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팬데믹과 접경
② 코로나 시대, 국가와 민족의 ‘귀환’
③ 행성적 사이버네틱스
④ 국경여행, 경계에 선 삶들의 만남
일상이 위협받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다. 2019년 등을 먼 미래로 내다본 리들리 스콧의 공상과학(SF)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더불어 자랐고, 영화 속 미래와 그것이 도달한 현재를 비교하며 SF의 시간관에 관해 남의 일인 양 이야기하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에 맞닥뜨렸다. 텅 빈 채로 산개됐거나 모래로 뒤덮인 거리는 아니지만,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일상은 빠르게 휘발 중이고 일상의 경계가 집 안으로 다시 그어졌다. 학교와 회사는 물론 박물관과 극장 등도 집 안에 설치됐다.
디지털 장치가 일상을 집 안으로 재배치하면서 집 바깥에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연주회·공연장에 가는 일 등은 희소해졌다. 혹시 그것이 가능해도 2021년 3월의 한국을 기준으로 할 때 4명 이하, 밤 10시 이전으로 제한됐다. 그마저도 얼굴에 설치된 경계인 마스크로 인해 우리 일상이 집 바깥에선 항시적 예외 상태라는 사실이 환기된다.
집 안에서의 일상이란 그간 적잖은 학습 과정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장치의 놀라운 발전으로 대체로 견딜 만한 것이기도 하다. 2020년 4월 미국 카네기홀은 ‘라이브 위드 카네기홀’ 프로젝트로 공연의 무료 라이브 스트리밍을 제공했고, 5월 어느 날 나는 카네기홀 프라이데이스(매주 금요일 과거의 연주 실황 온라인 무료 감상 서비스)에서 송출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에게 한껏 이야기의 상상력을 선물하는 동화작가 모 윌렘스의 그림과 이야기 교실에 네 살배기 아이와 함께 ‘출석’한 적도 있다. 이제 공연장에 가지 않고도 공연을 즐길 수 있으며, 아티스트들의 방한을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다. 2020년 전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문화변동이다. 문화예술에서 경계 그리고 접근성의 문제가 사라진 듯 보이기도 한다. 팬데믹이라는 전세계적 동시성은 이런 동시성의 프랙털(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 형태와 닮은 도형) 구조를 품고 진화한다.
정작 문제는 일상을 계기로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안부를 묻고, 그것을 ‘치유’라 하든 ‘힐링’이라 하든 삶의 회복을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희소해졌다는 점이다. 이 또한 오래전부터 디지털 장치로 대체돼 낯설지 않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집에서 혼자 보내는 일상은 그렇다 쳐도 혼자인 삶은 여전히 위태롭다. 고독사,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생활고 비관 자살 등이 팬데믹과 더불어 더욱 곪아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집 안으로 축소된 일상의 경계는 위험하다.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사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불 밖만큼이나 이불 안도 위험하다. 그 이유를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이 어떤 경계에 근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경계에 선 사람들은 각자 방에 유폐돼 ‘호모 디기탈리스’(Homo Digitalis)가 되는 대신 그 방 너머의 삶을 기록하고 상상해야 한다.
다시, 일상의 경계가 집 안으로 재설정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야기를 풀어보자. 집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 넷플릭스는 일종의 선물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옥자>(봉준호 감독·2017)의 칸영화제 초청을 계기로 플랫폼 논쟁을 벌였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인데, 팬데믹 상황에서 그 플랫폼의 명칭인 OTT(Over The Top)처럼 넷플릭스는 영화와 극장을 압도했다.
이 기간에 본 영화 몇 편이 떠오르는데, 그중 첫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바우테르 살리스 감독·2004)다. 국내에선 원작이 된 체 게바라의 여행기 출간과 동시에 개봉되면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켰다. 이 여행기와 영화는 체 게바라가 되기 전의 에르네스토 게바라(푸세르)와 알베르토 그라나도의 라틴아메리카 횡단기다. 둘은 금세 멈춘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낡은 모터사이클 포데로사를 나눠 타고 9개월간 숱한 국경을 넘는다.
