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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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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전쟁과 평화’ 2부―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남북한 주민 개개인의 의지를 더하는 과정
등록 2023-01-28 10:00 수정 2023-01-30 01:42
2018년 9월19일 저녁, 남북 정상회담으로 북한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환영공연을 관람한 뒤 환대해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평양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9월19일 저녁, 남북 정상회담으로 북한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환영공연을 관람한 뒤 환대해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평양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제1445호 ‘6·25 전쟁을 거치며 비로소 국민이 됐다’-‘전쟁과 평화’ 1부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177.html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이용악, 〈오랑캐꽃〉 ‘전라도 가시내’

북관(北關)은 함경북도를 이르는 옛말인데, 우리의 삶에서 지워졌다. 무산, 회령, 온성 같은 이름은 그저 사회과부도에 적혀 있을 뿐이다. “한반도에서 두 번째 높은 산은?”이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우리는 대부분 한라산을 떠올린다. 백두산의 높이는 2744m이고, 한라산은 1950m이다. 2천 고지의 산 50개가 백두산을 시작으로 함경도 곳곳에 솟아 있다. 한라산은 정확히 한반도에서 51번째로 높은 산이다.

2013년 7월29일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참전 용사와 가족 220여 명이 판문점을 방문한 가운데, 북쪽 판문각에도 중국을 통해 온 것으로 추정되는 관광객들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3년 7월29일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참전 용사와 가족 220여 명이 판문점을 방문한 가운데, 북쪽 판문각에도 중국을 통해 온 것으로 추정되는 관광객들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전라도에서 함경도까지, 한 뿌리 두 나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읍과 무산군 연사면 경계에 있는 관모봉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2540m다. 사시사철 눈 덮인 산이 흰 관을 쓴 것 같았다는데, 너무나 깊고 아름다웠던 탓에 일본인들이 봉(峰)이라고 격을 낮춰 불렀다. 여기서 시인 이용악이 태어나 자랐다. 관모봉 곁에서 두만강 너머 만주의 거친 바람 속 전라도 가시내를 봤을 것이다. 북관에 이른 전라도 사람들, 만주가 온전히 우리의 생활 영역이었을 때 ‘전라도 가시내’라는 절창이 탄생했다.

민영규 선생의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이건창·이건승·이건방 형제와 정인보, 또 황현과 이상설, 이회영 등 황은을 입어서가 아니라 그저 부끄러워서, 자신의 양지를 배반할 수 없어 자결, 망명, 독립운동 투신에 다다른 분들의 이야기다. 이 글에 마음을 눌러온 문장이 있었다. 이웃 마을에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건승이 만주를 향할 때, “장조카 범하가 작은아버지 춥겠다며, 이부자리를 메고 먼 길을 뒤따라왔다”. 서늘했다. 조선 500년을 압축하면 이 문장이 될 듯하다. 지금 그분들의 눈물겨운 서사에 가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보재 당시 이 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은 모두 그것을 소왕영이라 불렀다. 문창범·김립·원세훈 등이 이 소왕영 출신이고, 안중근 의사의 두 아우, 안정근·안공근 형제가 이 소왕영에 닷새갈이 농장을 경영하면서 추운 고장에 적응할 수 있는 경작법을 개발하되, (…) 북위 50도, 흑룡강 중류까지 수도농사를 몰고 간 그 끈질긴 감내 정신이야말로 인류사적 차원이라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민영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 ‘강화학 최후의 광경’

<오랑캐꽃> 이용악 지음 시인생각 펴냄, 2013년

<오랑캐꽃> 이용악 지음 시인생각 펴냄, 2013년

애써 감추고 묻은 공동의 삶과 서사

1864년 갑자도강, 1865년 을축도강, 1869년의 기사흉란과 육지통상, 1910년 경술합방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우리는 연해주 수분하와 우수리강, 흑룡강 유역으로 이주했다. 50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안정근·안공근 형제의 쌀농사 성공도 큰 몫을 했다. 여기서 보재 이상설이 1914년 5월, 대한광복군 정부를 선포했다. 보재는 “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했을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의 가르침”을 따랐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과 관련한 모든 문서를 불살라 일본 군경으로부터 동지를 지켰다. 보재 사후 자유시에서 사할린 독립군 1천 명을 고려공산당이 포위 상잔한 비극을 일으킨 것은 두고두고 한이 되는 일이었다. 우리 역사의 심장에서 피 절반이 빠져나간 심정이다. 이뿐이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스스로 덮어버렸을까.

