를 구상한 작품 <율리>의 세계를 위해 별도의 아트북을 만들었다. 아트북에는 캐릭터마다 캐릭터의 특징, 외형, 복장, 옆모습, 앞모습 등을 꼼꼼히 그려 넣은 캐릭터시트 등이 포함돼 있다. 돌배 제공

돌배 작가는 15년간 콘셉트를 구상한 작품 <율리>의 세계를 위해 별도의 아트북을 만들었다. 아트북에는 캐릭터마다 캐릭터의 특징, 외형, 복장, 옆모습, 앞모습 등을 꼼꼼히 그려 넣은 캐릭터시트 등이 포함돼 있다. 돌배 제공


둘둘 말린 족자를 펼치면 그림으로 그려져 있던 노트북이 튀어나오고, 세로 선이 그려져 있는 돌멩이를 모아 탑을 쌓고 선을 이으면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슴의 눈물’ ‘검은 물’ 같은 희한한 이름의 블렌딩 커피와 미국인 관장님이 지니고 다니는 ‘설악산 방문 기념' 죽도까지. 돌배 작가의 작품에는 발견하면 ‘풋' 웃음이 터지고야 마는 소박하고 귀여운 아이디어가 곳곳에 숨어 있다. <계룡선녀전>의 선녀는 어째서 직업이 ‘바리스타'일까?

돌배 작가는 “처음엔 시장에서 무를 파는 상인”이었다고 콘셉트를 설명했다. 다만, 선녀가 재배하는 무인 만큼 다른 무와 다르게 유난히 싱싱하고 행복해 보이는 무라는 설정. 그러나 어쩐지 이야기와 맞지 않아 설렁탕으로도 바꿔봤다가, 여러 고민과 배치 끝에 현대인에게 가장 친숙한 커피를 골랐다고 한다. 무엇 하나 ‘그냥’ 선택되지 않고 여러 아이디어를 이리저리 대입해본 끝에 그려지는 치밀한 설계의 산물이다.

특히 그는 최근 연재를 재개한 <율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별도의 아트북을 만들기도 했다. 이때 그린 <율리> 아트북은 2023년 11월부터 2024년 1월 말까지 청강만화역사박물관에서 ‘판타지 모험물 율리 컨셉아트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됐다. 아트북에는 캐릭터마다 특징과 외형, 복장, 옆모습과 앞모습 등을 꼼꼼하게 그려 넣은 캐릭터 시트와 <율리>의 세계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양이나 무늬, 이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종의 식물과 바위 혹은 동물의 모습이 다수 포함됐다. 아트북에 포함된 요소들이 워낙 방대하고 상세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아트북을 보고 나면 <율리>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말 그대로의 설계도인 셈이다.

작품목록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2013년 11월6일~2016년 3월9일 네이버웹툰에 연재.
돌배 작가의 데뷔작이자 ‘2017 오늘의 우리만화’ 선정작. 미국에서 타향살이하는 ‘가야’의 향수병 극복을 위한 태권도 입문기. 

<계룡선녀전> 2017년 3월1일~2018년 3월14일 네이버웹툰에 연재.
고전설화 ‘선녀와 나무꾼’을 재해석한, 선녀 바리스타의 ‘신랑 찾기’ 여정. 2018년 tvN에서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됐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 2017년 9월6일~2018년 8월12일 저스툰에 연재.
달리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무려 100㎞에 이르는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율리> 2021년 2월19일부터 네이버웹툰에 연재 중.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가상의 국가, ‘함백’에서 시작되는 신비로운 여행기.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동양 판타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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