모터사이클을 탔다지만 점차 걸어서 국경 넘는 일이 허다해지면서 영화에서 접경에 대한 기록은 꽤 흥미롭게 이어진다. 대학 졸업을 앞둔 두 젊은이가 실감하는 월경의 쾌감이나 여행경비 걱정은 국경을 넘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접경에 대한 관찰과 기록으로 이동한다. 개발 때문에 주거지를 잃고 떠돌이 생활에 내몰린 선주민들, 문명을 도둑맞은 퇴락한 잉카 유적, 그리고 정치 이념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찾는 추키카마타 광산을 차례로 응시하면서 푸세르는 경계에 관한 사유를 시작한다. 나병 환자를 돌보기 위해 찾은 산파블로에서 푸세르는 피부로 전염되지 않지만 접촉이 꺼려지는 환자와 비환자 사이의 약속인 장갑을 끼지 않고 나병 환자의 손을 잡는다. 그곳을 떠나기 전날 환송회이자 생일파티 장면을 통해 영화는 푸세르의 일기 한 구절을 이렇게 옮긴다. 여행을 통해 한 가지 신념이 생겼으며, 그것은 라틴아메리카를 분리하고 있는 경계를 허물자는 것.
푸세르의 눈에 비친 접경은 분할과 점령, 감시와 처벌, 배제와 차별 등의 장치로 구축돼온 세계의 최전선이었다. 접경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소외된 공간일 뿐만 아니라, 국가가 바라지 않는 사람의 출입국을 통제하는 국경이 상징하듯 주거·이동·노동 등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국가의 야만적 독점을 확인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국경이 생기면서 접경은 국가로부터 송두리째 도둑맞았다. 정상국가를 위해 부인된 삶들만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꼭 접경에서만의 일이겠는가. 도시 중산층 계급에서 자라 의사가 되려는 푸세르가 보지 않았던 세계에 대한 환대의 감각이 접경에서 전이된다. 푸세르는 어느새 처음 당도한 접경에서 향수를 발견하고, 결국 그라나도가 그토록 탐내는데도 여행의 대미를 위해 꼭꼭 숨겨놓았던, 연인 치치나로부터 받은 돈을 광산에서 만난 부부에게 아무렇지 않게 건넨다.
이것을 경계에 선 사람들이 만나 빚는 ‘환대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푸세르는 선천성 천식 환자다. 그의 삶은 언제나 죽음과의 경계에 서 있다. 그러고 보니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경계에 선 삶들의 표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광야로 사라질 마을, 국가의 야만에 약탈당한 문명, 죽을 것 같은 삶, 그리고 모터사이클 포데로사. 다행스러운 건 이들이 계속해서 만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실화라지만, 각자의 경계에 선, 그리고 그 이유로 도둑맞은 삶들이 만나 삶의 복원을 이야기하는 환대의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다. 산파블로에서의 마지막 밤, 푸세르가 나병 환자들이 머무는 섬으로 헤엄쳐 가는 장면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카메라는 고군분투하는 푸세르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를 응원하는 수많은 나병 환자의 환대를 클로즈업하느라 분주하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푸세르와 그라나도가 한 여행은 일종의 국경여행(Border Tourism)이다. 실제 국경을 넘었고, 주로 접경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국경여행인 것은 그 효과에서 찾을 수 있다. 국경여행은 이질적인 삶, 문화, 제도 사이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타자의 경험을 통한 주체의 변화를 수반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국경여행은 여행에 내재하는 사적인 경험을 세계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에 접속시킨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적 행위에 근접한다. 실제로 국경여행은 199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국가 간 연대를 위한 탈냉전적 세계지도 그리기로 증대됐다. 냉전의 지정학적 경계선으로서 국경의 폐쇄성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충분했다. 최근의 국경여행은 접경에서의 생태운동 등 여전히 중앙의 반대 벡터로 유영 중이다.
국경여행은 전세계 국경이 존재하는 모든 지역에서 가능하지만, 특히 냉전의 마지막 현장으로서 한반도처럼 국경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지역에서 더욱 절실하다. 남북 사이 국경여행이란 사실 국경을 넘지 못할뿐더러 접근 또한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간 우리의 국경여행은 안보교육을 위한 교보재(교육보조재료)였고, 백두산에 접근하기 위한 우회로였다. 최근 단둥, 지안, 투먼, 훈춘 등 북-중 접경에서 국경여행을 공식화할 가능성이 검토됐으나 이 지역의 부동산 시세와 물가 상승만을 남기고 잠정 중단됐다.
