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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지 않은 명예 선수들

인종차별·거친 플레이·부정행위…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 오른 이들의 이면
등록 2021-02-13 15:55 수정 2021-02-18 23:07
사진❶. 위키미디어코먼스

사진❶. 위키미디어코먼스


명예(名譽) [명사] 1.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 2. 어떤 사람의 공로나 권위를 높이 기려 특별히 수여하는 칭호.

한 포털 사이트 어학사전에 설명된 ‘명예’의 정의다. 그렇다면 미국 뉴욕주 쿠퍼스타운에 있는 메이저리그(MLB) ‘명예의전당’에는 과연 명예로운 선수들만 있을까. 딱히 그렇지는 않다. 세상에는 흠결 없는 것이 없고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도 마찬가지다. 괜히 야구를 인생과 닮았다고 하겠는가.

사진❷. REUTERS

사진❷. REUTERS

상대 선수 앞에서 스파이크 날 갈았지만…

일단 타이 코브를 보자. 1994년 토미 리 존스 주연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던 코브는 가히 타격 천재였다. 1905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소속으로 빅리그에 데뷔해 23시즌 연속 3할 타율을 때렸고, 4할 타율도 세 차례나 기록했다. 발까지 빨라서 타격 8관왕에 오른 적도 있다.

그러나 코브는 상당히 거친 선수였다. 그는 도루할 때 다리를 높게 쳐들고 슬라이딩했다(사진❶). 스파이크(바닥에 뾰족한 징이나 못을 박은 운동화) 날을 아주 날카롭게 갈았던 터라, 그를 미처 피하지 못한 수비수의 다리는 종종 피로 물들었다. 코브는 상대 선수들을 겁주기 위해 아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스파이크 날을 갈았다. 그가 도루가 많던 이유는 비단 발이 빨라서만은 아니었다.

코브는 겉으론 재키 로빈슨 등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으나 실상은 ‘KKK’(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극우비밀결사) 단원이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물론 증거는 없다. 그는 관중석으로 난입해 장애가 있는 팬을 폭행한 전력도 있다.

1936년 시행한 첫 명예의전당 투표 때 코브는 베이브 루스 등 다른 4명과 함께 최초의 헌액자로 뽑혔다. 98.23%(226표 중 222표)의 득표율은 루스(95.13%)보다 높았다. 화려한 기록이 그라운드 안팎 일그러진 악당의 모습을 가렸다.

사법처분을 받은 진짜 악당도 명예의전당에 올랐다. 오를란도 세페다(사진❷)가 그 주인공. 세페다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더불어 히스패닉계를 대표하는 선수로 평가받는 강타자로 신인왕,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상(MVP)으로도 뽑혔다. 하지만 그는 은퇴 뒤 푸에르토리코에서 마리화나를 밀수한 혐의로 1975년 체포돼 10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야구기자협회는 그를 명예의전당 입회자로 뽑지 않았다. 하지만 1999년 베테랑위원회가 그를 추대했다. 명예보다 기록이 우선이었다.

사진❸. AP 연합뉴스

사진❸. AP 연합뉴스

선정 때 가장 중요했던 ‘선수 인기도’

부정행위를 일삼고도 명예의전당에 헌액된 이는 수두룩하다. 23시즌 동안 324승을 올린 돈 서턴(사진❸)은 엘에이(LA) 다저스 시절 글러브에 면도날을 숨겨놓고 공을 긋고는 했다. 긁힌 공은 손에 잘 채어져서 제구를 쉽게 해준다.

다른 팀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동료 유격수가 대신 면도날을 갖고 있다가 서턴에게 건네주기 직전 공을 변형시키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최초로 양대 리그에서 사이영상을 받은 게일로드 페리(통산 314승)는 공에 침을 바르거나, 소매 등에 숨긴 바셀린을 발라 던졌다. 은퇴 뒤 바셀린 광고까지 찍었으니 말은 다 했다.

이들 외에 웨이드 보그스는 현역 시절 내연녀인 바버라 월터스가 전국 방송에 출연해 혼외정사를 폭로하며 그를 ‘섹스 중독자’라고 했는데도 명예의전당에 입성했고, 경마장 도박에 빠진 로저스 혼즈비(1942년)에게도 명예의전당이 허락됐다. 끝까지 흑인 선수 영입을 거부한 인종차별주의자 구단주도 당당히 명예의전당에 들어갔다. 이는 메이저리그가 야구 외적인 문제에 꽤 관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구장 내 기록만을 중시했던 것일 수도 있다. 도덕성은 그저 부차적 문제로 치부했을 뿐이고.

돌이켜보면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이 쿠퍼스타운에 세워진 계기는 세계 대공황의 영향이 컸다. 지역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명예의전당이라도 세워 야구를 좋아하는 관광객을 끌어모을 요량이었다. 그 때문에 초창기에는 ‘선수 인기도’가 명예의전당 헌액자 선정에서 제일 중요했다. 유명 스타가 있어야 한 사람이라도 더 방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수가 경기만 잘하면 됐지 그까짓 인격적 흠결쯤이야’라고 생각했을 듯도 하다.

사진❹. REUTERS 연합뉴스

사진❹. REUTERS 연합뉴스

올해는 헌액된 사람 한 명도 없어

요즘 들어 명예의전당 입성이 꽤 까다로워진 면은 있다. 한 예로 배리 본즈(사진❹), 로저 클레먼스, 커트 실링 등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선수들이 최근 투표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본즈와 클레먼스는 금지약물(스테로이드) 복용 의혹, 실링은 경기장 밖 인종차별·성차별적 발언 등이 원인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한 팬들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투표가 더욱 신중해지는 편이다.

표면적으로 압도적인 성과가 나왔을 때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간과되기 쉽다. 빛이 너무 강하면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 작은(혹은 절대 작지 않은) 흠결을 가려버린다. 부정과 부당 이득은 이 과정에서 묻히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 그 작은 흠결이 모이고 모여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예컨대 명예의전당에서 ‘명예’라는 말 자체에 물음표가 생기는 아이러니한 상황. 부당하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명예도 과연 대접해줄 가치가 있을까. 하긴 존중받아야 할 명예지만 결코 존경할 수 없는 명예가 우리 현실에도 많으니까.

여느 스포츠보다 더 많은 경기를 치르는 야구는 나날이 영웅을 토해낸다. 하지만 그 영웅은 위선자일 수도, 인종차별주의자일 수도, 도박꾼일 수도, 싸움꾼일 수도 있다.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이 한 증거다. 숫자가 보여주는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이면을 들춰보자. 늘 말하지만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야구도, 인생도.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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