한반도에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한국은 대륙으로의 통로가 끊겨 하늘길과 바닷길만 남았고, 북한은 마음의 통로를 끊고 스스로 문을 닫았다. 한국은 국제적 분업체계 안에서 발전했지만 북한은 고립을 자초하며 자력갱생을 도모한다. 역사도 존경하는 인물도 완전히 멀어진 채 78년이 흘렀다. 대결은 계속되고, 그러는 사이 품격과 기품이 온데간데없다. 대륙을 향한, 해양을 향한 서로의 상상력이 축소됐고, 공동의 서사는 애써 감췄다. 숱한 삶도 묻혔다.

남북 화해와 통일도 결국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비교할 수 있는 공동의 과거가 없으면 지금에 만족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공동의 역사를 만들어가지 못하면 나아질 필요성도 없어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찍이 통일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1> ‘나의 3단계 통일론’)고 생각했다. 만남과 대화는 그 자체로 공동의 역사가 되고, 전진의 근거가 된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남긴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평양 5·1경기장 연설에서 “우리는 5천 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라는 평범한 말로 기억의 세포를 깨웠다. 우리 국민 개개인, 북한 주민 개개인, 그 의지의 총합 없이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 남북 정상 간 합의를 북한 주민 15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발표한 용기 역시 되새겨볼 만하다.

<강화학 최후의 광경〉 민영규 지음, 우반 펴냄, 1994년

<강화학 최후의 광경〉 민영규 지음, 우반 펴냄, 1994년

북한의 ‘남침’ 사과, 얻을 게 더 많아

“평양 시민 여러분,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오늘 나와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에서 전쟁 공포와 무력 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또한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 –문재인, ‘5·1경기장 연설’, 2018년 9월19일

우리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전의 성과를 백지화한다. 북한도 매번 어렵게 맺은 협정을 깨버린다. 이 계속되는 도돌이표가 무척 절망스럽지만, 남북 정상들의 감격스러운 만남은 우리 마음속에서 쉬 사라지지 않는다. 15만 북한 주민에게 남겨진 연설도 일일이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평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더해지는 과정이다. 순수한 동기를 간직한 임동원, 서훈 같은 피스메이커들의 고난도 제대로 평가받을 날이 올 것이다.

남북관계에는 우리 국민과 북한 주민이 빠져 있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한반도에서 새로운 세기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8천만 겨레의 열망이 필요하다. 정치적 선언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교류와 협력은 생명이 짧다. 개인과 기업, 민간단체와 지방자치단체의 자발적 움직임이 중요하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표현대로, ‘광폭 행보’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가운데 새로운 애국심으로 뭉쳐야 한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빠르게 회복하고, 지지와 협력 속에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국 국민의 응원도 필요하다. 한국은 핵에 반대하지만, 체제가 무너져 핵무기를 지킬 수 없는 무정부 상태 역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민주주의국가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힘은 국민에게 나온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남침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북한은 한-미 군사훈련을 두고 침략 연습이라 목청을 높이지만 침략을 당한 한국 국민 입장에서는 이율배반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 북한이 얻을 것이 훨씬 많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빌리 브란트의 사례가 있다.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최영태 지음, 성균관대 출판부 펴냄, 2020년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최영태 지음, 성균관대 출판부 펴냄, 2020년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의 바르샤바 방문 일정에는 도착 다음날 두 번의 헌화가 계획되어 있었다. (…) 브란트는 참배를 위해 마련된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 폴란드인들에 대한 미안함이 갑작스럽게 브란트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일 뿐이었다. (…) 세계 역사에서 과거사를 반성하고 정리하는 가장 모범적인 사과 방식의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최영태,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브란트의 동방정책, 절반의 통일론’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세계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했다. 전범국가 독일은 세계인의 선입견을 바꿀 수 있었고, 유럽의 평화와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의 선두에 섰다.

한국전쟁으로 국군 13만8천 명이 전사했다. 45만 명이 부상했고, 2만5천 명이 실종됐다. 사망, 학살, 부상으로 희생된 민간인은 100만 명에 이른다. 10만 명이 고아가 되고, 320만 명이 고향을 떠나고, 1천만 명이 이산의 고통을 겪었다. 78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한국 내부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제국주의 전쟁과 냉전은 오래전 끝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의 체제 경쟁도 이제 의미 없다.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는 8천만 겨레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후대에 상상력의 공간을 회복해주고 그들이 공동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바람대로 ‘인민의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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