이런 시도가 한반도 접경을 남북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접경으로 시야를 확대하는 점은 고무적이나, 그럼에도 남북 국경여행은 비무장지대(DMZ)를 경유할 필요가 있다. 캠프·수용소·초소·철조망 등 냉전 경관만이 아니라 DMZ에 보존된 분단 이전 삶의 원형과 생태를 함께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접경을 삶의 복원을 위한 평화 구축 공공재로 재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국경을 넘어 북한을 경험하고 또 그 반대가 가능해지는 국경여행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당장 접경에 양쪽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국경여행이 더 긴요하다.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열린 3차 북-미 정상회담은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연출했다. 다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판문점 인근에서 남·북·미 정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여 있었던 것. 그 결과야 어떻든, 남북 사이 평화 구축은 더 자주, 더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2021년 2학기, 한국에선 최초로 ‘국경 연구 전공’(Global Border Studies)이 중앙대 국제대학원에 개설된다. 그간 만났던 전세계 수많은 국경 연구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첨예한 학문적·사회적 이슈임에도 이 전공을 특화한 대학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한다. 국경 협력과 평화 구축이라는 오래된 의제를 위해 ‘국경여행 거버넌스’(Border Tourism Governance)를 결성해보면 어떨까. BTS의 넥스트 제너레이션으로서 BTG를 상상해본다, 감히.
팬데믹으로 전면 봉쇄된 국경들 사이에서 ‘발만 헛디뎌도 2주 격리?! 코로나 시대 살벌한 장소 톱4’(<매일경제> 2020년 10월23일치)라는 제목으로 이색적인 국경이 소개된 적 있다. 국경을 위험한 장소로 초점화하는 듯한 이 기사는, 사실 국경이 먼 곳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2019년 사진 한 장이 전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설치된 핑크빛 시소였다. 잿빛의 국경지대, 거대한 철제 장벽을 가로질러 세워진 이 시소는 미국의 건축가이자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의 로널드 라엘 교수와 새너제이주립대학 버지니아 산 프라텔로 교수의 설치예술이다. 미국 뉴멕시코주 선랜드파크와 멕시코 시우다드후아레스 사이의 국경은 이 시소를 통해 (이색적인) 여행지가 됐다. 국경관광의 본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접경을 사람들이 무시로 모이고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이 시소는 두 지역의 만남을 희원하는 메시지이자 동시에, 접경은 늘 이편과 저편의 호혜적인 공간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끔찍한 팬데믹의 선물이 혹시 있다면 우리 삶 자체가 수많은 경계로 빚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뒤늦은 각성 정도가 아닐까. 경계는 국경처럼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곳에도 있으며, 항상 명멸할뿐더러 유동하기까지 한다는 것.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거리로 나설 때마다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마스크로부터 배운 경계의 존재론이다. 우리는 스스로 경계에 선 자고, 우리 삶은 경계를 만들고 지우고 이동시킨다. 그래서 일상의 경계를 집 안으로 다시 긋는 데 일조한 디지털 장치가 정작 발신지의 장소성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까. 이 장치들 덕분에 사람들은 문화예술 감상의 주체적 위치를 경험할 수도 있겠으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사적으로 축소된 감상의 세계에서 주체적 위치란 불가능한 것일는지 모른다.
앞서 언급했던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는 중동 출신의 청년 음악가들로 구성됐다. 1999년 이스라엘계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계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설립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화해, 그 너머 세계의 평화 구축을 위한 연주여행을 다닌다. 이들의 여행이 다시 시작돼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여행도 그리고 국경여행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 기억에 남는 두 번째 영화를 이야기할 때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런 소킨 감독·2020). 1968년 8월 미국 시카고에서 베트남전 종전을 거부한 의원을 대선 후보로 추천하기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각 지역의 청년 운동가들이 이에 분노해 항의 집회를 열었던 실화를 각색한 영화다. 결국, 청년 운동가들이 내란죄로 기소되고 재판받는 과정에서 시종일관 살 궁리만 하던 민주사회학생회 공동대표 톰 헤이든은 재판장으로부터 최후변론자로 지목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동료 앨릭스 샤프가 꼼꼼히 기록한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 4752명의 이름을 낭독한다. 정의의 경계에서 애도하는 경계에 선 죽음들.
국경여행은 이 영화의 엔딩처럼 경계에 선 삶들의 만남이자 그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한 실천이다. 경계에 선 사람들이 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삶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그래서 그것을 공공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존을 위한 작은 시작이다.
전우형 중앙대 접경인문학연구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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